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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사랑
" 생 뱅상가의 높은 지대에서,/ 한 시인과 이름도 없는 여자가 순간의 시간을 서로 사랑했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했네. /이것은 낯선 여자를 기다리면서 그가 만든 노래라네. /어딘가의 거리의 한구석에서 봄이 되면 들을 수 있겠지./ 너무도 창백한 달은, 그대의 밤색 머리에 관을 얹는다네./ 너무도 밤색인 달은, 빛나는 깃을 올리고 그대의 스커트를 구멍투성이로 만든다네./ 너무도 창백한 달은, 오팔색을 띤 그대의 환락의 눈동자를 애무하네/ 거리의 왕녀여, 잘 와주셨군요, 상처받은 내 마음에/ 사랑스러운 걸인이여, /나는 이 손을 찾는다오. /그대의 조그마한 손을 느낀다오.....그러나 금새 내리는 비에 달은 사라져버린다네. 왕녀도 함께..... 달이 없는 밤, 황혼 속에서 나는 사라져버린 꿈을 꾼다네."
--- 몽마르뜨의 애가, 1954년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프랜치 캉캉의 주제가, 물루지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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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아침은 아침 8시가 되어도 가로등 불빛이 졸고 있는 어둠입니다.
어제 저녁부터 간간히 이슬비가 뿌리더니 짙은 습기가 도시를 휘감고 있네요. 세느강 유람선에서 넋을 잃고 야경을 구경하노라 온갖 주책을 떨었던지라 몸인들 성했을리가! 밤새 설친 꿈 때문에 침대에서 누워있고만 싶네요. 유럽의 전형적인 우기인 겨울 날씨는 늘 이렇다나요. 그래도 비에 젖은 주말의 파리 시가지가 더욱 운치가 있어 보입니다. 세상사 다 마음먹기 나름이 아니겠습니까? 침대를 떨치고 일어나야지요. 얼마짜리 투언데...
오늘은 몽 마르뜨 언덕에 있는 예수성심 성당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가는 행선지가 다이아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지하도를 지나가게 되었지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깨끗하게 청소가 된 상제리제거리, 개선문, 로댕의 "생각하 는 사람" 청동상이 있는 로댕박물관이며 룩상부르그 공원을 지나 빅톨위고, 볼테르와 루쏘가 잠든 판테온도 지나며....(순례 코스와 어울리지 않아 빠졌지만 몇 차례 가본 경험으로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올립지요)
시내 중심가에서 깃발을 들고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노조에서 파업을 하는 모양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후예답게 파업도 화끈하게 한다네요. 아!! 명품 브랜드 본점이 죽 늘어 서 있는 상제리제가에서 때마침 크리스마스 바겐세일 시즌인지라 내려서 쇼핑 하고 싶어하는 아내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네요. (결국 다음날, 졸리다 못해 하나 샀지요. 내꺼도, 던힐이라고 구스다운 점퍼로 하나, 명품이라 다르데요. 십 년이 넘어도 새 거 같이 볼만해요.)
프랑스어로 붉은 풍차, 믈랑루즈에서 프랜치 캉캉(French CanCan)을 보지 않았다면 파리에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극장식당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몽마르트에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낮에는 풍차이고, 밤에는 화려한 쇼가 열리는 '물랑루즈 (Moulin Rouge)'라 하지요. 1889년부터 지금까지 쇼를 이어온 이곳은 몽마르트 예술 카페의 대명사입니다. 최근에 니콜 키드먼이 나오는 영화로도 유명했지만 아무래도 1954년에 나온 영화, 프랜치 캉캉이 가장 물랑루즈를 닮았다고 해야겠지요. 우리 프랑스 할배 장 르누아르가 감독을 하고 파리 아저씨 장 가방이 주연으로 나왔지요. 프랑스에 오면 우리 종씨인 장씨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물랑루즈하면 투루즈 루트랙이지요. 물랑루즈의 단골이었던 화가 투루즈 로트랙(Toulouse Lautrec 후기 인상파), 물랭루즈에 지정석을 정해놓고 술을 마시며 물랭루즈 댄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로트랙은 그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물랑루즈의 포스터가 그의 작품입니다.
프랑스의 명문가(프랑스 5대 명문집안)의 아들로 15세에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되어 키 1.5미터, 하반신 마비가 온 그는 물랑루즈에서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귀족과 매춘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잔 아브릴'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처절하게 외면당하지요. 물랭루즈 포스터를 그리며 프랑스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된 그는 1901년 37번째 생일을 3개월 남기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운의 천재 화가가 그리던 무희와 가수가 걸었음직한 곳, 무랑 루즈를 지나며 잠간 소회에 젖어보았습니다. 아~ 가난했던 고흐에게 매일 술을 사준 것으로 유명하답니다.
믈랑루즈에 들르고 싶었지만 눈을 돌려버렸습니다.
지금 저는 순례길에 나선 것이거든요. 극장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고 버스를 세웠는데요, 길옆에는 벼룩시장이 죽 늘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언덕을 오르자 좌우로 하얀 히잡(베일)을 쓴 아랍계 여인들이 북적이는 조그만 상점들이 부산해서 흡사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온 것 같았어요. 아마, 이곳은 집세가 싸서 아랍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가 싶네요.
순례를 떠난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몽마르뜨의 언덕에 우뚝 솟은 사크레 쾨르 성당을 찾아가기 위해서지요. 파리 어디에 있어도 한눈에 들어오는 백악의 돔이 아름다운 사크레 쾨르, 성스런 심장이란 뜻이지요. 도시 전체가 평지인 파리 시가지 북쪽에 위치하며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129미터)인 몽 마르뜨 언덕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사크레 쾨르가 바로 예수 성심 성당입니다. 로만 비잔틴양식으로 세 개의 돔이 있는데 가장 큰 중앙 의 돔은 높이 83미터 폭 50미터, 뒤의 종각에는 18톤의 종이 달려 있답니다.
오늘, 제 눈에 들어오는 성당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자욱한 안개에 가려서 하얀 자태를 수줍은 듯 어깨 죽지를 살푸시 들어내고 있습니다. 은은한 안개꽃에서 눈부신 하얀 장미꽃처럼 다가오는 성당, 이 언 덕은 피비린내 나는 순교자의 무덤이랍니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디오니시오 성인(st-denis,생 드니)은 원래 이탈리아 태생 주교였으나, 교황 파 비안이 250년에 선교사로서 골(프랑스의 지방) 지방으로 파견하셨대요. 이때 6명의 선교사들이 프랑스로 갔다고 합니다. 초대 프랑스 주교가 된 성인은 불과 몇 년을 선교하다가 자신의 사제인 성 루스 띠꼬와 부제 성 엘레우테리오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지요. 258년에 있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두 동료 사제들과 함께 이곳 몽마르뜨에서 참수되었답니다. 그들의 유해는 세느강에 던져졌 으나 곧 찾아내, 파리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그의 머리를 가져갔대요. 노트르담 성당에 가면 천사들과 함께 목이 없이 서있는 생드니 성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잘린 당신의 머리를 들고 있노라. 벽에 부조되어 있는 성인의 끔찍한 모습을 보노라면 성인의 순교가 가져온 엄청 난 업적을 그려볼 수 있겠지요. 유럽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찬란한 가톨릭 문화를 꽃 피운 생드니 성인이 프랑스의 수호성인이 되었구요. 6세기 초 성녀 제노베파는 디오니시오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세웠지요. 성 디오니시오 대수도원 성당(생 드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을 일컸는 이야기입니다. 이 언덕 밑에서 순교한 이래 이곳은 순교자 들의 산이라는 뜻으로 몽데 마르띠르(mont des martyrs)라고 불리다가 차츰 변형되어 몽 마르뜨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군신(軍神)마르스(mont de mercure)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이 언덕 남쪽 비탈면에는 19세기부터 카바레가 들어서다가 무랑루즈 같은 환락가로 변신했지요.
그리고 이 언덕에 남아 있는 생 피에르 성당은
파리 코뮌(1871)이 시작된 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지요. 1876년 이후 파리 대혁명 때 무참하게 처형당한 희생자의 주검 위에 40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는 사 크레 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 Coeur)의 세 개의 흰 돔이 차츰 걷혀가는 안개 사이로 눈부신 자태를 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예수성심 성당은 인상적인 조각, 그림, 모자이크 장식 등이 참으로 정교하며, 천정의 정상에 올라가면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지요. 다른 소개를 보면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당하고 파리 코뮌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파리 시민들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프랑스 국민들이 거국적으로 성금을 모아 백악의 아름다운 예수성 심성당을 4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10년에 건립하였답니다. 처음에는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에 반대 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에펠탑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몽마르뜨 언덕은 회전목마가 있는 윌레트 광장 옆에서 시작하는 돌계단을 밟고서 올라가는데 밤에 불빛을 받은 사크레 쾨르는 환상적이라지만 다음을 기약해야지요. 파리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마음 설래이게하는 몽 마르뜨 언덕이 생겨난 아이러니를 알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웅장한 로마의 성당을 보아온 제게 예수성심 성당은 그저 미사를 드리고 싶은 기분이 들기 알맞은 크기에 검소하고 아늑해서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초를 봉헌하고 한참이나 묵상에 잠겼습니다.
덕분에 일행과 떨어져 성당 옆에 자리한 무명 화가들의 거리에서 그림을 찬찬히 둘러 볼 수 없었고 초 상화를 부탁하며 한가로이 여유를 즐길 틈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아~! 하실 몽 마르뜨 언덕의 무명화가 거리(데르트르 광장)는 19세기 후반, 일찍이 근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상파, 상징파와 입체파의 발상지였답니다. 고흐, 고갱, 로트렉과 모딜리아니, 피카소를 비롯한 화단의 흐름을 확 바뀌게 한 일단의 화가들이 꿈과 이상을 펼쳤던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상상했던 것보다 아주 쬐그마한 쌈지공원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파리의 정 취가 흠씬 풍겨나는 그림 한 점 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단체로 떠난 순례의 한계이겠지요.
다음에는 아내와 둘이서 오리라. 헌팅 켑을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구렛나루가 멋스러운 화가가 동양 에서 온 아름다운 내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을 때 알맞게 덥혀진 코코아 한 잔 들면서 이 한적한 공간과 여유로운 시간을 한껏 즐기리라.
이제야 몸통을 다 들어낸 백악의 예수성심 성당을 뒤로하고 가파른 몽 마르뜨 언덕을 뛰다시피 내려 왔습니다. 아무리 바쁘게 내려왔다 해도 좁은 골목길, 로트랙에 나오는 물랑루즈의 무희와 가수들이 살았던 집이 총총히 박혀 있는 곳에서 고호와 그의 동생 테오가 살았던 집을 발견했지요. ‘심봤다‘ 하 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제가 고호가 살았던 그 시대로 돌아갔다니..... 이렇게 예수성심 성당은 이웃해 사는 가난한 화가들과 순례자,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방인 무슬림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네요.
오후 일정은 파리 갈멜신학교 성당에서 한민택 바오로와 김상문 베드로 부제 서품식에 참석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신학교는 오랜 전통을 가진 듯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백여 평이 넘게 잘 가꿔진 정원과 둘러선 기숙사, 강의실, 성당의 고색창연한 모습이 오늘의 서품식을 기품 있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신자석은 한 300 석 될까, 파리 한인성당 교우들과 프랑스 신자들이 가득 자리했고 여덟 명의 신학생 성가대가 한창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불러 주신 ‘그분’께 감사의 기도를 바 쳤습니다.
오늘 서품식은 우리나라에서 유학 온 학사 두 사람만을 위한 자리여서 더욱 뜻 깊었고, 생 드니 교구 주교님의 입당으로 미사는 시작 되었습니다. 제대에는 멋스럽게 생긴 신학교 총장 신부님과 교수 신부님 여섯 분, 제대 오른 편에는 로마, 독일, 벨기에, 프랑스로 유학 오신 수원 교구 신부님들 열 분이 자리하여 한층 서품식이 빛났습니다. 우리나라 신부님이 해설과 통역을 맡았지만, 생 드니 교구의 주교님의 시작 기도에 모두 놀랐답니다.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오영진이라고 밝혔거든요. 김남수 주교님과의 인연으로 한국에 몇 년 계셨답니다. 특별히 한국인 유학생 부제 서품식을 주례 해주신 주교님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한국말과 프랑스말이 어우러져 서품식은 훌륭했구요. 이곳 신학교는 6년제로 한 학년에 8 명, 신학생 수는 48 명에 불과한 유럽의 신학교 현실을 실감하며 좀은 씁쓸해졌습니다. 더욱이 오늘 합창을 해 준 신학생 여덟 명 중 한 사람은 베트남 신학생이랍니다. 서품식이 끝날 무렵 한국에서 축하 손님으로 온 우리를 소개해 주자 다들 따뜻하게 반겨 주었지요. 우리 순례단이 환영의 박수에 답하고자 "고향의 봄"을 합창으로 노래하자 한인 성당 교포들도 콧날이 시큰하게 함께 불러주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서품식이 되었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프랑스 사람들의 풍습을 체험할 수 있는 칵태일 파티가 자리를 옮겨서 있었습니다.
간단한 음료수와 술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나는 위스키 칵태일잔을 잡고 두 잔이나 홀짝거리며 파티 장을 둘러 보았지만 프랑스사람들, 정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시종 웃기도 하며 엄청 빠른 속도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들 나라말을 하네요. 무슨 재미가 있을리 없고 또 성지 순례 땜에 피곤한 다리를 어찌하지 못해 구석에 밀어 둔 의자를 내려 앉아버렸지요. 칵테일 파티란 저렇게 서서 웃고 떠들며 하는 거라는 걸 제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쩝니까? 저들이 한국말을 좀 배워서 말을 걸 어 주던지...아마 우리가 대단한 결례를 한 것같았지만 어쩌랴...
오늘 서품식 3부 순서를 축하하기 위해 조암 본당 초등학교 4학년, 예쁜 한국소녀가 부채춤을 위한 한복을 입고 등장하자 야단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우아하고 맵시 있는 한복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부산해졌습니다. 3 시간이나 끈 칵태일 파티가 끝나고 넓은 신학교 식당으로 옮겨서 3부, 본격적인 디너파티가 시작 됩니다. 한인 성당에서 마련한 김밥과 김치, 전, 잡채는 프랑스 사람들을 위해 맛만 살짝 보고 양보했지요. 이렇게 맛있는 한식을... 이곳 사람들이 매운 김치와 잡채를 서툰 포크로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 해 보였습니다. 음식을 날라 올 때는 신학생들이 서빙을 했는데 식사 중 식탁 위의 접시를 거두어 가거나 다른 음식이 나올 때는 교수 신부님들도 한 몫 거들더군요. 이럴 때는 신학생들은 덤덤하게 식사를 하면서 서빙을 받는 스스럼없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오늘의 주 메뉴는 알사스 지방의 소시지와 삶은 야채였는데, 죄송하지만 먹기가 참 거북해서 이름도 모르는 적포도주만 홀짝였지요. 우리 일행이 자리한 옆자리에는 교수 신부님 몇 분이 자리했는데 하도 심심해서 몇 마디 말을 붙여보았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성격이 급해선지 제 프랑스어 실력이 시원찮아선지 금새 포기하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월드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한국이 그렇게 축구를 잘 하는지 몰랐다며 자연스레 월드컵 이야기로 넘어갔지요. 프랑스 사람들, 축구하면 껌벅 죽잖아요. 우리가 이태리를 이긴 걸 무척 고소해 하더라고요. 이태리 축구는 거칠거든요. 프랑스는 축구도 아트 사커라 하잖아요. 미셀 플 라티니라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프랑스 축구의 격을 올려놓았거든요. 유럽에서 이태리를 조금은 거칠 다고 촌놈이라고 비하하지요. 그런데 한국이 이태리축구를 꺽은 걸 얼마나 고소해했을까. 또 박지성 이 포루투칼의 피구를 제키고 골을 넣는 장면은 인기 짱이었거든요.
참, 빼먹을 뻔 했네요. 우리 예쁘기 짝이 없는 소녀가 보여 주는 부채춤에 그 넓은 홀에 가득한 프랑스사람들이 대단한 호응을 보여주었어요.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대하는 기본 안목은 세상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파티장에서 제일 신난 분은 유학생 신부님들이셨습니다. 만리타국에 흩어져 공부만 하던 분들이 고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일행들이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북돋아 주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신부님들!! 외롭고 힘들더라도 힘내세요, 많이 배우고 깊어진 영성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 오셔서 잘 이끌어 주셔야지요, 신부님 많이 많이 사랑해요!!!"
아직 유럽 사람들은 담배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 복도에는 재털이가 군데군데 놓여 있어서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피우러 자주 밖에 나올 수밖에... 떠들썩한 파티장과 달리 깊이 잠든 신학교 정원은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린 앙상한 나무 가지에 환하게 달빛이 넘쳤습니다, "비가 그쳤나 보다" 애써 성찬을 준비한 정통 프랑스 디너파티였지만 송구하게도 깔깔한 혀를 차면서 3 시간이 넘어가는 파티장에 양해를 구하고 우리 일행은 먼저 나올 수 밖에...그러니까 오늘은 파티만 6시간에 걸친 피곤한 하루였답니다. 프랑스 말을 공부해둘걸. 그랬더라면 오늘 파티는 즐거웠을 텐데... 하긴 유럽에 출장을 올 때 파티에 가보곤 했지만 영어 하나로 다 되던걸요. 그래도 파티는 우리에게 썩 내키지 않아요. 비지니스라면 대충 넘어갈 수 있어도 파티에서는 가십이나 스포츠에다가 취미에 따라 영화나 미술 같은 예술 쪽으로 가면 영어 대화조차 바닥이 나지요.
그리운 이여! 파리에서 드리는 두 번째 밤 인사를 비 개인 창가에서 보냅니다.....
...... 본~뉘 (Bonne nuit)!!!
제 편지가 성지 순례하려는 여러분께 도움이 되는 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요즈음 저는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인생이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말씀. 마음이 고적할 때는 가슴도 내 다리도 천근만근 무거워져 벅차기 짝이 없습니다만 ‘그래 주님만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인걸’ 깨달은 날은 더 할 나위 없이 가쁜해지더군요. 한 분이신 주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다면 한없는 자유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자유라 하셨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대명제가 신산한 내 중년을 다잡아주는 고마운 말씀이랍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는 순례는 이렇듯 나를 나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굳게 믿게 되었지요. 온갖 걱정거리로부터 나는 홀로 서렵니다. 무소의 뿔처럼 일어나 걸어가렵니다.
음악과 시가 넘쳐나는 스산한 겨울, 파리는 나를 달뜨게 했습니다. 에펠탑이니 뤽상부르그 공원이네 쫓아다녔지만 예술가와 파리지엔느가 해바라기 하다가 차를 마시고 인생을 토론하고 사랑을 노래하던 노천카페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네요. 선글라스를 쓰고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고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슈발리에의 은발과 에디뜨 삐아쁘가 노래하는 인생은 장미빛이던가요?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웬걸요. 파리는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이 몰려와 동방에서 온 노란색 순례자도 노련한 파리지엔느가 되어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봉쥬르 했다니까요.
아직 우린 파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봐야할 거, 보고 싶은 곳이 어디 한두 곳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