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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재우다, 류재만, 우리글, 2006.
1.
동해 바다는 언제나 아름답다. 동해시의 추암(湫岩)에 올라서 바라본 얕은 바다는 연한 옥빛을 닮아 있었고, 울릉도를 향하는 배에서 내려다 본 깊은 바다는 짙푸른 남빛을 품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은 때로 그 빛깔에 취해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바다에 절로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기도 할 듯 하다. 그처럼 맑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절로 감탄사를 토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선 끝까지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보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리는 듯한 경험을 한 것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통해서 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동해 바다는 늘 아름답고 낭만적인 운치가 가득한 곳으로 남겨져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동해에 이사오기 전에는, 아니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동해 바다를 낭만적인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바다는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시인들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즐겨 노래하곤 했다. 그러나 과연 동해 바다가 늘 아름답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인가? 아름다운 빛깔을 자랑하던 바다는 때론 거센 파도가 치고, 바닷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폭풍우와 해일이 밀어닥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모습은 비단 동해 바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양면적인 모습이 존재함에도, 동해 바다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우리들’은 그곳을 늘상 아름답고 낭만적인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바다는 또한 그곳을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정물처럼 멈추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그들’의 냉엄하고도 치열한 삶이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해 바다는 그저 관광지의 그것처럼 비춰지기만 한 모습이 아닌,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호흡하는 장이기도 한 것이다. 류재만의 시들에서는 바다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또한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져 있다. 아니 그네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갖가지 ‘이야기’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너무도 절절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바닷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류재만의 시 세계는 때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기보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화법(話法)을 구사하며 시를 쓰고 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에게 낯설게 다가서는 그의 시 세계가 어쩌면 다른 시인들의 그것과는 구별되게 만드는 하나의 장점이자, 또한 같은 이유에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미 세상에 선을 보인 2권의 시집 제목(어달리 바다, 해비늘 벗기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시에서 노래하는 것은 주로 바다와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의 창작집 중에서 세 번째 목록에 오를 이번 시집 역시, 바다와 그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주된 배경이자 주제이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만들어 낸 류재만의 ‘바다 이야기’에는 그가 만나고, 듣고,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삶이나 사연들은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이해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일관된 목소리로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자신들의 이러저러한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고자 애쓰고 있다.
2.
이번 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파악될 수 있을 듯하다. 비교적 장시들로 꾸며진 <돛단배에 대하여>를 비롯한 앞부분(제1부)의 작품들은, 시인 자신이 ‘풍속서사시’라고 명명했던 두 번째 시집(해비늘 벗기기)의 연장선 속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작품들을 염두에 둔다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시 세계를 그대로 이끌어 간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시집이 그랬듯이, 이들 장시들을 읽어내는 데에는 독자로서 상당히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이들 작품을 ‘서사시’라고 명명하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분명 그의 작품들에는 서사적인 스토리가 담겨있기도 하지만, 이른바 ‘서사시’라고 규정할만한 본격적인 서사에는 미치지 못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아마도 필자의 이런 판단에, 시인 자신도 기꺼이 동의해 주리라 믿는다.
오히려 새 시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른바 ‘찌찌’와 ‘고추’ 시리즈로 구성된 후반부(제2부)의 시들이 아닌가 싶다. 장시로 구성된 앞부분의 시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길이로 구성되어, 일반 독자들도 다소 익숙하게 읽어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대상들로 환기된 시 세계는 단속적(斷續的)이지만, 또한 전체 작품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작품들을 이른바 ‘연작시’로 규정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긴 호흡으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앞 부분에 수록된 장시들과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앞부분의 시들은 비교적 장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시에서 시인은 시적 화자를 등장시켜 때로는 독백체로, 때로는 몇 사람의 대화체로 작품을 형상화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대화체는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의 상황을 손쉽게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된 「돛단배에 대하여」가 시적 화자들의 독백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면, 다음 작품인 「파도를 재우다」는 바다에 나간 뱃사람들의 대화로 작품을 진행시키고 있다.
돛에 풍을 단 배로 먼저 정리해야 되지 않겠냐
돛을 단 배가 아니라
돛에 풍을 단 배 말이다
그림에는
풍이 돛을 축으로 대칭으로 매어졌는데
대칭이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더 가서 돛에 매어져있고
들려지는 쪽은 뱃전에 묶어서 균형을 잡는데
바람을 항상 비껴 맞기 때문이야
풍은 돛 끝에서 석 자 정도 아래까지 올릴 수 있으니
돛이 풍보다 길지
석 톤에서 다섯 톤까지가 대부분이고
이물에서 고물까지가 서른 자 정도
돛은 배 길이와 비슷해
풍은 올리고 내리고
접고 펴지만
돛은 고정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풍선(風船)이라 부르지
-「돛단배에 대하여」 부분
코앞에 떼줄이 있어요
겨우 지금 봤냐
진작에 방향을 틀어야한다고 했잖아
돌아갈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냐
뗏줄을 넘을 테니
무게 나가는 건 모두 버려
그물이고 고기고 그게 지금 보이냐
어떻게 넘겠다는 거예요
지껄이지 말고 잘 붙들고 있어
떼줄이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
물마루를 타고 넘을 테니
떨어질 때 쓸려가지 않도록 조심해
넘는다
하느님 맙소사 넘었어요
-「파도를 재우다」 부분
앞의 인용 작품인 「돛단배에 대하여」는 ‘돛단배’의 특징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세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다. 지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라져 좀처럼 볼 수 없는 돛단배의 모습을, 시적 화자 역시 그저 그림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의 기억 속에 돛단배가 한때는 동해 바다에서 “원산을 지나 청진까지 / … / 장기곶을 지나 부산을 지나 / 한라산 기슭”까지 오가며 고기잡이를 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돛단배가 비록 중량이 3~5톤 정도가 대부분이고, 선체의 길이도 10여 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동해 바다를 종횡으로 누볐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대식 어선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 작품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시인은 안타까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시인은 돛단배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 하나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의도로 작품을 지었던 것이다. 때문에 돛단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자, 이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 독백체를 택하게 된 것이다.
다음 작품인 「파도를 재우다」는 아마도 부자(父子)인 듯한 두 사람이 바다 한 가운데에서 폭풍우에 휘말린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대화로만 이끌어 가고 있다. 바다에서 온갖 고단한 삶을 겪어온 ‘아버지’로서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옳다고 여기는 젊은 ‘아들’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순간, 그 속에 감춰져 있는 더욱 커다란 ‘진실’은 은폐되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는 거대한 폭풍우를 만난 바다 한 가운데에서,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연연해하는 젊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오랜 경험에 토대를 둔 대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때로는 꾸짖듯이, 때로는 타이르듯이. 뱃사람인 이들의 대화로만 진행되고 있는 작품의 상황은, 독자들에게 마치 그러한 처지에 자신이 놓여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이러한 형상화의 방법이 ‘시적’이라기보다는, 두 인물이 무대에서 대화를 하는 듯한 ‘극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속에서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아채게 된다.
어쩌면 바닷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시인에게 있어서, 작품에서 대화체와 독백체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 것처럼 파악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미역 품앗이」에서는 미역이 많이 나는 철에 이웃의 “농사짓는 사람들도 품팔러” 오고, 또 “우리 마을일이 끝나면 / 우리도 근처 마을로 품앗이를” 가는 바닷사람들의 생활을 나지막한 목소리의 독백체로 들려주고 있다. 「쥐 가자미」에서는 바다에 나가 잡은 가자미가 이야기의 단초가 되어, ‘할아버지’와 손자인 듯한 두 인물의 대화로 집행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그려지고 있는 상황은 바닷사람들이 처한 옛날의 상황과 요즘의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대비되어 나타나곤 한다. 따라서 서로에게 나직하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는, 바닷사람들이 처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면서 ‘망지기’가 되어야 했던 이의 목소리를 통해서, 바닷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망지기」도 동일한 관점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류재만의 시들에서는 낭만이 아닌 생활로서의 바닷사람들의 삶이 너무도 진솔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장편시들 중에서 「심해로 든다」나 「삼중망 그물」에서 보여주는 바다의 환경 문제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심해에 눈길 한 번 안주겠니
빛이 없으니 어둡고 추울 테고
그래도 얼음은 얼지 않으니
그러고 있는 까닭이 의문스럽고
마지막엔 어중이떠중이 모두 가게 되니
무척이나 시끄럽고 지저분할 것 같기도 하고
살아서 뜻 못 이룬 생각들이
얼마나 난장판을 치고 있을까
한도 없이 매일매일 몰려가고 있으니
가고 싶어서 갔다면 좋은 일도 있겠지만
싫어도 할 수 없고
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얼마나 살벌하겠어
관심을 접어야 돼
관심조차 잊어야 돼
-「심해로 든다」 부분
‘심해’는 깊은 바다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의 시에 의하면 “빛이 머문” 곳이자, “늙어 죽어 뼈다귀가 쌓이고”, “산 것들이 마지막엔 모두 끌려와 쌓”인 곳이다. 때문에 살아 있는 것들은 “누구도 심해로 들지는 못” 하고, “오만 잡동사니가 들어 왔는데 / 너무 깨끗한” 곳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심해에 “양수기를 들이대고 / 호수로 끌어들”여 “잡은 고기 숨 줄을 늘리”는 데 사용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배설물로 심해가 채워”져, 청정의 공간인 그곳마저 오염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육지에서도 그렇듯이, 바다에서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가 훼손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다시 그것을 오염시킨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청정한 바다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서 훼손당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안목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다의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은 「삼중망 그물」의 내용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물눈이 촘촘한 ‘삼중망 그물’은 시인에 의하면 “욕심으로 고안된 특별한 그물”이다. 일단 그 그물에 걸리게 되면 “덜 여문 새끼들까지” 잡아들이게 되고,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 없게 / 고안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고기들의 씨가 말라가게 된다. 여기에 불법 어로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버려진 바다 속의 또 다른 ‘삼중망 그물’들은 또한 고기의 터전을 없애는 역할을 하는데, 사람들은 고기를 잡기 위해 또 다른 욕심을 부리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고기를 좀 더 잡기 위해서 ‘삼중망 그물’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그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는 어쩌면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시인은 삼중망 그물의 철거로 바다의 환경이 다시 회복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노래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 아니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시인이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시인의 이러한 ‘순진한’ 희망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을 꿈꾸는 시인의 ‘희망’만큼은 눈여겨볼 일이다.
3.
제1부의 장편시들과는 달리, 제2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단형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 수록된 모든 시들에는 ‘찌찌’나 ‘고추’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대상들은 모두 동해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바닷사람들에게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여겨지는 ‘불가사리’에서부터 겨울철 별미로 국물 맛이 일품인 ‘홍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존재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형상화하고 있다. 불가사리․새우․노가리 등 동해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선과 파래․미역 심지어는 모래까지 등장시켜, 각각의 대상들에게 ‘찌찌’와 ‘고추’를 접목시켜 시를 써내려 간 시인의 의도가 처음엔 자못 궁금하기도 하였다. 시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찌찌’와 ‘고추’는 인간의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속어(俗語)인데,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아마도 바닷사람들의 원초적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빌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동해 바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을 시로 그려내고 있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찌찌’와 ‘고추’라는 제목은 각각의 대상들로 인해 환기된 존재들의 ‘날 것으로의 삶’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하나의 주제마다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갖가지 해산물과 생선 등을 통해 시인은 그것들과 맞닿아있는 바닷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천성적으로, 아니 운명적으로 바다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흐릿한 실루엣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아마도 시인에게는 그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했던 어떤 특정한 인물들이었으리라. 다만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존재들 모두 시인에게는 소중한 인연들일 것이라 짐작된다.
제2부의 시편들 역시 독백 혹은 대화체로 작품을 진행시키고 있다. 예컨대 「불가사리 찌찌」에서 시적 화자는 ‘불가사리’로 나타나지만, 독자들은 그로 인해 환기되는 어떤 인물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셈이다. 때로는 ‘노가리’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은 ‘거짓말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속어인 ‘노가리 푼다’는 내용과 연결시켜 놓는다. 특이하게도 「도미 찌찌」는 다른 생선들과는 달리 “반 토막 도미”를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도 여전히 귀한 생선으로 대접받고 있는 ‘도미’와 ‘아버지’에 얽힌 시인의 아련한 기억 속에서 환기된 까닭일 것이라 여겨진다. 이들 작품에서는 바다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각각의 시적 대상이 환기시키는 인물들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몇몇 작품들은 시인 자신만의 것이 아닌,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넉넉히 깔고
밥상에 둘러앉은 머릿수만큼
머리 크기에 맞춰 토막 내어
무 위에 얹은 다음
소금기가 배어 나와 푸르딩딩해진 껍질을
고춧가루로 벌겋게 가리면
으깬 마늘이 맨 위이다
수저만 빨고 있다가
재빨리 제 몫에 침을 바르고
서툰 젓가락질로 야물게도 잘게 나눠 먹는다
간이 밴 무도 공평하게 나누고 나면
아가미 언저리
눈알만 붙어있는 대가리만 남는다
소금을 한 됫박은 함께 먹은 것이니
어머니는 몇 곱은 넘게 물을 들이킨다
생목이 꿈에서 올라오는데도
자반에 소금을 덧뿌려
지질 작정으로
-「고등어 찌찌」 전문
이 작품은 우리의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등어 조림’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마치 어린 시절의 우리네 아침 밥상 풍경이 연상된다. 자식을 하나나 둘을 낳고 마는 요즘의 상황과 달리, 20~30여 년 전만 해도 형제들이 대여섯은 되는 것이 보통의 가족 풍경이었다. 어쩌다 밥상에 생선이라도 오르게 되면, 고만고만한 형제들은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서로의 눈치를 보곤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하나의 밥상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하다. 밥상에서 고등어 반찬을 기다리는 가족들은 모습과 함께, “아가미 언저리 / 눈알만 붙어 있는 대가리만 남아” 그것을 먹게 되는 어머니에 모습에 대한 가슴아픈 기억도 강렬한 인상으로 떠오른다. 어린 시절 당장 눈앞에 놓여진 맛있는 반찬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어머니들의 그 헌신적인 사랑이 비로소 각성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우리를 둘러싼 노동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청년 실업의 문제와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게 고추」라는 작품을 보면서, 나는 언뜻 그것을 오늘을 살고 있는 노동자의 삶의 여건과 흡사하다고 이해했다. 나의 이러한 독법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해당 작품을 검토해 보자.
나오라면 나와서 하라는 대로 몸까지 받치고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 할까봐
들어가지도 못하고
숨 고를 틈도 없이 움직이면서 기다렸지만
신 새벽부터 나와 들볶아대니
하루 이틀이야 거꾸로 매달려도 지나가지만……
<중략>
먹다가 버린 제 살점을 들고 집으로 간다
남은 다리로나마 옆으로 기기를 바래서인지
뻔히 알면서도
지친 몸을 데운다
무릎 까진 다리를 보듬으며
확인시킨다
-「게 고추」 부분
이 작품은 하루 종일 쉴 새없이 바닷가를 나다니는 게의 형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옆으로 눈치보며 기어 나왔다가 / … / 밟히며 겨우 돌아가는 집이 / 비빌 틈도 넉넉지 않은” 게의 모습은 그대로 근근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그것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다소 과장된 독법일까? 하지만 “나오라면 나와서 하라는 대로 몸까지 받치고 /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 할까봐 / 들어가지도 못하”는 모습은 어쩌면 막강한 자본의 힘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노동자의 처지를 연상시킨다. 한평생의 노동으로 “속은 비었어도 겉은 단단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강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미 누군가에게 “지친 몸을” 이끌고 “무릎 까진 다리를 보듬으며 / 확인시”켜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은 누구를 떠올리며, 이 작품을 지었는지 자못 궁금하기조차 하다.
이밖에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지만, 제2부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시인의 삶 속에서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대체로 그의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 때로는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 역시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곳에 정착하여 살기도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어찌 보면 시인의 삶과 함께 했던 존재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바닷사람들의 삶은 더 이상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조업의 여건은 물론이고, 나날이 치솟고 있는 인건비와 만선(滿船)이 되어도 떨어지는 해산물의 값 때문에 대부분의 영세 어업인들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 세계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색조를 띠고 있다. 어쩌면 과거 한때의 풍요로웠던 바닷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에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조건이 너무도 열악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맡겨야만 하는 바닷사람들의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은 이들 바닷사람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삶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이야기꾼의 모습으로, 바닷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독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의 시가 그리 친절하지 못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류재만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우리네 정서에서 농촌의 체험이나 풍경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지만, 이에 반해 그의 시에서 다루고 있는 바닷사람들의 체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작품 형상화 방식 또한 여전히 독자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애써 지적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고, 또한 쉽게 공감하기에는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의 작품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다소 ‘불친절하게’ 보이지만, 앞으로의 작품들은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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