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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전체주의의 대두와 제2차 세계대전
1.대공황과 전체주의의 대두
2. 제2차 세계대전
Ⅱ. 전시 수탈체제와 민족 말살정책
일제의 황국식민지 정책
가. 배경
나. 민족 Ⅰ. 전세체제와 식민지 지배정책
시기 | 통치형태 | 정치 | 경제 | 사회・문화 |
1930년대 | 민족말살정책 | 대륙 침략 | 병참기지화정책, 국가총동원령,농촌진흥정책 | 황국신민화정책 실시 |
1. 전체주의 등장
가. 1929년 세계대공황의 발생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을 계기로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최강국으로 우뚝 섰으며 29년 미국의 경제대공황은 세계로 파급되었다.
나. 각국의 대공황 타개책
미국 | New Deal Policy (AAA. NIRA, TVA)를 통해 정부가 시장문제 적극 개입 |
영국・프랑스 | 본국과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경제블록(economic blocs) 형성 |
독일・이탈리아・일본 | Nazism. Fascism, 군국주의(militarism)가 대두하여 후발 산업국가로서 대외침략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하였다. |
2. 일본의 군국주의(militarism) 등장
가. 일본의 사회적 혼란
나. 일본의 대륙 침략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상해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미국에 선전포고
3.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가. 목적
전쟁수행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내선일체의 표어를 내걸고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고자 했다.
나. 내용
⑴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근론(日鮮同根論)(日鮮同祖論), 同文同種, 一示同人
⑵ 신사 참배(神社參拜), 창씨개명(創氏改名), 조선말 및 조선글 금지 : 일본어 사용 강요(1938.4). 주기철(周基徹)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목숨을 빼앗기고 성서조선 발행인 김교신(金敎臣)은 옥고를 치렀다. 전남 곡성 류건영(柳健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엄중한 서한을 보낸 후 자결했고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아이가 학교에서 창씨개명을 해오라는 얘기를 듣고 아이에게 창씨개명을 해준 후 돌을 안고 마당의 우물로 뛰어들어 익사하였다
⑶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1937)
• 성인용
1. 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2. 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以テ團結ヲ固クセン。
3. 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錬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1.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 중․고등학생용
1. 私共ハ、大韓帝國ノ臣民デアリマス。
2. 私共ハ、心ヲ合ワセテ天皇陛下ニ忠義ヲ盡シマス。
3. 私共ハ、忍苦鍛錬シテ立派ナ強イ國民トナリマス。
1. 우리들은 대한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사관을 통일하여 공주 전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올바른’ 국민이 되겠습니다.
⑷ 국민생활통제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직장연맹, 지방연맹 : 도연맹・부・군연맹・읍・면연맹・동・리연맹) - 애국반 : 일장기게양, 기미가요 봉창, 신사참배, 일본궁성에 대한 요배(동방요배) 추진, 일본어상용, 방공방첩, 애국저금 강요
⑸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장(文章) 잡지 폐간
다. 친일파의 활동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동화정책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면서 제의 동화정책(同化政策, assimilation policy)에 동조했다. 춘원 李光洙(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현영섭(玄永燮)
4. 경제적 수탈
가. 남면북양정책(南綿北羊政策)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하고 공업원료 증산정책을 추진했다.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을 표방하며 남부지방에서는 면화(棉花) 재배, 북부지방에서는 면양(綿羊, 緬羊) 사육을 강요했다.
나. 농촌진흥운동실시
농민생활의 안정을 내세워 식민지 공업화의 기초인 농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실제로는 한국을 값싼 원료의 공급지로 만들고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소작쟁의를 줄이고자 했다.
다. 병참기지화정책(兵站基地化政策)
⑴ 한국을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하는 정책으로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의 군수산업을 육성하고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발전소(赴戰江水力發電所 등), 군수공장 등이 세워졌다.
⑵ 병참기지의 경제개발 여부
①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중화학공업비중의 급속증가
② 공업구조 변호의 특징
⒜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일이 조선에서 최고가치로 설정된 기형적 중화학공업의 확대는 자립적인 산업연관을 가지지 못한 “日鮮滿엔 bloc경제권의 불완전한 하도급(下都給)”
⒝ 조선에서의 일본독점자본의 지배도가 높은 비율(94%)
⒞ 조선 국민경제의 미발달로 경공업부문도 일본자본이 식민지초과이윤을 취득하는데 유리한 부문만 발달
⒟ 일본독점자본이 조선내에서 운영자금의 상당부문과 인적 및 지하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
⒠ 병참기지화정책으로 조선인의 경제생활 및 국민생활의 파탄 초래
라. 국가총동원
⑴ 중요산업통제법
군수물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공업에 대한 투자를 통제했다.
⑵ 물적자원 통제
중단했던 산미증식계획을 재개하고 소비를 규제하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식량배급제를 실시했으며 공출량을 할당해 쇠붙이 등을 강제수탈했다.
⑶ 인적 수탈(人的收奪) : 많은 인력 강제수탈
⑴ 지원제 : 윤군특별지원병령(1938.2), 1943년 7월 해군특별지원령으로 18,000 조선청년이 일본군에 지원
⑵ 학도지원병제 :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에 의하여 약 4500 전문학교 및 대학생 전쟁터로 징집
⑶ 징병제 : 1942년 5월 징병제로 1944년부터 20만명이 징집
⑷ 모집・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挺身隊)
⒜ 모집 : 노무수급조정령 및 사업장노무관리령에 의해 토목공사장, 광산에 강제 동원
⒝ 징용 : 1939년 국민징용령 노동력 강제동원
⒞ 보국대 : 1941년 국민근로보국령으로 군로보국대
⒟ 근로동원 : 초중등학생까지 군사시설 공사에 투입
⒠ 정신대(挺身隊) :;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 12~40세 조선여성 강제동원되어 군수시설 및 종군위안부
Ⅱ. 국내외 민족해방운동
1. 의열활동 : 한인애국단
가. 배경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침체 상태에 빠졌으며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독립운동가들의 중국내 입지가 약화되었다.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1931년 4월 창춘 와세다 공사(早稻田公司)의 경리 하오융더(郝永德)가 이퉁허(伊通河) 기슭에 있는 완바오 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를 차지(借地)한 것을 다시 조선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명이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맺고 만보산 지역 미개간지를 개간하게 했다. 조선농민 180여 명이 수로공사를 진행했는데 중국농민들과 경찰이 공사 중단을 권고했다.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조선농민들을 이용해 공사를 계속 강행했다. 이에 중국농민 500여 명이 제방을 파괴했고 중・일의 무장경찰까지 동원되는 충돌이 발생했다. 조선농민은 사상자가 없었으나 일본은 <경성일보>에 조작기사를 제공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여 보도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 습격 사태가 발생했으나 곧 심각한 사건이 아님이 밝혀졌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중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 촉발에 이용하려 했다.
나.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金九)는 임시정부 활동에 활기를 불어 넣고 민족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상하이에서 의열활동을 통해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중 우의(韓中友誼)와 일본 수뇌암살을 목적으로 1931년 9월 한인애국단이라는 항일의거단체를 조직했다. 간부는 단장인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李裕弼)・이수봉(李秀峰)・김석(金皙)・안공근(安恭根)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 등이다.
다. 한인애국단의 활동
⑴ 이봉창(李奉昌)
1931년 말 김구 등은 일본 천황의 암살을 계획하고 이봉창을 동경(東京)으로 밀파된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잡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항일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력소 구실을 하였다. 중국 국민당(國民黨) 기관지 『국민일보』는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는 보도를 대서특필하였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군들로 하여금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키게 하였다.
⑵ 윤봉길(尹奉吉)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이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된 천장절축하장(天長節祝賀場)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義則) 군사령관, 우에다(植田謙吉) 육군대장, 노무라(野村吉三郎) 해군중장,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 7명을 살상하고 잡혀 사형되었다.
⑶ 기타
1932년 4월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의 조선총독암살미수사건, 최흥식・유상근의 국제연맹조사단원암살미수사건 등
2. 무장독립 전쟁
가. 일제의 꼭두각시 만주국 수립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 괴뢰국인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만주침략에 대항하여 한중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만주국(滿洲國, Manchu State. 1932.3.1~1945.8.18)은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18일) 직후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나. 한중연합군의 활동
1930년대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이 활약했다.
단체 | 총사령 | 활동지역 | 연합군 | 대표 전투 |
조석혁명군 | 양세봉→高而虛 | 남만주 | 중국의용군 | 영릉가전투, 도가보전투, 흥경성전투, 청원전투, 결석령전투 |
대한독립군 | 지청천, 홍진, 김좌진, 김동삼, | 북만주 | 중국호로군 | 의란전투, 아성전투, 쌍성보전투, 징보전투, 사도하자전투, 대전자령전투, 동녕현전투 |
다. 만주지역의 항일 독립투쟁
1930년대 중반 만주지역의 항일 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동북항일연군을 형성하여 1937년 함경남도 보천보전투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피해를 입혔다.
Ⅰ. 동북인민혁명군에서의 조선인들의 활동
1. 간도에서의 조선인유격대
가. 1930년대 항일유격대(조선인 중심)⟶동북인민혁명군(중국공산당 주도)⟶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발전 : 일본군 및 위만군과 투쟁
나. 중국공산당 ‘만주병사공작에 관한 지시’(1931.10) 유격구 건설 및 유격대 창설지시
⑴ 동만주 : 연길, 왕청, 훈춘현 등지에 소왕청 Soviet, 대황구 Soviet, 어랑촌혁명위원회, 우복동혁명위원회 등 조선인을 중심으로 유격구 구성
① 연길현 : 적위대(赤衛隊)를 중심으로 유격대 조직(1932)
② 화룡 : 적위대(赤衛隊)・평강유격대를 중심으로 어랑촌유격근거지에 유격대 조직
③ 왕청현 : 18명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중심으로 유격대 발족(1932)
④ 혼춘 :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가 합하여 혼춘유격대로 발전
⑵ 북만주
① 주하 : 지방자위대를 토대로 20여명으로 주하(朱河)반일유격대(1933)
② 밀산(密山) : 조선인 7명으로 중국공산당밀산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를 모체로 밀산유격대 조직(1934)
③ 탕원(蕩原) : 중국공산당탕원위원회가 조직되고(1929) 20여명으로 유격대가 구성(1932)되어 600여명으로 증가
⑶ 남만주 : 반석(盤石)을 중심으로 적위대 성립되고 그것을 기초로 유격대 창건
2. 동북인민혁명군안의 조선인활동
가. 동북인민혁명군의 성립과정
⑴ 제1군 :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 이홍광(李紅光)이 이끄는 조선인중심의 반석노동의용군(1932)+한족무장부대⟶1933년 중국노농홍군(勞農紅軍) 제32군 남만유격대⟶1934년 가을 병력이 2,000명으로 중가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1독립사(獨立師)⟶2개 독립사로 확장되면서 동북혁명군제1군으로 편성(1934)
⑵ 제2군독립사 : 북간도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만주지방에서 연길, 화룡, 혼춘, 왕청 4개유격대가 중국노농홍군 제32군 동만유격대로 편성(1033)되었다거 약 900명의 병력으로 조선인 주진(朱鎭)을 사장(師長)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발전(1934.3)
⑶ 제3군 : 주하반일유격대가 동북반일유격대 하동지대로 재편성(1934.6)되었다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편성(1935.1)
⑷ 제4군 : 중국 운남 육군강무당 출신 최석천(崔石泉, 崔庸健)등이 요하에서 조선인 청년 100여명이 참가한 군정훈련반⟶최석천을 대장으로 하는 요하반일유격대(1933)⟶조선인 이학복(李學福)지휘요하유격대⟶동북인민혁명군 제4군에 편입(1935)
밀산유격대+한족의 구국군⟶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편성(1934.9)
⑸ 제6군 : 탕원유격대+주변의 자위대+경찰대⟶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편성(1936) 제1사 사장은 조선인 마덕산(馬德山)
⑹ 밀산유격대+한족의 구국군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편성(1934.9)
나. 1월서한
⑴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
중국공산당은 만주병사공작에 관한 지시를 수정해 1933년 1월 서한을 채택하여 동만주, 남만주, 북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들이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
⑵ 1월서한의 내용
①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강화와 노동계급의 영도권 확보 강조
② 일제와 친일주구의 재산몰수
③ 소수민족의 기본적 권리와 이익보장
④ Soviet정부의 해체와 인민혁명정부의 수립
⑤ 유격대의 인민혁명군으로의 개편
다. 반일연합작전
혼춘・왕청현 유격대원와 구국군 유격대원이 연합하여 동녕현성 공격(1933.9)
Ⅱ. 동북항일연군과 조선광복회
1. 동북항일연군내 조선인부대의 활동
가. 1932.2 간도지방 조선인들의 자치표방 친일방공단체 민생단(단장 朴錫胤) 창설 및 해체
나. 반민생단투쟁(1932~1936) : 중국 공산주의운동 내부의 민족배타주의적 경향과 좌경모험주의적 방침이 겹쳐 인민혁명군내의 많은 조선인들이 민생단원이라는 이유로 560여명이 체포되어 간부급 40여명을 포함 조선인 430여명이 처형되었으나 1936.2 Comintern의 지시로 중단되자 동북인민혁명군 특히 조선인군사가 많은 제2군사가 급속 성장
다. 동북항일연군 편성 : Comintern 동북항일군 군대편제를 통일할 테제에 관한 선언으로 동북인민혁명군, 동북반일연합군, 동북혁명군, 각종 유격대 등 무장조직의 통일전선인 동북항일연군이 제1군에서 제11군으로 편성(1936~1937)
동북인민혁명군제2군 | 동북항일연군제1군 | 제1사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 제1사 | 경위려 |
제2사 | 제2사 | 제1방면군 | |||
제3사 | 제3사 | ||||
동북항일연군제2군 | 제1사 | 제4사* | 제3방면군 | ||
제2사 | 제5사 | ||||
제3사*(김일성) | 제6사*(김일성 사장) | 제2방면군(김일성) |
라. 활동
⑴ 제2방면군은 이후 최현이 제3단장이었던 제3방면군과 연합작전을 펴 1939.8 안도현 대사하 전투 日・滿軍 110여명 사살 및 1940. 3 화룡현 홍기하전투에서 일본 마에다(前田) 부대 120명 사살하는 등 적에게 타격을 가했으나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 전사 등 항일연군의 피해도 커서 대규모 균사활동을 하기 어려워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건너감
⑵ 교도려(敎導旅)(국제홍군 제88여단)
① 성립
1940.1 제1차 하바로스끄회의 이후 대부대활동을 중지하고 소련으로 건너가(1940.10) 제1로군의 제2・3방면군과 제2로군산하 제5군의 일부는 Vladivostok 근처에 남아영(B營)을 제2로군 대부분과 제3로군병력근 하바로프스끄 근처에 북아영(A營)을 세우고 얼마후 두 야여을 합쳐 중국인 주보중(朱保中)을 여장으로 하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로 개편
② 제88여단의 구성과 활동
전체 대원은 1700여명으로 1944년경에는 1000명 정도였고 조성인은 100~200여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인은 최용건 부참모장, 김일성, 허영식, 강신태 등 영장이 있었고 활동은 만주지방에 소부대 파견하여 적정정찰, 철도와 간선도로 등 수송로 파괴와 같은 소조활동을 했으며 조선인본대는 귀국하여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핵심세력이 되었다.
라.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⑴ 민족혁명당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단결을 위해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9개단체는 통합되어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 김원봉의 주도로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다시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되어 군사조직으로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그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중국공산당 관할 지역인 화북으로 넘어가 화북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에 편입되거나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참의부 (1923.8)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조선혁명당 | 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전선연맹 | ||
국민부(1929) | |||||||
정의부(1924.11) | 조선혁명군 |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한국독립당 | 신한독립당 | |||||
신민부(1925.3) | 혁신의회(1928) | ||||||
한국독립군 | |||||||
의열단 | |||||||
대한독립당 | |||||||
한국독립당(상하이) |
⑵ 조선의용대
중국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항일무장부대로 김원봉이 조선민족전선의 군사조직으로 1938년에 결성하여 중국 국민당정부와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일부 세력 약 80%가 화북지대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이 되었으며 김원봉 등 지도부와 나머지 20%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⑶ 조선의용군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 박효삼(朴孝三), 최창익(崔昌益), 한빈(韓斌) 등이 1942년 화북지방의 사회주의계를 중심으로 옌안에서 500명의 조선독립동맹의 군사조직으로 결성하여 중국 팔로군과 항일전에 참여하여 호가장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광복후에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하고 북한의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1938) |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1942) : 1600여명 80%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김원봉 등 400여명 20% 편입 |
3.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가. 임시정부의 이동과 정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후 일본의 압력으로 오랫동안 중국 내륙을 편력(遍歷)해야 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동을 하였다. 상하이(1919)→항저우(1932)→전장(1932)→난징(1937)→창사(1937)→광저우(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이다.
지명 | 기간 |
상하이(上海, 상해) | 1919년 4월~ 1932년 5월 |
항저우(杭州, 항주) | 1932년 5월 ~ 1932년 10월 |
전장(鎭江, 진강) |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
난징(南京, 남경) | 1932년 11월~1937년 11월 |
(피난) 자싱(嘉興, 가흥) | 1935년 10월~1936년 2월 |
창사(長沙, 장사) | 1937년 12월~1938년 7월 |
광저우(廣州, 광주) | 1938년 7월~1938년 11월 |
류저우(柳州, 유주) | 1938년 11월~1939년 5월 |
치장(綦江, 기강) | 1939년 5월~ 1940년 9월 |
충칭(重慶, 중경) | 1940년 9월 ~ 1945년 11월 |
(피난) 구이린(桂林,계림) |
위의 유적지 중 임시정부 유적지가 복원된 곳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이다.
나. 한국독립당 건설
조선혁명민족당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모든 단체의 해체를 주장했다. 임시정부의 산하정당으로서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김구, 1930년 한국독립당의 발전),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지청천)등이 있었는데 김구는 임시정부후 충칭 정착전 이들을 통합하여 1940년 한국독립당(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과 별개)을 건설했다.
다. 건국강령 발표
1941년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수용하여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삼균주의(三均主義)는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익 사상을 지양 또는 종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 및 미래 조국 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조소앙(趙素昻)이 주장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삼균(三均)은 개인 간, 민족 간, 국가 간 균등을 말하며,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 일가(世界一家)의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4. 한국광복군의 활동
가. 한국광복군의 창설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의 군대조직에 관한 양해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池靑天, 李靑天)을 총사령관, 이범석(李範奭)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5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400명을 편입시켰다.
나. 중국 국민당의 간섭
1944년까지 중국 국민당의 간섭을 받았다.
나. 연합군과의 공동작전 수행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한국광복군은 1943년 영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여 포로심문, 암호해독, 선전활동을 하였다.
다. 국내진입작전 추진
일부 병력은 미국 전략정보처(OSS, CIA의 전신)와 협력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실행직전에 일본이 항복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제4절 민족문화수호운동
Ⅰ. 식민지 문화정책
1. 일제의 교육정책
가. 목표
교육을 통해 일본 체제에 순응하는 식민지 노예를 만들고자 하였다.
나. 내용
⑴ 식민지 차별 교육
동화・차별 정책과 시세민도론(時勢民度論)을 내세워 한국민의 우민화를 추구했다.
⑵ 민족 교육 탄압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8년 서당규칙, 1941년 초등학교령의 제정하였다.
1911년 사립학교규칙 | 사립학교 규제 강화 |
1915년 개정 사립학교규칙 | missionary school 탄압 |
1918년 서당규칙 | 개량 서당의 허가제 |
1941년 초등학교령 | 초등학교로 이름바꾸고 조선어 폐지 |
⑶ 고등교육 제한
초등교육과 기술교육에 치중하여 식민지지배에 이용할 노동력을 양성하고자 했다.
다. 조선교육령의 제정
1차 조선교육령(1911) | 천황의 충량한 신민 양성과 일본의 국민다운 품성 함양을 내세웠다. 조선의 교육체계를 보통・실업・전문학교로 제한하고 사립하교 인가조건 강화 및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년으로 단축했다. 과학연구와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다. |
2차 조선교육령(1922) | 기미독립운동의 영향으로 보통학교 수 증대, 보통학교 수업연한 6년제,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인정하고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
3차 조선교육령(1938) | 동화주의 교육을 강화하여 황국신민화교육으로 소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고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조선어과목을 선택으로 했다. 대강령 :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 |
4차 조선교육령(1943) |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화하여 전쟁동원을 위해 교육연한을 줄이고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을 폐지하고 교육에 관한 비상조치와 군사교육을 강화했다. |
2.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정립
가. 목적
한국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고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한국사의 독창성과 자율성을 부정하였다.
나. 식민사관
조선사를 편수하는 조선사편수회와 청구학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였다. 식민사관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을 말한다.
나. 내용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패배적 역사의식을 주입하는 식민사관을 강요하였다.
⑴ 지리적 결정론(타율성론. 반도적 숙명론)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주체성이 없이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 임나일본부설, 만선사관
⑵. 정체성론
한국사회는 지방분권적 봉건제도의 부재로 사회・경제 구조의 내적 발전이 없어 고대사회의 단계에 정체되어 있는 논농사의 사회이다.
⑶ 당파적 민족성
한국민족이 선천적 또는 숙명적으로 당파적 민족성으로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고 분열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 불가능하다.
⑷ 일선동조론
한국과 일본 조상은 같은 뿌리이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1925~1945)
1925년 6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존재한 일제가 한국사를 연구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설로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으로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한국인의 민족의식 말살하고 한국사의 왜곡과 원활한 식민통치 수행을 위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하여 1938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朝鮮史) 35편(37책), 조선자료총간(사료총서(史料叢書)102편, 조선자료집진(사료복본(史料複本)) 1,623을 편찬하였다. 조선에서는 위원 이능화 , 최남선, 수사관 홍희(洪憙), 신석호(申奭鎬), 수사관보 신석호(申奭鎬), 이병도(李丙燾)가 참여하였다.
직함 | 이름 |
고문 |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이윤용 |
위원 | 이진호 유맹 어윤적 이능화 이병소 윤영구 최남선 |
간사 | 김동준 정교원 이동진 손영목 엄창섭 김대우 신구 하지메 김병욱 |
수사관 | 홍희 신석호 |
수사관보 |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
서기 | 현양섭 김용적 |
촉탁위원 | 홍희 박용구 이병도 육종윤 권중익 김태두 조중관 최남선 신석호 구찬서 조한직 윤용균 |
청구학회(靑丘學會. 1930~1939)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술연구단체.
1930년에 조직되어 1939년에 해체된 일본 어용(御用) 학자들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 조선 및 만주(滿洲) 등을 중심으로 극동(極東)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한 학술 연구단체로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간부로 구성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등이 참여하였다
조직은 평의원·회무감독·위원·서기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학회의 취지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입할 수 있었고, 재정은 회원의 회비로 충당하였다. 한국인은 최남선(崔南善)·이능화(李能和) 등이 평의원으로,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홍희(洪熹)등이 위원으로 가입하였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계간지(季刊誌) 청구학총(靑丘學叢)을 발간하였고, 학술 연구자료 출판, 강연회·강습회 개최, 학술 연구여행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3. 언론정책
1910년대 | 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신문을 탄압통제하기 1907년 7월 24일 제정한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언론을 통제했다. |
1920년대 | 문화통치의 일부로서 신문(조선, 동아, 시대일보)과 잡지(文章) 발행을 허용하고 기사 삭제, 발매 중지, 압수・폐간 등으로 탄압하였다. |
1930년대 | 대륙침략 이후 탄압을 강화하고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1937년 조선중앙일보, 1940년 조선 동아일보를 폐간했다. |
1936년 8월 29일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4면과 『동아일보』지방판 조간 2면 및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
Ⅱ. 국학운동
1. 국어연구
가. 한글 연구 배경
이윤재, 최현배 등은 한글 연구 및 보급을 위한 민족정체성 확보를 위한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했다.
나. 한글 연구와 보급
대한문전 | 1909년 유길준(兪吉濬, 처음에는 조선문전 : 최초의 문법서) |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 | 1907년 주시경(周時經) |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 | 1907년 지석영(池錫永)은 의학교에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를 설립하고 대한국문설大韓國文設」을 발표 |
조선어연구회 | 1921년 10월 조직. 강연회・강습회 통해 한글 보급, 잡지 한글 발간, 가갸날 제정 |
조선어학회 | 1931년 이윤재, 이글로, 최현배, 김윤경 등이 주축이 되어 한극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의 통일, 우리말 큰사전 편찬 시도(1957년 완간), 제작 |
다.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安田稔, 安正默)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에서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丁泰鎭)임을 파악하고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했다는 이유로 33명을 검거하였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수사의견서 | 검사 기소 | ||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정태진(丁泰鎭)・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장현식(張鉉植)・이만규(李萬珪)・이강래(李康來)・김선기(金善琪)・정인섭(鄭寅燮)・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서민호(徐珉濠)등 24명 기소 |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정태진(丁泰鎭)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장현식(張鉉植) 16명 기소, 12명 기소유예 | 이극로(李克魯)・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정태진(丁泰鎭)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장현식(張鉉植) 12명 공판회부(12월 8일 이윤재(李允宰), 1944년 2월 22일 한징(韓澄)이 옥중사망, 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 공소소멸로 석방) | |
신윤국(申允局)・김종철(金鍾哲)・이석린(李錫麟)・권승욱(權承昱)・서승효(徐承孝)・윤병호(尹炳浩) 등 6명은 기소유예 | |||
안재홍(安在鴻) 불기소 | |||
권덕규(權悳奎)・안호상(安浩相)은 기소중지 |
2. 한국사 연구
가. 민족사학
⑴ 등장배경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사학을 수립하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자 했다. 우리 여사의 주체적 발전과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자 했다.
⑵ 내용
박은식 | 조선의 혼(魂) 강조. 국혼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역사 주목. 국난극복사를 강조하고 조선멸망 원인파악.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 고종 즉위 1863~1911년 105인 사건까지 일제의 침략과정 폭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1920, 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ㅡ 패맺힌 투쟁과정 서술) |
신채호 | 낭가사상(娘家思想) 강조. 문동학교 설립.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주필. 민족항쟁사를 강조하고 한국고대사를 체계화. 조선상고사(1948), 조선사연구초(1929),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1908), |
문일평 | 조신의 심(心) 강조. 조선사운동 전개. 대미관계50년사(1934), 한국의 문화 |
정인보 | 조선의 얼 강조. 조선사연구(오천년간 조선의 얼, 1935) |
안재홍 | 1934년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맞아 정인보, 문일평과 함께 조선학 운동 전개, 조선상고사감(1947), 불함철학대사전(1940), 조선철학(1944). 해방후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이론 주장 |
최남선 |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 |
박은식과 신채호
朴殷植(1859. 9. 30 황해 황주~ 1925. 11. 1 중국 상하이) | 申采浩(1880.12.8 충남 대덕~ 1936. 2. 21. 뤼순 감옥 독방 뇌일혈 졸도 사망) | |
역사가, 독립운동가(임시정부2대대통령) | 역사가, 독립운동가 | |
유교구신론(1909) : 위정척사사상처럼 과거에 집착하는 유학을 비판하고 제왕에게 봉사하는 유학 대신 백성에게 다가가는 유교가 필요함을 역설 | 독사신론(대한매일신보 연재) | |
朱子學 중심의 유학을 비판하고 陽明學의 知行合一과 社會進化論의 進步原理를 조화시킨 大同思想을 강조: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 1910) |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의 연구방향 제시 | |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견금태조(夢見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同古代史論) | 조선사론(朝鮮史論), 대동역사(大東歷史), 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대동제국사 서언,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923),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 |
최남선과 조선광문회 설립하여 심청전, 춘향전 등 민족고전에 대한 정리작업 전개 | ||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치.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나. 사회경제사학
유물사관에 토대하여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에 입각한 한국사의 발전을 강조하고 식민사관의 정체성을 비판하였다. 선구는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1923), 백남운(白南雲)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 해방후 연합성 신민주주의 제창. 그 외 김광진, 김석형, 박시형, 이청원, 전석담 등
다. 실증주의(實證主義) 사학
1934년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이상백(李相佰), 김상기(金庠基), 고유섭(高裕燮), 이선근(李瑄根), 문일평(文一平), 신석호(申奭鎬), 국어학자 이윤재(李允宰), 이은상(李殷相), 이재욱(李在郁), 이희승(李熙昇), 김윤경(金允經), 김태준(金台俊), 김효경(金孝敬), 이병기(李秉岐) 및 민속학자 손진태(孫晉泰), 송석하(宋錫夏), 김두헌(金斗憲), 박문규(朴文圭), 백낙준(白樂위원으로 뽑혀서 실무를 맡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회원인 이윤재·濬), 홍순혁(洪淳赫) 등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이 이희승·이병기 등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활동이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학회는 학보 발간 등 활동을 재개해 1945년 5월 31일 사단법인으로서 창립총회를 가지고 체제를 재편성하였다.
독일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사학에 기반하여 문헌고증을 통한 실증적 역사연구를 하고 진단학보를 발행했으나 실증적인 문헌고증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Ⅲ. 종교단체의 활동
1. 일제의 종교정책
가. 종교계의 역할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종교에 의자하려는 사람이 늘어 났고 종교계 대표들은 기미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나. 일제의 종교 장악 노력
일제는 종교를 내세워 식민통치에 대한 협조를 얻으려고 하였다. 사찰령, 경학원 규정 등을 통해 불교와 유교를 장악하고 포교활동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도록 했는데 1920년대 종교단들은 종교적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친일활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외래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에 비해 민족종교들은 철저히 탄압당했다.
개신교 | 안악사건・105인사건 조작, 개신계학교 폐교, 동양전도관(東洋傳道館)이라는 단체를 통하여 친일 유도,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 강요(주기철 목사 순교, 김교신 목사 옥고) |
불교 | 1911년 사찰령 제정, 근대식 불교교육기관인 중앙 학림 폐지, 본원사(本願寺)라는 불교단체를 내세워 친일 유도 |
천도교 | 기미독립운동 주도로 감시 강화, 지방교구 폐쇄 |
대종교 | 일제의 탄압으로 본거지 만주 이전 |
유교 | 대동학회(1907)를 통해 친일종교로 유도 |
2. 종교계의 민족운동
가. 특징
도덕심, 신앙심이 있어 사회사상적 성격이 강했고 지도부의 친일활동과는 달리 외곽에서는 비밀리에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나. 활동
천도교 | 기미독립운동을 주도하고 1920년대 어린이운동(1923년 잡지 어린이, 1923. 5.1 어린이날 제정)을 전개했다. |
대종교 | 1909년 나철(羅喆, 羅寅永), 오혁(吳赫, 吳基鎬), 이기(李沂, 호남학보 발행)등이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이후 중광단, 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5년 교주 나철(羅喆)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하고 김교헌(金敎獻), 윤세복(尹世復, 본명 尹世麟)이 차례로 교주로 되면서 점차 순수종교운동으로 전환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에 문을 닫았다. |
불교 |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일제에 맞서 조선불교유신회(1921)를 조직하여 사찰령(1911) 반대투쟁을 했으며 일제가 조선블교중앙교무원(1925)을 설치하여 불교계를 장악하자 卍당(1930)을 결성하여 한국 불교의 전통 지키고자 했으며 한용운은 불교유신론(1913)을 서서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다. |
개신교 | 천도교와 함께 기미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농촌계몽과 한글 보급에 앞장서고 일제의 신사참배에 격렬히 저항하였다. |
천주교 | 일제의 탄압을 의식해 독립운동을 자제했으며 만주에서 대한의민단이 무장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했다. |
원불교 | 박중빈이 창시했으며 저축에 의한 자립경제를 추구했다. 허례허식 폐지, 남녀평등 등을 주장하고 생활개성운동을 전개했다. |
유교 | 박은식의 유교구신론(1909)에서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민중위설을 발전시켜 민주적・평증적 종교인 대동교 |
증산교(甑山敎)
1. 창시
1902년 강일순(姜一淳)이 전북 정읍 모악산에서 창시한 종교로서 강일순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 동안 자신이 광제국(廣濟局)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 부근을 중심으로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하였던 전라북도의 7개 군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사망하였다.
2. 분교
분파 | 창시 | 개창 | 내용 |
선도교(仙道敎, 太乙敎) | 1914년 | 고판례(高判禮) | 강일순의 아내 고판례(高判禮), 김제시 백산면 조당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모아 1919년 별도로 태을교(太乙敎)라는 교명을 가지고 교단을 분리 |
태을교(太乙敎) | 1914년 | 안내성(安乃成) | 안내성(安乃成)이 1914년 여수 동국리(棟局里)에서 태을교(太乙敎) 세운 다음 1925년에는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개명 |
보천교(普天敎) | 1916년 | 차경석(車京石) | 고부인(高夫人)의 이종사촌동생이며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은 고부인과 일반신도들과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191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창시한 유사종교. 교명을 1921년 보천교(普天敎) 명명. 1921년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 명칭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國號)를 선포. 차경석 몰후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해체됨. |
제화교(濟化敎).삼덕교(三德敎) | 1916년 | 이치복(李致福) | 이치복(李致福)이 1916년금구(金溝) 원평(院坪)에서 ‘제화교(濟化敎)’를 조직한 다음 다시 경상남도 하동에서 ‘삼덕교(三德敎)’를 세웠다. |
삼덕교 | 1920년 | 1920년 | 허욱(許昱)이 1920년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
불교진흥회 | 1921년 | 김형렬(金亨烈) | 김형렬(金亨烈)이 1915년 창시한 종교. 강일순을 가장 먼저 따랐던 김형렬(金亨烈)은 1915년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별도의 교단을 세운 뒤 1921년 ‘불교진흥회’라고 부르다가 1922년에는 ‘미륵불교’라고 개명. |
태극도 | 1921년 | 조철제(趙哲濟) | 조철제(趙哲濟)가 1921년 세운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
동화교(東華敎)(증산교본부) | 1928년 | 이상호(李祥昊) | 이상호(李祥昊, 1880∼1967)가 1928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창시한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
보화교 | 1930년 | 김환옥(金煥玉) | 김환옥(金煥玉)이 1930년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
태을교(太乙敎) | 박공우(朴公又) | 전북 태인 | |
태을교(太乙敎) | 1914년 | 문공신(文公信) | 정읍·김제·고창·부안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단 창립 |
증산교도리원파교단(甑山敎桃李園派敎團) | 김광찬(金光贊) | 전북 남원 |
백백교(百百敎) : 백도교에서 파생한 동학 계통의 유사 종교의 하나. 1915년경 동학교도 전정운이 세웠음. 1923년 차병간이 경기도 가평에서 퇴폐한 민심을 교화하여 광명 세계를 실현한다고 포교를 시작함. 전해룡이 교주가 되면서 갖은 악행을 자행하여 마침내 단속을 받고 없어졌음.
보천교(寶天敎) : 흠치교(吽爬敎) 교조 강일순 제자인 차경석이 191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창시한 유사종교. 그가 사망한 후 邪敎로 규정되어 해체됨.
Ⅳ. 문예운동
1. 문학
가. 1910년대
계몽주의 성격이 강하고 최남선과 이광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남선 | 1908년 11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少年)> 창간호에 실린 개화기 대표작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를 통해 언문일치의 문장을 구사했다. |
이광수 |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126회에 걸쳐 연재되어 1918년 광익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된 무정(無情)으로 근대소설을 개척했다. |
나. 기미독립운동 직후의 문학사조
기미독립운동 실패로 인한 실망감과 허탈감을 표현했고 자연주의(창조), 퇴폐주의(폐허), 낭만주의(백조) 사조가 등장했다.
창조(1919) | 김동인(감자), 주요한, 전영택 등. 구어체를 학립하고 조선말에 없던 he(그), she(그녀)를 사용했다. |
폐허(1920) | 김억, 염상섭(三代), 오상순 등 |
백조(1922) | 박종화, 이상화, 나도향, 김기진 등 |
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신경향파인 1925년 8월에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가 결성되고 계급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문인들이 국민문학운동을 전개했다.
신청년 | 김소월, 한용운(님의 침묵, 1926), 심훈, 나도향, 현진건 등. 창간 당시에는 KAPF계열이 주도했으나 4호부터는 백조파가 주도하고 순수문학지 성격을 유지했다. |
시조의 현대화 노력 : 이병기(李秉岐)
라.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억압으로 순수문학적 성격이 나타났고 이륙사(李陸史, 청포도, 1940), 윤동주(尹東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序詩)) 등 강렬한 저항의식을 담은 작품이 나타났으며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최남선, 이광수, 조병화, 서정주 등 친일적 문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저항문학 | 이륙사, 윤동주 등. 항일의식 표현 |
친일문학 | 최남선, 이광수, 조병화, 서정주 등. 군국주의 찬양 |
문장(1939) | 이태준, 정지용 등. 문학을 정치세계로부터 옹호하려는 경향으로 수순문학이 주장 |
2. 예술
가. 음악
전통음악을 대신하여 서양음악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1910년대는 창가가 유행했고 1920년대에는 민족정서를 노래했으며 1930년이후 친일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홍난파(봉선화, 고향의봄), 현제명(고향생각), 안익태 등이 많은 가곡을 남겼다. 민족적 정서를 담은 윤극영의 반달, 홍난파의 고향의 봄 같은 동요가 불렸다.
나. 미술
전통회화 | 이상범, 변관식, 박생광, 이응노 등이 동양화를 전승했다. |
서양화 |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등이 주목을 받았다. |
다. 연극
1910년대에는 혁신단 등 신파극이 유행했고 1920년대 동경유학새을 중심으로 조직한 토월회(1926년 해체),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등이 조직되면서 시작하여 초기에는 민중의 각성을 요구하는 연극이 공연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오락일변도로 흐르다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공연되기도 했다.
라. 영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의 민중의 아픔을 표현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했으며 1940년 조선영화령이 공포되어 심한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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