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반공포로 석방 때
정든 고향 부모형제 두고
자유 찾아 대한민국에 남은 황씨
연고 없는 이 땅에 정착하여
머슴살이하며 장가들어
아들딸과 행복하게 살던 모습
아프게 아름답더니
不踰矩를 넘기면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먼저 보내고
팔순 노구를 전동차에 의지해
낯익은 마을길 오가며
텅빈 외로움
힘겹게 삼키더니
모진 추위 몰아친
지난 겨울 차가운 방에서
쓸쓸히 가셨다.
생전에
꿈에도 그리던 북녘 고향
아스라히 먼 그 길
제대로 찾아나 가셨는지?
고향 갈 때면
말 없이 마을 회관 되돌아
오가던 모습 선연한데
느티나무 정자 앞 그 길이
텅 비어 있다.
빈 자리에도
봄이라고
새 잎 피어 푸르고
그가 간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다.
뻐꾹뻐꾹
저 소리
고향 뻐꾸기 같다며
헐겁게 웃던 황씨
한 맺힌 그 모습 되살아나
가슴을 적신다.
ㅡ우리 마을 황씨ㅡ "쓸쓸한 자유"
긴 여름
잡목 속에 묻혀 있던
정정한 소나무가
향을 피우는
만추의 산곡
저기 저 구릉 어디쯤에
살진 노루가
마른 풀 냄새를
맡고 있을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 벗어두고
잠시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인간이 대단ㅎ다 하지만
때 되면 잎 피고 꽃 피는 이치 하나도
어림없다.
작은 연록색의 잎 하나
피워내지 못한다.
바람 불어도
남의 옷 입지 않고
제 가락으로 빛나는 자랑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으랴,
꾀 모르는
순연한 자연이
내 무딘 감성을
숨 막히게 한다
*
눈부시게 빛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흐리지도 않고
일상이 그윽하게 내려 앉은
하오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비탈을 오르시는
등 굽은 할아버지의
리어카와
무거운 가방으로
어깨가 처진
하교 길
학생들의 군상
더운 창을 통해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멀리
테니스장에서
공을 치는 모습이
딴 세상 그림 같다.
*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서
여름내 내 근처에 머물던
먼지가 젖고
더운 일상의 늪 속에
숨죽여온 영혼이
깨어나고 있다.
보이지 않던
산이 산으로 보이고
강이 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처럼 자각 속에서 듣는
소낙비 소리에
막혀 있던 견고한
고막이 열려
우우우 울음 우는
새 소리가 들린다.
사람 소리가 들린다.
*
시골학교 동창회
땀에 전 일상 잠시 벗어 두고
억지로라도 여유로운 하루
북, 꽹과리, 징소리에 어우러져
흥겨운 춤사위가 펼쳐지고
구석구석 차일치고
솥 걸고 엉겨 앉아
정겨운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다.
서울에서 온 사장도
대구에서 온 회장도
이 마당에선
한낱 허울이다.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그 이야기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
구수한 사투리에 하루해가 짧다.
*
침묵조차 침묵할 것처럼
조용한 산사
잎사귀를 울리는
빗소리가
소음을 삼켜
숲이 더 고요하다.
아득한 어둠 속
별 이야기
묻어 있는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서
낯익은 얼굴로
그리움을 쏟아 놓는다.
천지가 어둠 속에
숨죽인 이 밤
그리운 이름
때 묻지 않은
소리를 보는
안경 하나 갖고 싶다.
*
누가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하는가
누구처럼 까탈스레 앉을 곳 가리지 않고
누구처럼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누구처럼 호드갑스레 꾸미지 않고
제 얼굴로 제 자리에 발 붙이고 앉아
비바람 묵묵히 다 받아 주며
속으로 삭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늘 그렇게 넉넉한 얼굴로
고향을 지키는 어머니 꽃
*
자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젖는
어머니
그 강한 아버지도
솜처럼 부드럽게 만드시는
어머니
메마른 세상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
7월의 열대야
창틈으로 새 들어온
달빛에 잠이 깨어
손가락을 만지고 있다
밝으면 더울 것 같아
전등도 끈 채
세상을 눈감고 있다.
*
유리 같이
맑은 하늘에
흠이 될까봐
바람도 숨죽이는
8월의 아침
나무와 바위가 그린
청록산수화
멍하니 바라보다
나를 잊는다.
*
금오산 정상을 바라보니
가을이 여물어 있다.
다갈색 높은 산봉 위로
파아란 하늘이 열려 있는 게
이종무의 가을 유화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서릿바람에 흔들리는
산비알 밭둑의 억새가
늦가을의 눈目인 양
반짝반짝 빛나는 위로
푸드덕 산꿩이 난다.
*
바람 한 점 없는 초겨울 아침
앙상하게 벗어버린 나무들이
꼿꼿하게 얼어붙었다.
빈손이라도 흔들어 보여야 사는 세상에서
그림처럼 숨죽이고 있는 정경이
묘지처럼 적막하다
얼음장 같은 하늘도
화사하던 햇살도
오늘은 묵묵부답 입이 붙어버렸다.
굳은 포도 위로 촉촉이 젖은 염원이
발길에 챈다
(1993. 11.30
*
메밀밭에 우묵우묵 돋아난 잡풀에 묻혀
메밀이 안 보인다
간혹 보이는 것도 키만 자란 야윈 놈뿐
대궁이 붉은 야무진 놈은
추억 속에나 있는가
달밤에 소금을 뿌린 듯한
산촌의 정취가 아슴아슴 멀고
자가용 크락션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세월보다 높은 둑을 넘는다.
*
다 떠나가고
술 취한 사람만 남아
간신히 시간 추스려 탄
시골 길 막차
차창 밖으로 몰려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저만큼 아득히
불빛이
가물가물 졸고 있는
산 아래 외딴집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웃던 사람들
오늘은 그 웃음만큼 겨울을 앓고 있다
계절을 잊고 살던 나무는
실없이 더운 도시보다 산이 좋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을 입고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비에 젖는 자유
그 속에서 키가 크는
산의 마음 산의 얼굴
하산한 그 때 그 산 소년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
겨울비에 젖는 마음을 누가 알까
얼어붙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금오산 위 쌓인 눈이 하얗게 빛난다
부끄러운 육신을 가릴 한 오라기 실도
건사하지 못한 터에
바람 따라 흐르는 마음을
무슨 우산으로 가릴 수 있단 말인가
포도鋪道에 떨어지는 빗방울 위로
치솟는 고급아파트
단단한 세월의 덫에 걸린
불륜의 짐들이 무겁다.
*
불혹의 능선에서
다시 잡아보는 손이 낯설지 않았다.
순결한 우정 앞에서
부시던 돈이, 자리가 숨을 죽이고
흙 묻은 사투리와 검정 운동화가
뜨겁게 부활했다.
우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내가 나에 취하여 나를 잊었다
아, 그리운 그 시절
그리운 사람
무거운 껍데기 벗고
그 목소리 그 얼굴로 다시 앉고 싶다.
$
실비집에서 돼지고기찌개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밤비 속에 탄 막차
차창 밖은 칠흑 같은 심연 비에 젖은 전조등 앞으로 다가서는 잎 진 가로수 행렬 멀리 산발치에 반딧불처럼 희미한 불빛이 아스라이 멀어져 간 유년을 불러 온다
아, 달리는 차보다도 빨리 달려오는 시간들 군데군데 닳아진 모서리가 허전하다
*
방학이 끝나갈수록 텅비어가는 마음
공연히 마음이 술렁인다.
외출에서 귀가하는 길
생각지도 않던 난분蘭盆을 샀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푯대 하나
달아놓지 못한 세월이
밤길 포도에서 떨고 있는 게 안쓰럽다
멀리 금오산 마루 반짝이는 점등이
오늘 따라 한결 추워 보인다
너무 쉽게 녹았다가 너무 쉽게 얼어붙는
날씨가 누굴 닮았다.
(1991. 2.2)
*
날이 갈수록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고
먼 산 위로 흐르는 구름이 유심한 게
아까워서 돋보기안경을 쓰고 보니
콧잔등이 무겁다
역시 그대로가 좋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살아야
편하다는 진리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부끄럽다
(1991. 2.3)
*
다 떠나가 버리고 바람만 남은 뜰에
앙상한 가지가 춥다
억지로라도 입어야 사는 세상에서
훌훌히 벗어버리고 산다는 게
얼마나 슬픈 오만이냐
깊은 밤 차가운 별빛 아래
얼어붙은 손등이 아롱아롱 빛난다 (91.2.4)
*
자고 나면 비
비만큼 많아지는 말
말만큼 속이 비는 세상
바람소리가 난다
바람도 먹은 바람이라
연을 띄우지도 못하고
공연한 길만 찾는다
나무도 집도 젖지 않는
길만 찾는다.
*
나른한 햇살 머금고
흰 구름 떠가고
연초록 물드는 강둑 따라
근심 없는 미루나무
하늘에 닿아 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흘러간 강나루
인정 실어 나르던 나룻배
술 익는 강마을 밀밭
노고지리 우짖던 갈 숲은
목월木月 따라 가버렸는가
목매기송아지가
봄을 부르던
논둑길 위로
무성한 잡풀이 남아
할아버지의 붉은 흙을
지키고 있다
*
휘젖는 산골바람
설레발을 치는 연기
소나무를 덮는 잡목
가팔라 가는 언덕
바빠야 사는 세상이라
저리 변덕 심한가.
세상엔 인력으로
맞설 수 없는 일 많은데
새순처럼 우묵우묵
돋아나는 사연들
내 영혼 쉬어갈
풀밭 하나 안 보인다.
*
내가 미처 모르는 새
봄이 오고 있었구나.
연푸른 이내 속
연분홍 진달래가
물 오른 버들개지 따라
몸이 달아 있었구나
감각 무딘 상수리도
늦잠 자는 오리목도
귀 밝은 찔레순 따라
눈을 트고 있었구나.
온 산이 세상 뒤에서
일어서고 있었구나
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