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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공학박사들이 이야기하는 신기한 이야기들 20세기에 에밀레종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정성의 부족 뿐만 아니라 기술 부족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의 축적과 과학적 사고란 발전이 아니라 변화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 무늬 당좌(撞座)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史),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鍾乳), 입부분의 보상당초문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 『미술자료』 8,9호에 원자력연구소 연구팀은 범종을 특수촬영하여 당시 어떻게 그렇게 얇은 주물이 가능했고, 깨끗한 용접이 가능했고, 주물에 기포가 없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에도 물론 기포가 없다. 『유물의 재발견』에서 남천우 박사는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과 일본종은 만형법 또는 회전형법(回轉型法)으로 제작된 것과 는 큰 차이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종 몸체에 그와 같이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긴 여운을 내지 못한다. 우리가 듣는 종소리,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듣는 소리가 아니라 '조선종'을 만들어낸 우리들만 듣는 소리인 것이다. 。
조선 종에서의 이 울림, 물리학에서 말하는 '맥놀이' 현상은 진동수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음파가 동시에 발생될 때 생기는 일종의 간섭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밀레종에서 이 진동원(振動源)이 어디인지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음관(音觀)에 비결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에밀레종 용머리 뒤쪽에는 대통모양의 관이 솟아 있는데 이 관은 높이 96cm, 안쪽이 14.8cm, 위쪽이 8.2cm로 속이 비어 있다. 이 음관은 조선종에만 있고 중국종 일본종에는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20~30%를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 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g을 한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27톤의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붓는데 그 압력이 대단하여 거푸집이 왠만큼 튼튼하지 않고는 모슈 견딘다고 한다. 또 쇠물이 쏟아질 때는 거품이 일어나 버글거리는데 이때 공기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면공기를 품은 채 굳어버려 기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공기를 어떻게 빼 내었을까? 요즘 만든 주물에는 기포가 많은데 그때는 없었다니 신비할 따름이다. 그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일일 따름이다. 에밀레종의 전설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그 여운의 소리가 "에밀레"같고, 그 뜻은 "에밀레라" 즉 "에미 탓으로"와 같기 때문이다. 여러 갈래로 그 부정을 추정한 결과 그 아낙네 탓으로 단정되었다는 것이다. 경덕왕이 대종의 주조를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하여전국에 시주중을 보냈을 때 민가의 아낙네가 어린애를 안고 희롱조로 "우리집에는 시주할 것이라고는 이 애밖에 없는데요"라며 스님을 놀렸다는 것이다. 대종이 연신 실패를 거듭하자 일관(日官)이 점을 쳐서 이것은 부정(不淨)을 탄 것이니 부정을 씻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갈래로 그 부정을 추정한 결과 그 아낙네 탓으로 단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애는 "에밀레"로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 전설은 반강제 성금을 내야만 했던 민중의 고통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온국민의 국가적 총력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아기가 진짜로 희생됐다, 아니다는 엇갈린 견해가 여지껏 팽배하다. 。 희생되었다는 주장에는 사람의 뼈속에 있는 인(P)의 성분이 신묘하게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사람의 뼈, 동물의 뼛속에 있는 인의 성분은 물질의 합성, 합금에서 신기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예부터 알려져왔다. 진시왕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그 땅다지기를 하면서 사람의 시신을 썼다는 얘기도 그중 하나이다. 아니라는 주장은 전설 자체가 만들어낸 얘기일 뿐이며 아무리 사람의 인이 신묘하다 할지라도 27톤의 쇳물 속에서 그 양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쇳물은 한 가마에서 끓인 것이 아니라 도가니 100개 이상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벌통 2천 개가 필요하다 종소리의 여운이 있어서 그것을 신비롭게 생각을 했고 그 여운의 생김을 소릿말로 옮겨 보려했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느 종에나 그처럼 아름다운 여운이 있었다면 이런 전설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덕대왕신종은 숱한 시행착오 속에 완성된 밀랍형 주조의 첫 작품이고, 신비로운 여운이 있는 종의 첫 탄생이었다. 。 성덕대왕신종의 제작 경위는 무엇보다도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에 대한 추모의 정이 깊어 그 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동 12만 근을 내어 대종(大鐘)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 혜공왕 7년에 비로소 완성하여 봉덕사에 안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이상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거라는 의문이다. 애밀레종 만들기 15년 전에는 황룡사에 그 4배(50만 근)가 되는 황룡사 종도 만들었고, 3배가 넘는 분황사 약사여래상도 주조했던 실력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밀랍을 이용한 애밀레종 제작과정 남천우박사는 그 이유를 회전형 주조법에서 밀랍형 주조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시행착오 때문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종의 제작 날짜가 음력으로 12월 14일로 되었다는 것도 그 증거로 제시했다. 밀랍형으로 제조하려면 우선 밀랍이 있어야 하는데, 에밀레종의 부피가 3㎥이고, 벌통하나에서 채취되는 밀랍은 고작해야 1~2L이고 보면 최소한 토종벌통 1,500~2,000개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은 보통 숫자가 아닌 것이다. 밀랍을 채취할 수 있는 음력 9월에 만들기 시작해서 10월에는 밀초로 모형을 만들고 약 2개월에 걸쳐 주조하였다. 。 에밀래종은 단 한번의 주조로 완성되지 않았다. 에밀레종속으로 들어가 보면, 안쪽에는 쇳물을 덧붙이고 덧붙힌 자국들이 생생하게 보이는데 이 보완작업은 그 울림을 맑게 이끌어내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771년 12월 14일에 종을 걸고 치니, 종래의 종은 회전형인지라 여운이 없었는데 에밀레종은 밀랍법으로 되어 긴 여운을 띠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 여운이 신기하여 무슨 소리 같다는 등 하던 사람들의 얘기가 "에밀레"로 결론을 내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신종(神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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