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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 | 무신정권 중심기구, 진강후(晋康侯)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별감(敎定別監). 반대세력 수색 및 비위사실 감찰 |
정방(政房) | 정색승선(政色承宣). 최우때 설치한 동지작인 인사행동기구 |
서방(書房) | 문인들의 숙위기간 |
도방(都房) | 경대승이 만든 사병집단으로 최씨정권에서 확대 |
삼별초(三別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무신정권(1170~1270)
시기 | 연대 | 인물 | 내용 | 중심기구 |
제1기(성립기, 1170~1196) | 1170~1179 |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이 1171년 이고(李高)를 죽이고, 이의방(李義方)은 1174년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됨 | 중방(重房) |
1179~1183 | 경대승(慶大升) | 김자격, 견룡(牽龍), 허승(許升), 김경린과 함께 정중부(鄭仲夫) 부자와 송유인(宋有仁) 참수. 병사 | 도방(都房) | |
1183~1196 | 이의민(李義旼) | 조위총(趙位寵)의 난(1174년) 때 공훈. 의종(毅宗) 살해. | 중방(重房) | |
제2기(확립기, 1196~1258) | 1196~1219 | 최충헌(崔忠獻) | 이의민(李義旼) 살해 | 교정도감(敎定都監. 1209~ |
1219~1249 | 최우(崔瑀)→최이(崔怡) |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 몽골의 침공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 | ||
1249~1257 | 崔沆 | 전전긍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가노(家奴)에게 관직을 별장(別將) 제수. 집권하자 김경손(金慶孫)장군,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 본면 周永賚), 최우(崔瑀)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 참살 | ||
(1257~1258 | 최의(崔竩) | 이공주 낭장(郎將) 임명 | ||
제3기(쇠퇴기, 1258~1270) | 1258~1268 | 류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김준(金俊) | 김준(金俊, 가노출신 김윤성의 아들).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 김승준, 아들 김대재(金大才, 최영백 사위)・김용재・김식재과 大司成 柳璥. 神義軍都領別將 朴希實. 樞密院使 崔昷, 이연소. 將軍 朴松庇.都領別將 林衍과 함께 崔竩 참수하고 崔良伯 제거.무오정변(戊午政變) | |
1268~1270 | 임연(林衍) | 원종이 임연(林衍),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金俊 살해. 무진정변(戊辰政變).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사망 | ||
1270~1270 | 임유무(林惟茂) |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 |
Ⅳ. 고려 후기의 정치변동
몽골과의 관계
1. 몽골과의 접촉
가. 몽골의 성장
거란과 금나라에 예속되었던 몽골은 징기스칸(Genghis Khan, 成吉思汗, 鐵木眞, 테무친, 위 1206∼1227)의 등장으로 1206년 건국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27년 서하, 1234년 금,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나. 여몽의 거란 격퇴(강동의 역)
1219년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거란을 고려, 몽골 및 동진국이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격퇴시켰고 몽골은 이후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2. 몽골의 침입
가. 원인
몽골은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고려와 사이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몽고 사신 제구유(저고여, 著古與)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천필, 모시 2천필, 종이 10만장을 강요하고 귀국 도중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9차에 걸쳐 침입하였다.
나. 경과
몽고의 침입(대몽항쟁)
구분 | 연대 | 장수 | 구실 | 경과 |
1차 | 고종 18년 1231.8~1232.3 | 살리타이(撒禮塔) | 고종 12년 1255년 著古與(저고여, 제구유) 피살사건 | 서북면 마산 동산역 및 관악산 초적 활동 72명 다루가치(達魯花赤, 단사관) |
서북면병마사 朴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정주분도장군 金慶孫 자주성 성주 崔椿命 | ||||
2차 | 1232.8~12 | 살리타이(撒禮塔), 반장 홍복원(洪福源) | 1232년 6월 16일 강화천도(참지정사 유승단,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처형) 반대) | 처인부곡 白峴院(자현원) 승려 金允侯살리타이(撒禮塔) 살해. 용인현으로 승격돠고 김윤후 (상장군→攝郞將) 임명.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 다루가치 축출 |
승병 金允侯 | ||||
3차 | 1235.7~1239.3 | 탕쿠(唐古, tanggu, 당올(唐兀), 당올태(唐兀台), 당올대(唐兀臺)),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룍환도 | 전주, 경주까지 칩입. 황용사9층목탑 소실 |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 | ||||
4차 | 1247.7 | 阿母侃(아무간),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과 국왕친조 | 价州・竹州에서 몽고군 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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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산성 方壺別監 김윤후 | ||||
5차 | 1253 | 지라타이(車羅大) |
| 충주노예 활약. 김윤후 攝上將軍 승진. 충주 國原京 승격 |
김윤후 | ||||
6차 | 1254.7~1255.2 | 지라타이(車羅大) |
| 충부부근의 다인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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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 1255.8~1256.10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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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 1257.5・10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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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 1258.6~1259.3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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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순(洪大純)-홍복원(洪福源)-홍다구(洪茶丘)
원간섭기(1270∼1351)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3. 개경 환도와 강화
가. 최씨 정권의 몰락
온건파인 김준(金俊)과 류경(柳璥)이 최의(崔竩)를 타도하고(무오정변, 戊政變)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나. 무신정권의 최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살해하여 무신정권의 막이 내렸다.다. 개경 환도
원종 11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9년간의 강화도 시대가 막을 내렸다.
4. 삼별초(三別抄)의 저항(1270~1273년)
가. 배경
삼별초(三別抄)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무인들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지고 다시 몽고와의 항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가 도망쳐 온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한다. 삼별초(三別抄)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이며 대몽항쟁의 중심부대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었다.
나. 과정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개경환도가 발표되자 즉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喜)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항몽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1270.6~8월)에서 진도(1270.8.19~1271.5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로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이 다시 진도에서 제주도(1271.5~1273.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제주가 함락하여 항쟁은 끝났다.
다. 의의
고려 무인의 대몽고 항쟁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5. 원의 내정간섭
가. 부마체제의 성립
원 나라는 필요에 의하여 고려국왕을 교체하고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국왕은 세자로 있는 동안 독로화(독로화, tuluge)로서 북경에 머물러 있다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왕이 된 뒤에도 북경에 자주 드나들며 개경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제국 안에서 예우와 통제를 받았다.
충렬왕 | 충선왕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1274~1298 | 1298~1298 | 1298~1308 | 1308~1313 | 1313~1330 | 1330~1332 | 1332~1339 | 1339~1344 | 1344~1348
| 1349~1351 | 1351~1374 |
나. 왕실과 관제의 격하
고려의 왕실용어와 관제를 격하시켰다.
⑴ 관제의 격하
고려 전기(2성6부) | 충렬왕 원년(1부 4사)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 첨의부(僉議부) |
상서성(尙書省) | |
도병마사(都兵馬使)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중추원(中樞院)→추밀원(樞密院) | 밀직사(密直司) |
어사대(御史臺) | 감찰사(監察司) |
한림원(翰林院 | 문한서(文翰署) |
이부(吏部) | 전리사(典理司) |
호부(戶部) | 판도사(版圖司) |
예부(禮部) | 폐지(전리사에 통폐합) |
병부(兵部) | 군부사(軍簿司) |
형부(刑部) | 전법사(典法司) |
공부(工部) | 폐지 |
국자감(國子監) | 국학(國學) |
⑵ 왕실 용어 격하
원 간섭기 이전 | 원간섭기 |
조(祖), 종(宗) | 충~왕(忠~王) |
짐(朕) | 고(孤) |
폐하(陛下) | 전하(殿下) |
태자(太子) | 세자(世子) |
다. 정동행성의 설치(충렬왕 6년 1280년~1356년)
원은 일본 원정에 고려를 동원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폐지와 설치를 거듭하다가 충렬왕 11년 이후 계속 유지했다. 정동행성의 장관인 좌승상(左丞相)에는 고려 국왕이 임명되었고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기구였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라. 영토상실
⑴ 쌍썽총관부(雙城摠管府, 1258~1358년)
고종 45년 1258년 조휘(趙暉), 탁청(卓靑)이 도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면서 설치되었다가 공민왕 5년 1358년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⑵ 동녕부(東寧府, 1270~1290년)
원종 11년 1270년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정령(李廷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등이 임연(林衍)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이를 토벌하다는 구실로 원나라에 투행했다가 충렬왕 16년 1290년에 회복하였다.
⑶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1301)
원종 15년 1273년 삼별초난을 진압한후 설치하였다가 충렬왕27년 1301년에 회복하였다.
마. 인적 물적 수탈
⑴ 인적 수탈
공녀(처녀, 寡婦處女推考別監[과부처녀추고별감]), 내시(환관) 등을 요구했다.
⑵ 물적 수탈
금, 은, 포백, 자기, 호피, 인삼, 해동청(海東靑, 매, 鷹坊[응방]) 등의 물품을 수탈했다.
바. 원 문화의 영향
⑴ 몽고풍과 고려양의 유행
변발, 호복, 조혼, 족두리, 연지 등의 몽고풍속이 고려에서 유행하였고 원에서는 고려쌈 등이 유행하였다.
⑵ 자주성 손상
⑶ 문물의 전래
원을 통하여 성리학, 화약, 서양문물이 전래되었다.
역대 국왕들의 왕권강화를 위한 신진세력 및 정권소외세력 등용
1. 고려 光宗의 과거합격자들의 활동
2. 고려 忠宣王 즉위년(충령왕원년, 1298) 사림원(詞林院) 신진학자들의 개혁운동
3. 고려 忠穆王 3년(1347년) 整治都監의 개혁운동
4. 고려 恭愍王 신진사대부의 정계진출
5. 조선 成宗 士林勢力의 등용
6. 조선 中宗 趙光祖의 등용
7. 조선 正祖 남인계열의 등용
8. 조선 高宗 大院君의 四色登用
6. 공민왕(恭愍王, 1351~1374)의 자주성 회복운동
가. 시기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적극적인 반원활동이 가능했다.
나. 반원정책
⑴ 몽골식의 폐지
몽골식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었다.
⑵ 부원세력의 숙청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 부원세력을 처형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⑶ 관제복구
원 간섭으로 격하된 관제를 복구했다.
⑷ 영토회복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며 요동지방을 세 차례 공격하였다.
⑸ 친명정책 추진
종래의 친원정책을 버리고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다. 내정개혁
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와 재정수입 기반 확보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⑵ 신돈 등용과 개혁
승려인 신돈(辛旽, 遍照, ~1371)을 국사로 삼고 진평후, 판서문관사(음양관)에 봉하고 삼중대광령도첨의(三重大匡領都僉議)란 직을 제수하여 국가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공민왕 15년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었다.
⑶ 권문세족의 숙청과 한미한 자의 등용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 (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등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한미(寒微)한 자를 등용하였다.
⑷ 정방(政房) 폐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다.
⑸ 성균관 재정비와 사대부 육성
왕 16년 1367년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신진사대부를 육성하였다.
라. 개혁의 실패
권문세력의 반발로 신돈이 1371년 제거되고 공민왕이 최만생등에게 살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7.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가 권문세족(權門勢族)
⑴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
원의 환관으로 파견되어 고려에 돌아와 권력을 잡은 이숙, 방신우, 원에 세자를 수행한 측근들이다.
⑵ 권문세족의 범위
기존의 문벌귀족, 원왕실과 결혼한 가문(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역인(조인규(趙仁規), 류청신(柳淸臣)), 응방(鷹坊) 출신(윤수(尹秀), 원경(元卿), 이정(李貞), 박의(朴義)) 원나라에 입조하는 국왕을 수행하는 공신, 원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겁령구(怯令口, 인후(仁侯). 장순룡(張舜龍)), 원으로부터 군사직 만호(萬戶)를 얻어 출세한 경우 등이 포함되었었다.
⑶ 토지 침탈을 토한 농장경영과 부 축적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통해 농장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⑴ 신진사대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학자적 관료로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지방의 향리 출신과 중앙의 이직자(吏職者)가 많았다.
⑵ 지방의 중소지주로서 성장했다.
⑶ 학문적 소양을 쌓아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했다.
⑷ 고려 후기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8. 고려의 멸망
가. 국제정세의 변화
⑴ 왜구와 홍건적의 창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대립 상황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다. 이것은 원명교체기에 따른 영향이다.
① 홍건적(紅巾賊)
원명교체기에 한인 반란군의 하나인 홍건적이 공민왕 8년 1359년과 10년 1361년 2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다. 2차 침입때는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몽진(蒙塵)하였으며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무찔렀다.
회차 | 연도 | 내용 |
1차 침입 | 공민왕 8년 1359년 12월 | 모거경 등 4만명 침입. 이승경, 이방실 등이 무찌름 |
2차 침입 | 공민왕 10년 1361년 11월 | 주원수, 반성, 사유, 관선생 등 10만명 침입. 개경 함락되고 공민왕 복주(안동) 피난. 정세운, 안우, 이방실, 이성계, 최영 등이 무찌름 |
홍건적의 격퇴
1359년 제1차 홍건적 격퇴 서경(이방경, 이승훈)
1361년 제2차 홍건적 격퇴 화주(정세운, 이성계)
② 왜구(倭寇)
⒜왜구의 출몰
고종때부터 연해 주변에 출몰했고 조운(漕運) 등이 끊겨 중앙재정이 곤란해졌다.
⒝ 왜구의 격퇴
최선(崔禪), 양관(梁琯) | 충정왕 2년 1350년 2월 왜구가 고성(固成), 죽림(竹林), 거제(巨濟), 합포(合浦. 마산)에 합포천호(合浦千戶) 최선(崔禪), 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싸워 이를 쳐부수고 삼백여명을 죽였다. |
최영(崔瑩) | 우왕 2년 1376년 홍산대첩 |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 우왕 6년 1380년 8월 진포대첩 |
이성계(李成桂), 변안렬(邊安烈) | 우왕 6년 1380년 9월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
정지(鄭地) | 우왕 9년 1383년 관음포대첩 |
박위(朴葳) | 창왕 1년 1389년 쓰시마(對馬島)정벌 |
우왕 2년 1376년 崔瑩 홍산대첩
우왕 6년 1380년 8월 崔茂宣 진포대첩
우왕 6년 1380년 9월 李成桂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우왕 9년 1383년 鄭地 관음포대첩
창왕 1년 1389년 朴葳 쓰시마(對馬島)정벌
태조 5년 1396년 김사형(金士衡)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이종무(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⑵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
① 명 나라의 등장
곽자흥(郭子興)의 부장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남경(金陵)에 명(明)을 건국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일부로서 친명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다.
② 철령위(鐵嶺衛) 문제와 위화도회군
명은 원의 쌍성총관부하에 있던 철령 이북 땅을 명이 직속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분개하여 요동지방을 수복하려 했다.
③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고려는 친원세력과 친명세력간의 큰 변화가 있었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명령했다. 우왕 14년 1388년 최영(崔瑩)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을 시도하려하자 이성계가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하다가 마지 못해 출병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이소역대 (以少逆大)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이소역대(以小逆大)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거국원정 왜승기허(擧國遠征 倭乘其虛)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나. 이성계의 집권
⑴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⑵ 과전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역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⑶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나. 이성계의 집권
⑴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⑵ 과전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역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⑶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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