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농사직설』의 출간을 통해 조도의 수경 직파법을 위시한 경상도의 선진적인 수전 농업기술을 전국으로 확대하려는 욕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렇지만 『농사직설』 편찬 이후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지역은 경상도였다. 농서 편찬을 계기로 일부지역에서만 행해졌던 수경 직파법이 1440년대까지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만침내 완료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수경 직파법은 이후 시기를 달리하면서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세종 대 후반까지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된 수경 직파법은 문종, 세조 대를 경과하면서 전라도, 충청도까지 확대되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남부 지역까지 도달했다. 경상도는 전라, 충청도보다는 20여 년, 경기도 보다는 50여 년 가량 앞섰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도는 성종 대까지도 선진적인 농업지대로 인식되었다. 1470년(성종 원년) 당대 대표적인 權臣 韓明澮는 堤堰司의 설치를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경상도의 수리 상황을 들고 있다. “경상도는 백성들이 영농에 힘쓰는 것이 다른 도보다 갑절이나 되어, 제언이나 천방을 설치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 중심 이동』p80, 태학사, 김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