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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로마 제국
1.2.1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로마 제국
2세기, 소아시아 지역인 사르데스의 멜리톤(Melito) 주교가 그리스도교 박해의 부당성을 알리는 편지를, 뛰어난 지식을 갖춘 철학자로도 유명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에게 써 보냈다.
로마 제국, 복음을 위한 준비
지금의 우리 종교는 비(非)로마인들 사이에서 먼저 생겨났지만,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께서 훌륭하게 통치하실 때에 당신의 백성들(로마인) 사이에 전파되었고, 특히 폐하의 로마 제국에 선익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로마가 날로 커지고 빛났습니다. 황제께서 이 바람직한 유산을 물려받으셨습니다. 로마 제국과 함께 생겨났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치하에서 개화된 이 종교를 보존하신다면, 황제의 아드님께서도 이 유산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선대 황제들은 다른 종교의 의식뿐만 아니라 우리 종교의 의식도 존중했습니다. 우리의 가르침이 로마 제국의 복된 시작과 함께 꽃피기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이후로는 어떤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이의 기도에 힘입어 제국이 빛나고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
‘사르데스의 멜리톤 주교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약 170년경)’을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4,26,7~8에서 인용.
이 편지에서 멜리톤은 박해를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교의는 삶의 방식, 즉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멜리톤은 로마 제국의 출현과 그리스도교의 출현 사이에는 하느님의 섭리의 일관성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예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시대에 태어났고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시대에 가르쳤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은 함께 꽃피운 것이고,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이 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은 복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다는 인식은 그 이후에도 가끔 표명되었다. 파스칼(Pascal)과 페귀(Peguy)가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다.
다리우스와 키루스(페르시아의 왕들),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인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헤로데가 복음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지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라
파스칼, 《팡세(Pensees)》, 701.
황제의 군대가 갈리아 지방 깊숙한 곳에서부터 멤피스 기슭까지 황제를 위해 진군했다. 모든 사람들이 신성한 신의 아들의 발자국을 따라 길을 찾아갔다. 그는 한밤중에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는 스토아학파를 상속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로마의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월계수로 만든 승리의 관을 상속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모든 인간의 노고를 상속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상속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그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상속하기 위해서 왔고, 그 세상을 다시금 젊게 만들기 위해서 왔다. 샤를르 페귀, 《전야(Eve)》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읽을 때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그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교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성경의 바탕이 된 셈족 세계에서 발달해서 로마 제국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소리를 들은 뒤에 가장 중요한 지역을 복음화했고(사도 16,9 참조) 복음은 이내 페르시아와, 어쩌면 인도에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군사적 장벽 때문에 이들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서방 지역에서는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장애 없이 사람과 문물과 사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서 형성된 지리적·물질적 이점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까지 그리스도교라고 특징지어지는 사고방식과 표현 방식들도 이용했다. 그리하여 15세기 말경, 즉 신대륙 발견 이후에,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로마 약사
기원전 753년에 세워진 로마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로서,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연안을 정복했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기원전 50년경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정복했으며, 기원전 30년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합병했다. 처음에는 단지 조그만 도시에 불과하던 로마의 통치 제도는 공화정이었는데, 이 제도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옥타비아누스는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 새로운 통치 제도를 만들어 나갔다. 그것이 기원전 27년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이었다. 로마 제국의 시민(princeps, 군주)이 황제(imperator, 개선 장군)라는 칭호와 카이사르(Caesar,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라는 칭호를 가졌고, 이를 후임자에게 전수했다. 내전이 끝나자 로마에는 평화가 정착되었다. 흔히 로마 제국의 평화 시기에 예수께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지중해 연안은 그때부터 정치적·행정적으로 일치성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런던과 예루살렘 사이를 여행하려면 많은 나라의 국경을 통과해야 하고, 때로는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하게도 되지만, 1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나라에서 살았다. 로마 제국은 속주(屬州, provincia)로 나누어져 있었고, 로마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나 원로원이 속주의 통치자들을 임명했다. 이 통치자들에는 전임 집정관(proconsul), 대사(legatus, 군 지휘관), 총독(praefectus) 혹은 재정 담당관(procurator)7)이 있었다. 아주 멀고 외진 지역에서는 몇몇 왕들이 통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의 권한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 지역에서 독립하려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지역의 통치자는 즉시 로마의 관리들로 교체되었다. 신약 성경에도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루카 3,1-3; 사도 13,6-7; 18,12; 23,26; 24,27 등). 도처에 설치된 주둔지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일종의 법률적인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 법이 재정되었다.
7)집정관(consul), 집정관 대리, 대사, 재정 담당관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지역과 경우에 따라 이 단어들이 총독 혹은 통치자 등으로 번역된다. 집정관을 역임한 이들 가운데서 전임 집정관을 뽑아 속주의 통치자로 1년간 일하게 했다. 전임 집정관은 집정관의 권한을 상당 부분 가졌다.
그런데 로마 황제의 계승에 대한 명백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비록 역사가들의 한담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우리는 칼리쿨라와 네로 같은 포악한 황제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반면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같은 아주 훌륭한 황제들도 있었다. 한편,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2세기 안토니우스 왕조(트라야누스 황제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 시기였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
로마 제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있던 나라들은 도시 국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처럼 소아시아나 시칠리아도 도시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과 후계자들이 이들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때부터 독립성을 잃어버렸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도 독립성이 없었다. 하지만 행정적으로는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했다. 일반적으로 한 도시 국가의 범위는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포함한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는 코린토에서 형성된 하느님의 교회(1코린 1,2 참조),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설립한 테살로니카 교회(1테살 1,1 참조) 등에서 보듯이 도시 종교로서 지역 공동체였다.
잘 정비된 교통망
로마 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사람이 이동하거나 물건을 옮길 때에는 육로뿐 아니라 해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길들을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로마 제국의 교통수단
도로망 연결
오늘날 이탈리아에 있는 철도망은 주로 도로망 연결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탈리아에 있는 거의 모든 도로망의 기원은 공화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도로들의 이름은 대개 그것을 만든 통치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황제들의 주된 의무 중 하나는 각 속주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진 도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로마에서 브린디시까지의 ‘아피아 가도’
- 로마에서 제노바까지의 ‘아우렐리아 가도’
- 이탈리아에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경유해서 스페인까지 가는 ‘도미티아 가도’
- 두라초에서 비잔티움까지의 ‘에냐티아 가도’
마차의 무게는 마구(馬具)가 부족했기 때문에 엄격히 제한되었다. 마차는 500㎏을 넘을 수가 없었고, 물건을 운송하는 마차는 하루에 30㎞를 갈 수 있었다. 개인 우편물은 하루에 60㎞ 이상을 갈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우편물은 하루 종일 150㎞를 달렸다. 따라서 황제 우편물에 비해서 일반 우편물은 훨씬 더디게 전달되었다.
항해
가끔 해로(海路)가 육로보다 더 선호되었다. 왜냐하면 작은 배라 할지라도 수백 톤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곡물 운반선은 1천 톤을 운송할 수 있었다. 한편 바오로가 “276명의 승객을 운반하는” 여객선을 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사도 27,37 참조). 하지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바오로가 “600명의 승객을 운반하는” 배를 탔다고 기록했다(《자서전》 15).
11월부터 3월까지는 바다 여행을 할 수 없었고, 뱃사람들은 폭풍이나 장기간의 무풍 상태나 해적들에 의해서 많은 희생을 당했다. 따라서 바다 여행의 기간은 굉장히 변수가 많았다.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바다 여행의 기간은 다음과 같다.
- 포쭈올라(나폴리 근처)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9일이 걸렸고,
- 시칠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6일이 걸렸고,
- 카디스에서 오스티아까지 7일이 걸렸고,
- 아프리카에서 오스티아까지 2일이 걸렸고,
- 나르보넨시스에서 오스티아까지 3일이 걸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해는 앞에서 언급한 기간보다 훨씬 더 걸렸다. 때로는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수개월을 보냈다(바오로의 여행 참조).
당시 항해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이루어졌지만, 홍해를 거쳐 인도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이때 선원들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7월과 2월 사이에 인도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리옹에서 발견된 시리아 상인의 비문은 시리아 상인들이 상인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자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상인과 복음 선포자
이곳에 묻힌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의 업적이 적힌 비문을 읽어라.
여기 잠든 사람은 성이 에우테크니오스이고 이름이 율리아노스이다. 그는 라오디케아(Laodicea) 지방 출신으로 시리아가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부친은 아주 유명했지만 모친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한 몫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시리아 사람이었지만, 켈트족에게 말을 할 때는 유창한 켈트어를 구사하여 많은 켈트족을 설득했다. 많은 나라를 여행한 그는 수많은 사람을 알고 지냈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자기 영혼의 강인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파도와 바다에 맞서 싸우면서 동방에 전해진 하느님의 복음 말씀을 켈트족과 서방 땅에 전파했다. 그는 이 일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켈트족의 세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 …
1972년 리옹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비문(3세기 초로 추정).
《학자들의 신문(Journal des Savants)》(1975년), 60쪽에서 인용.
바오로도 해로와 육로를 따라 전도 여행을 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는 고대 세계의 항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도 여행지의 여건에 따라, 바오로는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쉽게 전도 여행을 하기도 했다.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5-27).
먼저 육로와 계곡과 주요 도로망을 따라서 모든 항구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갈리아 지방에서 출발한 바닷길이 이를 지방에서 끝나고, 그곳에서 다시 뱃길을 따라 론 강과 손 강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저 멀리 게르마니아 지방까지 갔다. 사람들은 철학을 배우러 아테네로, 의학을 공부하러 페르가몬으로 가는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구경하러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리와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노예들은 먼 나라로 팔려 갔다. 복음 선포자들은 여행객들이 자주 드나들던 큰 도시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당시의 여행은 아주 위험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따라서 손님 접대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신약 성경의 작품들과 그 이후 작품들은 손님 접대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로마와 같은 큰 도시에서는 고향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중국 혹은 폴란드 사람들이 영국이나 미국의 큰 도시에서 모여 사는 것처럼, 당시의 큰 도시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유다인들도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복음은 지방의 회당에서도 선포되었는데 그리스도교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디다케(Didache)》(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복음을 제멋대로 선포하는 떠돌이 식객들을 조심하라고 권고한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디다케》, 11,4-5).
당시의 우편 제도는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편지를 가지고 다녔다. 리옹에서 에페소로 편지 한 통이 전달되는 데는 수개월이 걸렸다.
문화적 단일성
로마 제국은 다양한 나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었다. 각 나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관습과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었다. 팔레스티나에 있었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했고 다른 사람들은 시리아어와 같은 셈어를 사용했다. 갈리아 지방에서는 켈트어를, 아프리카에서는 베르베르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구어로 사용되던 그리스어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동방 지역에서 공용어가 되었다. 많은 방언 대신에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코이네’라고 불리는 그리스어는 ‘평범한 언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는 문화와 철학의 언어였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사용하는 국제어이기도 했다. 동방의 큰 도시들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가장 익숙한 언어는 그리스어로서, 프랑스의 리옹에서는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그리스어는 마치 오늘날의 영어와 같았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그리스어는 중요한 언어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다인의 성경 《셉투아진타(Septuaginta)》(칠십인역)을 사용했고 신약 성경도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문헌과 전례서들이 그리스어로 쓰였다. 로마에서는 3세기까지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로마의 언어이자 당시 서방의 언어였던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법과 질서의 언어였다. 2세기 말경, 처음에는 아프리카에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 로마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3세기에는 서방 그리스도교 전역에서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교회 안에서는 라틴어가 보통 언어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특별한 사고방식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로마법은 라틴어를 통해 서방 공동체를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엄격히 구분되었다. 이 두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서로 다르게 발전하면서 그리스 세계와 라틴 세계로 구분되었다.
1.2.2 종교적인 불안감 때문에 수용이 용이해진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 메시지는 다양한 종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 종교는 복음 메시지에 상반되지만, 그리스도교의 계시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이를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고대 종교 생활을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전통 종교
전통 종교는 도시 종교와 마을 종교로 구분된다. 주로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는 자연 종교였던 마을 종교는 계속해서 번창했다. 마을 종교에는 자연, 땅 그리고 짐승들의 풍요를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종교로 추수를 관장하는 신, 양 떼를 돌보는 신, 물을 공급하는 신이 있었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어 마을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자, 이들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흡수되거나 당시 성행하던 민간전승 종교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스 지역의 도시든 라틴 지역의 도시든 모든 도시에는 그 도시의 고유한 전통 종교의 신들이 있었다.
전통 종교
로마의 저술가이자 정치가였던 타키투스(Tacitus, 기원전 55년경~120년경)는 그의 저서 《역사》와 《역대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 책들에는 주피터, 주노, 미네르바 등 로마의 세 수호신들의 신전인 카피톨, 법무관과 신전 여사제들과 제관과 희생 제물의 장기를 검사하는 장복관(腸卜官)들, 복스러운 물건들과 자질구레한 의식 소개 등 로마 종교의 여러 가지 특징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후 70년에 카피톨을 재건하여 봉헌하다
6월 21일(기원후 70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카피톨 신전 일대가 온통 리본과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서로운 이름을 가진 군인들이 복스러운 나뭇가지를 들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베스타 여사제들이 부모가 생존해 있는 소년 소녀들을 대동한 채, 샘과 도랑에서 길러온 물을 신전 경내에 뿌렸다. 그런 다음, 법무관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Helvidius Priscus)가 제관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Plautius Aelianus)의 인도를 받으며, 돼지·양·황소를 제물로 바쳐 경내를 정화한 뒤, 잔디로 뒤덮인 흙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의 장기들을 올려놓고, 주피터와 주노와 미네르바 그리고 제국을 수호하는 신들에게 기도를 바쳤다. “오늘 착공하는 이 공사가 잘 되게 하시고, 저희 인간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짖기 시작한 수호신들의 거처가 신들의 가호로 다시 우뚝서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한 뒤, 법무관이 밧줄을 휘감은 채 초석(楚石)과 연결되어 있던 리본을 손으로 만졌다. 그러자 다른 정무관, 사제, 원로원 의원, 기사와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지르면서 힘을 합쳐, 그 큰 초석을 끌어당겼다. 사람들이 금화와 은화 그리고 한 번도 용광로에서 정제된 적이 없는 천연 원광석들을 신전 토대 위로 사방에서 던졌다. 복장사들은,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돌이나 금을 던져 넣는 것은 신전을 오염시키는 행위하고 경고했다. 새 신전은 옛 신전보다도 더 높게 세워졌다. 그것에 종법(宗法)상 허용된 유일한 변경 사항이었다. 옛 신전은 웅장함이 덜했다.
타키투스, 《역사(Historiae)》, 4,53.
프티(P Petit), 《우리 시대의 첫 세기(Le premier Siecle de notre ere)》,
264쪽에서 인용.
그러나 이 도시들이 정복당하면서, 각 도시의 고유한 신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로 점차 바뀌어 갔다. 그래서 제우스(그리스)-주피터(로마), 헤르메스(그리스)-머큐리(로마), 포세이돈(그리스)-넵튠(로마) 등과 같은 비교가 가능해졌다. 점령당한 도시들이 독립성을 잃게 되자 그 도시들의 종교마저도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도시의 종교들은 ‘내가 네게 주었으니 너도 나한테 주어야 한다(do ut des)’와 같은 의례적인 형식이 되어, 더는 사람들의 정신을 계몽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갖고 있던 참종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이 종교들은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종교들에 충실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종교는 대대로 물려받은 하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런 종교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부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런 종교들이야말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윤활유 역할을 해 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시의 종교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행동이었다.
어느 이방인의 비문
…여행자는 다음 경구를 소홀히 하지 마라. 더 멀리 가기 전에 멈추어 서서 듣고 배워라. 하데스8)에는 배도 없고 나루지기 카론도 없으며, 열쇠를 보호하는 아이아스9)도 없고 사냥개 케르베루스10)도 없다. 죽은 자는 이곳에 뼈와 재만 남겼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옳다고. 여행자여, 계속해서 가거라. 죽은 주제에 내가 너무 수다를 떨어서야 되겠는가.
향수와 화관을 보낼 장소도 없지만 돌 하나는 있다. 그러나 불을 피우지 마라. 쓸데없는 짓이다. 만일 그대에게 뭔가 있다면,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것을 내게도 나누어 다오. 하지만 내 무덤 위에 술을 따르지 말아라. 죽은 자가 마실 수 있겠는가.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대는 내 무덤에 흙을 덮으면서 나에게 말할 것이다. “아, 나는 마침내 내가 아니었을 때의 나의 옛 모습(無)을 되찾았네.”
1세기 그리스어 비문.
프티,《우리 시대의 첫 세기》, 263쪽에서 인용.
8)하데스는 죽은 자의 혼이 있는 곳이다.
9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10)케르베루스는 지옥문을 지키는 개인데, 머리가 셋이고 꼬리는 뱀이다.
황제 숭배
황제 숭배는 동방에서 시작되었다. 동방에서 그리스 군주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은 오래전부터 황제 숭배를 강조했다. 황제 숭배 사상이 서방에 들어오자, 로마 제국의 왕제들도 황제 숭배를 강조했는데 사람들은 이 사상을 낯선 것으로 생각했다.
황제 숭배
…그리고 관리에게 첫째 ‘아우구스투스(카이사르의 아버지)’의 신상을 세우게 하고, 둘째 그 오른쪽에 율리아 아우구스타(리비아, 아우구스투스의 약혼녀)의 신상을 세우게 하고, 셋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신상을 세우게 하고, 관리에게 여러 신상들의 재료를 제공한 도시를 건설하게 한다. 그러고 나서 관리에게 극장 한 가운데에 탁자와 분향대를 세우게 한 뒤, 배우들이 도착하기 전에 원로원들과 관리들에게 왕자들의 안전을 위해 분향하게 한다. …
기원전 14~15년의 그리스어 비문(티베리우스 황제 초기)
프티, 《우리 시개의 첫 세기》, 125쪽에서 인용.
황제 숭배는 일종의 정치적인 종교나 마찬가지로, 마치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황제들은 오늘날의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비록 몇몇 황제들에게는 과대망상증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황제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편, 동방의 속주들에서는 황제가 생존하는 동안에 그 황제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로마에서는 황제가 죽은 뒤에야 황제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충성 행위였다. 3세기까지는 황제 숭배가 의무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통치자와 군인들만이 황제 숭배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그들을 결사반대했다. 그리스도인은 황제를 퀴리오스(주님)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만을 퀴리오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형태의 종교’
그리스도교가 시작되던 무렵에 영성 생활을 한 이들에게 해당하는 칭호가 ‘두 번째 형태의 종교’다. 로마 제국의 많은 사람들(노예, 군인, 관리)이 몰락하게 되는데 이들은 도시와 자연의 신들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회의론에 빠지고 또 다른 이들은 위안을 주는 신들을 찾아다녔다.
철학
대부분의 철학이 서서히 유일신론적인 방향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요구하고 다양한 것을 제공하는 종교 형태로 발전해 갔다.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라고 가르치는 스토아학파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스토아학파
신들을 찬미하기 위해 창조된 인간
프리기아 출신의 에픽테투스(Epictetus, 50년경~약 125년경)는 노예 신분으로 로마에 팔려 왔다. 그러나 자유를 얻어 노예 상태에서 풀려난 그는 로마에서 스토아학파의 철학 학교를 개설했다. 그 뒤 그는 그리스와 나폴리로 갔다. 그는 노예였을 때 당한 모진 고문과 고통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아누스가 그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했다.
네가 앞을 못 보는 봉사가 되었기 때문에, 네가 해야 할 이 직무를 대신해 주고 너를 위해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늙고 절름발이인 내가 신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만일 내가 나이팅게일(밤꾀꼬리)이라면, 나는 나이팅게일처럼 노래를 부를 것이다. 만일 내가 백조라면, 나는 백조처럼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내가 비록 나이팅게일도 백조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성을 지닌 존재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나는 이 일을 하겠다. 나는 이 자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 일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이 일을 해 내겠다. 나와 함께 이 찬미의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네게 권한다.
에픽테투스,《어록(語錄)》, 1,16,19~21.
스토아학파는 종교와 고대의 다신교를 심리학적·개인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의 신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21년에 로마에서 태어나서 161년에 황제가 되어 180년까지 재위했다. 이민족과 전쟁을 하다가 비엔나(빈)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고결한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순교자들이야말로 ‘골수 반항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도 로마인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하고 단순한 위엄을 지녀야 하며, 사랑과 자유와 정의감을 갖고 주어진 일을 처리하고, 모든 잡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충실히 사고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온갖 부주의와 이성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감정적인 반항과 모든 위선과 이기심을 떨쳐 버리고,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을 버리고, 오늘 그대에게 주어진 삶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생활한다면, 그대는 스스로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관성은 아주 신성하다.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결합해서 동일한 우주 질서를 형성한다. 만물로 구성된 유일한 우주, 만물을 섭리하는 유일한 신, 유일한 실체, 유일한 법칙, 모든 이성적 동물의 공통된 유일한 이성, 유일한 진리가 있을 뿐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Meditationes)》, 2,5; 7,9.
결국 다양한 신들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신성을 말하고 있었다. 스토아학파는 예식에 충실하면서도 도덕적인 정화를 강조했다.
동방 종교 혹은 신비 종교
새롭게 소개된 동방 종교나 신비 종교들이 인구 밀집 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노예, 군인, 관리들이 소아시아의 종교나 이집트의 종교를 로마와 서유럽 전역에 전파시켰다. 비탄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론적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종교들을 선택했다. 이 종교들의 예식(행렬, 울림을 이용한 노래, 사람을 도취시키는 음악)은 분명 고대 종교의 예식과는 전혀 달랐다. 이 종교들은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자신들의 신비를 가르쳤다.
신비 종교
그리스 토박이인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50년경~125년경)는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 많은 지역을 두루 여행한 그는 도덕주의자요, 철학자였다. 델피에 있는 사제 학교에서 수학했고, 특히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위대한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처럼, 영혼은 죽는 순간에 위대한 신비를 체험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이리저리 떠도는 고통스런 방황이며 어둠 속을 헤매는, 끊임없이 마음을 불안케 하는 여행이다. 게다가 이 같은 여행의 끝자락에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공포가 덮쳐 온다. 몸서리쳐지는 전율과 두려움이 엄습헤 오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공포에 짓눌린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놀라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빛이 쏟아진다. 우리는 푸른 풀이 우거지고 신선한 공기가 가득한 곳으로 나아간다. 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룩한 말씀과 신의 모습이 종교적인 존경심을 한층 고조시킨다.
고러자 완전 상태에 들어선 신비 종교의 입문자는 머리에 왕관을 쓴 채 자유롭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이 신비로운 현상을 찬미한다. 그는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땅 위에 있는, 신비 종교에 아직 입문하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에 비친다. 그들은 어둠의 수렁에서 서로 때리고 짓밟고 싸우고 있다. 그들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의 공포 속에서 끊임없이 사악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혼론》.
드 플라스(E. Des Palces),《그리스 종교(La religion grecque)》(1969년), 213~214쪽에서 인용.
이 같은 신비 전수를 통해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신을 만났다. 이들을 자신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거쳐 깨끗해졌고 구원받은 특권층에 속한다고 믿었다. 마을 종교들은 세상만사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으나 신비 종교는 신앙에 충실한 자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새 삶을 산다고 가르쳤다.
가장 널리 대중화된 동방 종교 예식으로는 이집트 종교의 이시스 예식과 페르시아 종교의 미트라스 예식과 프리기아(소아시아)에서 만들어진 퀴벨레-앗티스 예식이 있었다. 로마의 시인은 이 종교 예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꼬집어 노래했다. “호론테스의 하수구들이 테베레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이들 새 종교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종교들이 하나의 거대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서로 일치 융합하여 하나의 보편 종교로 발전해 갔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출현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도덕을 증진하고 구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종교였다. 복음은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의 교의와도 혼합되지 않았다. 초세기의 종교계에서 그리스도교는 분명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2.3 로마 제국과 복음
선의의 협력
한 역사가는 첫 3세기의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해 설명하면서 ‘선의의 협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스-로마 문명에는 굳건한 조직과 선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은 선택받은 소수 계층에게만 혜택을 제공했다. 유명 귀족들이 그 혜택을 누리는 특권층이었다. 그들은 철학과 문학, 예술과 우정 같은 고상함과 세련함을 추구했다. 세네카와 플리니우스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금권 정치가들과 사기꾼들도 특권층에 해당했다. 그들은 큰 사업으로 돈을 벌어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면서 문란하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고 공중목욕탕을 자주 드나들면서 쾌락에 빠졌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사티리콘(Satyricon)11)에 나오는 영웅들 같았다.
약자에게 혹독했던 사회
고대 경제는 노예 제도 위에 세워졌다. 노예 제도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전문 기술 과정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비록 그리스의 과학이 중요한 발견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떤 도시는 인구의 3분의 2가 노예였다.
11)《사티리콘》은 성(性)적 타락, 사이비 종교와 미신, 하층민과 노예들의 삶, 부정부패와 귀족들의 허영과 지식인의 이중성 등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이 작품에는 네로 황제와 귀족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가득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 공연이 끝난 후 기분 전환용으로 무대에 올린 희극을 일컬어 ‘사티리콘’이라고 했다. 페트로니우스는 네로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고발당했다. 그는 결백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리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노예는 결혼을 할 수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네로 황제 때에는 노예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도 주인에게 있었다.
로마의 노예들(1세기)
노예의 이론상 신분
세네카(B.C.4년~A.D.65년)는 정치적인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어린 네로의 가정 교사였으나 네로 황제 때문에 자살했다. 스토아학파의 도덕주의자였던 세네카가 항상 자신이 말하던 신념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서, 나는 당신이 노예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이런 일은 당신처럼 현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들이 노예입니까?”“아닙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사람입니다.”“그들이 노예입니까?”“아닙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벗입니다.”“그들이 노예입니까?”“아닙니다. 그들은 겸손한 친구들입니다.”“그들이 노예입니까?”“아닙니다. 만일 노예와 자유인에게 동등한 행운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료 노예입니다.” ……
당신이 노예라고 부르는 그 사람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혈통에서 났으며, 하늘로부터 똑같은 사랑을 받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 안에서 자유인을 보는 것처럼, 그 사람도 당신 안에서 노예를 볼 수 있습니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47.
노예의 비참한 현실
얼마 뒤(기원후 61년)에 페다니우스(Pedanius) 세쿤두스(Secundus) 수도 경비대장이 자신의 노예한테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이유는 노예에게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어린 미동(美童, 남색의 상대를 뜻함)을 성추행한 죄를 인정하면서도 미동의 주인이 요구한 것을 거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습에 따르면, 이런 경우 대개는 범인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는 모든 노예들은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모여든 성난 군중이 무고한 노예들의 목숨을 보호하고자 폭동을 일으켰다. 원로원에서 조차도 이런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이 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
사형을 지지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사형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난 군중이 돌멩이와 횃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황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군중을 비난하면서 무장 군인들을 도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게 한 뒤, 군인들로 하여금 사형수들을 사형장으로 끌고 가게 했다. ……
타키투스, 《연대기》, 14,42~45.
스토아학파는 추종자들에게 노예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인간으로 대접하라고 가르쳤지만 대부분의 스토아학파 추종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단지 몇몇 노예들만이 주인에게서 해방되어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더라도, 결코 다른 자유인과 똑같은 자격을 누리지 못했다.
속주에서는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 이론상으로 로마 시민은 누구나 정의를 위해 황제에게 제소할 수 있었다. 바오로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사도 25,12; 26,32 참조).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이라 할지라도 항상 로마 시민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로마 시민은 두 그룹(귀족 계급과 열등 계급)으로 나뉘었다. 사회적 신분과 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이 같은 구별이 이루어졌는데 신분에 따라서 법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로마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굶주리고 헐벗었다. 이들은 단지 무료로 배급되는 옥수수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원형 경기장에서 서커스 경기를 관람하는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라는 말이 생겨났다.
여자와 어린이
그리스-로마 문명의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해방이라는 주제가 공론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어떤 시인은 여자들에 대해 “여자들은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이혼한다.”라고 풍자했다. 하지만 이혼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는 단지 돈 많은 여자들에게만 해당했다. 가난한 여자들은 남편이 죽으면 어쩔 수 없이 매춘부로 전락했다. 이 같은 도덕적 몰락은 이미 도덕적으로 몰락해 버린 여자들에게 또다시 도덕적인 몰락을 강요했다. 한편, 여자들에 비해서 어린이들의 처지는 훨씬 더 안 좋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이를 받아들이길 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영아는 즉시 살해되거나 길거리에 내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설사 이 같은 가혹 행위로부터 살아남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자라면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교육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이를 노예로 길러 내는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 제국과 역동적인 복음의 만남
로마 제국이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에 복음이 재빨리 전파될 수 있었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복음이 이처럼 빠르게 전파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복음이 재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초세기 사람들이 지닌 욕구를 복음이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혁명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고, 또한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특히 적대적인 세상에서 버림받은 채로 살아가던 노예들과 가난한 이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쉽사리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시대적인 현상들을 거슬러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해 나가는 데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소수 특권층에만 유보된 종교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리스도교가 또 하나의 종교로 취급받거나 비춰지는 것을 얼마나 거부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성의 문란과 극도의 사치와 탐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복음이 주장하는 도덕적인 가르침은 로마 제국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어 버린 이런 현상들을 반대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을 신성화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특징은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수백 년간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특징 때문에, 로마 제국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