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사도 바오로의 생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평소에 대체로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비극적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이 있고 나서 예루살렘에 창립된 원시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유다 지역에 사는 유다인들에게만 전도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적 종교인 유다교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개혁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36년경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교 대표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했다(사도 8,26-40).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라 하겠다. 물론 그 전에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했고(사도 8,26-40), 베드로가 카이사리아로 가서 코르넬리우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 10,34-48),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에 불과하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공은 이무래도 바르나바와 바오로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본 다음(사도 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특히 바오로는 세 차례 광범한 전도 여행을 했다(사도 13,1-21,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오로야말로 그리스도교 창시자라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이는 물론 과장이지만, 바오로가 예수님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선전한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다. 바오로의 생애를 엮자면 우선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을 참고해야 한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따르는 신약학계에서는 테살로니카 1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와 로마서, 필리피서와 필레몬서 등 일곱 편을 친서로 여긴다. 그밖에도 바오로가 썼다는 편지가 있으나, 이것들은 친서가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존경한 후학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펴낸 작품이라는 것이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곧, 테살로니카 2서, 콜로새서와 에페소서, 티모테오 1·2서와 티토서는 위서라는 것이다. 이 여섯 작품이 비록 위서이기는 하지만 바오로의 사상을 계승한 것인 만큼, 사료 가치가 친서보다는 떨어지지만 사도의 영향을 밝히려면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료로 사도행전을 꼽는다. 그 9장과 13-28장에서 바오로의 개종과 활약상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필자는 바오로를 상면한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에 관해 수집한 정보 가운데는 오 보도 더러 있었다. 특히 그는 바오로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묘사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바오로 친서에서 바오로의 사건을 다루면서 같은 사건을 상반되게 서술한 경우에는 사도행전을 제쳐놓고 바오로 자신의 증언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바오로는 되도록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알리는데 전심전력한 까닭에(2코린 4,5) 그의 친서들에 따라 그의 생애를 엮기는 지극히 어렵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카는 사도 9장과 13-28장에서 바오로의 활약상을 일관된 이야기로 꾸며 놓은 까닭에 사도행전에 따라 바오로의 활약상을 서술하기란 쉬운 편이다. 이 때문에, 바오로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흔히 사도행전을 따르게 된다. 사도행전이 사료로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에 관한 사료를 포괄적으로 참조하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제법 자세히 밝힐 수 있다. 물론 완벽하게 구명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신약성서 인물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바오로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보다도 바오로의 생애와 사상이 더 잘 드러난다.
출생 연도
36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 7,58). 그리고 56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는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9절). 바오로의 출생 연도 또는 나이를 가늠케 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 인데, 젊은이와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출생 연도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주후 5~10년 사이에 출생했으리라고 말하곤 하는데, 역시 막연한 추정에 불과하다.
출생지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사도 9,11; 21,39; 22,3). 타르수스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노스 강 양편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지중해에서 16㎞ 거리이다. 현재 주민은 4만 명 남짓하지만 옛날에는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치드노스 강에서 목욕하고 나서 열병으로 운명한 곳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타르수스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일례로 스토아학파의 유명한 철인들이 여기서 활약했다. 주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주전 57년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타르수스에는 많은 유다인이 이민을 와서 정착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바오로는 자연스레 헬라어와 셈족어, 헬라 문화와 셈족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타르수스에는 바오로 시대의 유적이 거의 없다. 고작 로마 시대의 성문이 남아 있는데, 흔히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고 부른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함께 타르수스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가족
바오로는 자신이 출생·할례·성장·처신 등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했다:
- 갈라 1,13-14: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 필리 3,5-6: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로마 11,1: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특기할 사항은 아버지가 유다인인데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으므로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37-38; 22,25-29; 23,27).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힐렐 율사의 손자요 당대 최고 율사인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 공부를 했다(22,3). 또한 예루살렘에는 생질이 살고 있었다(23,16).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 자신의 처지를 밝혀 “홀몸” 이라 한다(7,7-8; 9,5-6). 이는 미혼이라는 말일 수도 있고, 결혼했지만 상처했거나 별거중이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름
바오로는 친서에서 언제나 “바오로”라고 자칭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7,58-13,7에서는 “사울”이라고만 하다가, 13,9에서는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라고 동일시 한 다음, 13,13-28,25에서는 “바오로”라고만 한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에 세 차례(9,1-19; 22,3-21; 26,18) 나오는 바오로 개심기에서는 “사울”이라 일컫는다(9,4.17; 22,7.13; 26,14). 알다시피 이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울”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사울로”가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오로”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 그리고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산 까닭에 “사울(로)”와 바오로” 두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직업
바오로는 전도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다. 신세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인데다가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던 까닭이다 :
- 1테살 2,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1코린 9,4-18: “우리는 먹고 마실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 또 나와 바르나바만 따로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습니까? …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2코린 2,17; 11,7.20; 12,16도 참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는지 바오로 자신은 한 번도 밝히지 않는다. 다행히 사도 18,3에 그의 직업이 명시되어 있다. 즉,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51~52년경 그가 코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유다인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부로 말하면 49~50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에서 유다인들을 추방한 관계로 코린토로 쫓겨 와서 임시로 눌러 살다가 바오로의 전도에 큰 도움을 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 바오로는 이처럼 교우들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했지만 필리피 교우들이 주는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바오로의 무사무욕한 본심을 그들만은 늘 믿었기 때문이다(필리 4,10-20; 2코린 11,9).
건강
개심 전의 건강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지중해 각지에서 전도할 무렵에 만성적인 지병을 앓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본디 웬만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리고 주 예수님을 선포하는데 전력투구한 사도인지라 병명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고질병에 시달린 것만은 틀림없다:
- 갈라 4,13-14: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육신의 병이 계기가 되어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내 육신의 상태가 여러분에게는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여러분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역겨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받아들였습니다.”
50년경 2차 전도여행 때 오늘날의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티아 지방을 그냥 통과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발병하여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고 그 기회에 그 지방에 여러 교회를 창설했다.
- 2코린 12,7-9: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43년경에 몰아경에서 계시의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부터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갈라티아 지방 교우들이 변절하여 자기에게 큰 심려를 끼치자 바오로는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 6,17). 코린토 교우들에게 사도직의 고난에 관해 말한 단락에서도 자신의 약질을 암시한 것 같다: “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바오로가 설립한 여러 교회 가운데서 말썽을 가장 많이 피운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이 그를 깔볼 만큼 “현존하는 몸은 약했다”(2코린 10,10; 참조: 1코린 2,3).
성격과 언변
바오로는 명상에 잠겨 사는 신비가가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투사형이었다. 따라서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도 남달리 철저했고 한 번 개심한 다음에 예수님을 선전하는 데도 타의 주종을 불허했다.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요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달변가는 아니었다. 신약 시대에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 아폴로였다(사도 18,24-28). 코린토 신도들은 아폴로의 설교에 열광한 나머지 아폴로 당파를 만들 지경이었다(1코린 1,11-12; 3,4-6,22; 4,6). 아폴로와는 달리 바오로는 코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2코린 10,10). 바오로 자신도 눌변을 시인했다(2코린 11,6; 참조: 2,4).
그의 필력을 살펴보자. 바오로에 대해 비판적인 코린토 교우들조차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차다”고 평했다(2코린 10,10). 사실 바오로의 편지는 신앙 체험에서 우러난 것인지라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열적 성격의 산물이지 수사학적 논리나 기교를 부리지 않은 까닭에 전반적인 짜임새가 부족할 뿐더러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기에 주후 125년경에 기록된 베드로 2서에서는 바오로 편지의 난해성을 말한다. : “바오로의 편지들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3,16). 바오로가 에페소 감옥에서 각각 필리피 교우들과 콜로새 교우 필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는 별 수 없이 손수 썼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대필시켰다(갈라 6,11; 1코린 16,21; 로마 16,22; 참조: 2테살 3,17; 콜로 4,18).
성장 배경
바오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을 세 가지 배경으로 대별하여 약술할 수 있겠다 :
1) 유다 종교 배경 : 바오로는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다(필리 3,5: 갈라 1,14).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파에 가입했다(필리 3,5; 사도 23,6; 26,5). 사도행전에 따르면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깊이 연구하려고 예루살렘에 유학을 가서 당대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22,3).
2) 그리스 문화 배경 : 바오로는 다혈질적인 사람이라 그리스 견유학파와 스토아학파에서 애용한 대인논법對入論法(그리스어로 디아트리베)을 즐겨 썼다(갈라 5-6장; 1코린 9장: 로마 2,9.12-15). 이 논법은 적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상하고 적수의 반론에 맞서 그를 이인칭으로 부르면서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맹공하는 논법이다. 그리고 바오로가 사용한 낱말들을 살펴보면 히브리-아람어에는 없는 그리스어 낱말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자유·양심·자연·덕·의무·시민권·입양入養·이성理性 등이다 또한 유다인들은 운동 경기를 하지 않은 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무척 즐겼다. 바오로는 그리스 경기 종목에 속하는 경주와 전투의 예를 들곤 했다(1코린 9,24-27; 필리 2,16; 3,13-14).
3) 로마 정치 배경 : 태생 로마 시민인 바오로는 시민권에 따른 특전들을 누렸다. 로마 시민은 태형을 면했다. 따라서 바오로가 필리피에서 매질을 당하고 나서(사도 16,37) 또는 예루살렘에서 매질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사도 22,25) 자신의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했다. 또한 로마 시민이 지방 관청의 재판을 불신하는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60년 가을 페스투스 총독이 바오로를 유다 최고의회에 넘겨주려 하자 바오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사도 25,6-12). 또한 로마 시민은 극형을 받을 때도 십자가형과 맹수형만은 면했다. 사도 바오로는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한 듯한데, 그때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십자가형과 맹수형만은 면했을 것이다.
이처럼 바오로는 로마 제국의 혜택을 톡톡히 입었다. 그가 제국에 대해 비판적이기보다는 호의적인 발언을 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도무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던 그가 58년 초(봄) 코린토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 에서 로마 제국 정권에 대해 언급했는데, 일방적으로 친정부적 입장을 취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무모하게 정권에 도전하려는 이들이 있어 교회와 정권간의 마찰을 염려한 나머지 친정부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오로가 제국의 혜택을 남달리 입은 것도 더불어 작용했을 법하다.
교회 박해
바리사이요 율사 후보생인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율법의 실천과 연학에 몰두했다(갈라 1,13-14; 필리 3,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심히 비판한 예수(마태 5,21-48 참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고 바오로는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적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갈라 1,13.23; 1코린 15,9; 필리 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했고(7,58-8,1),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출장가기도 했다(9,1-19; 22,3-21; 26,9-18).
개심
36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갑자기 개심했다. 그의 신관이야 변할 리 만무했겠지만 그리스도관이 돌변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개심이야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자기 신상 이야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전력한 사도인지라(2코린 4,5), 그 중차대한 개심 사건조차 그저 몇 차례 간결하게 언급 또는 암시할 뿐이다:
- 갈라 1,15-16: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1코린 9,1: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 1코린 15,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 필리 3,12: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 2코린 4,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필자인 루카 복음사가는 세 번에 걸쳐 자상하게 바오로의 개심담을 소개했다(9,1-19; 22,3-21; 26,9-18). 그러나 세 가지 개심담은 실은 바오로 자신의 체험담이 아니고 루카 복음사가가 시청각적인 교육 관점에서 바오로의 개심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개심에서 1차 전도여행 직전까지(36~45년경)
바오로는 개심한 다음 주로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노선을 따랐다.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유다민족 테두리를 넘어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했다. 그는 이 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개심한 다음 우선 다마스쿠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22,16) 설교했다고 한다(9,20-22). 그 뒤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그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7-18). 아라비아(나바테아 왕국)로 간 목적은 그곳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전도는 고사하고 나바테아인들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쿠스로 피신한 것 같고, 그들이 다마스쿠스에까지 와서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서 극적으로 탈출,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케파(베드로)와 함께 지냈다. 극적 탈출 사건에 관해서는 바오로 자신이 기록을 남겼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타스 임금(아레타스 4세)의 총독이 나를 잡으려고 그 성을 지키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난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일도 있습니다.”(2코린 11,32-33; 참조: 사도 9,23-25)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케파와 예수님의 친척 야고보)를 만나보고 나서 바오로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9~43년경?) 전도했다.(갈라 1,19-24; 참조: 사도 9,30; 11,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다인과 이방인 혼성 교회를 창립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의 보조 사제인 바르나바를 파견했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일 년 동안(43~44년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 이런 사실은 바오로의 서간에는 전해오지 않고 사도 11,19-26에만 적혀 있으나 그 신빙성을 부정할 까닭은 없다.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도시였다. 로마제국에서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지방 수도로서 50만 시민이 살았으며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요즘은 발음이 조금 바뀌어 안타키아라고 하며 주민은 8만 명쯤 된다. 바오로 시대의 유적은 불행히도 전해 오지 않는다. 근교에 베드로 동굴 성당이 있지만, 바오로 시대에 안티오키아 교우들이 여기 숨어서 성찬을 집전한 것은 아니고, 십자군들이 그런 전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본디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코르넬리우스 가족에게 전도한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이었다(사도 10장).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일부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공공연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사도 11,20). 그 결과 안티오키아에는 유다인과 이방인 혼성교회가 생겨났다.
2)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안티오키아와 지중해는 오론토스 강으로 연결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지중해까지는 40리이다. 오론토스 강 하구에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항구가 있는데(사도 13,4), 바오로가 바다로 여행할 때면 그 항구를 이용하곤 했다.
3)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
4) 사도 교부 이냐시우스가 여기서 주교로 재직하다가 110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 4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총주교좌가 되었다.
1차 전도여행(45-49년경)
1차 전도여행기는 사도 13-14장에 있다. 전도사들은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콜로 4,10) 요한 마르코, 그리고 바오로. 그들은 셀레우키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파포스에서 전도했다. 파포스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항구 페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페르게에는 헬라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1만 5천 명을 수용하는 극장, 1만 2천 명이 구경 할 수 있는 경기장, 공중목욕탕, 헬라 성문, 로마 성문, 시장, 주랑대로 둥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페르게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터키 중부로 가다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사도 13,14). 오늘날의 얄바치 근교에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이 있다. 미시간 대학교 발굴팀이 여러 유적을 발굴했는데. 그 가운데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볼 만하다. 사도 13,14-52에 따르면 전도사들은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했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다인들은 불신할 뿐더러 전도사들을 추방해서 전도사들은 이코니온으로 갔다. 이코니온은 오늘날 코니아라고 하며 주민 수는 23만 명이고 바오로 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코니아는 이슬람 신비가 시인 루미(1207~1273년) 덕분에 신비주의 성지가 되었고, 12~13세기에는 강력한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현존 유적은 대부분 그 때의 것들이다. 이코니온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전도했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에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주민들이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했다(사도 14, 8-18). 리스트라는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오로의 애제자가 된 티모테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사도 16, 1-2).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 14, 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거꾸로 가면서 보살피고 나서, 아탈리아 항구에서 전도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배를 탔다(사도 14,25-26), 아탈리아는 오늘날 안딸리아로 이름이 조금 바뀌었다. 주민수는 13만명이고 기후와 물이 좋아 이름난 휴양지이다.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년 재위)의 순시를 기념해서 세운 하드리아누스 성문이 보존되어 있다. 반원형 출입구가 셋이 있는 성문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경)
1차 전도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이 입교했다. 이들에게 예수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다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에 사도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 예루살렘에 상주하던 토박이 유다계 사도들, 그리고 지중해 동부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해외 유다계 사도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다. 갈라 2, 1-10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세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1) 이방계 그리스도인은 유다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이 결의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명실 공히 독립하게 되었다).
2) 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다.
3) 예루살렘 모교회의 빈자들을 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편다(1코린 16,1-4; 2코린 8-9장; 로마 15,25-28 참조).
사도 15, 1-29에도 사도회의에 관한 기록이 전해오는 데, 그 결정사항들이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 2, 1-10)이 더 신빙성이 있다.
안티오키아 사건
갈라 2,11-14에 기록된 안티오키아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고 나서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했다.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일부는 유다인이요, 일부는 이방인이었는데. 거리낌 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을 갖곤 했다. 곧,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했다. 베드로는 두 부류 신도가 어울리는 것을 좋게 봐서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집전했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자기네 교회의 총책임자인 베드로가 ‘유다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으니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 지탄하자 그만 베드로는 겁먹은 나머지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마침내 바르나바 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끊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베드로 때문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분연히 일어나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었다. 곧, 유다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선 안 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회의 규정에 따라 바오로는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2차 전도여행(50-52년경)
2차 전도여행기는 사도 15,36-18,22에 있다. 전도사들은 양분되어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스(15,22.32.40; 16,37)는 이미 일차 전도한 바 있는 터키 남부지역을 다시 찾아갔다. 바오로는 남부지역의 리스트라에서 티모테오를 제자로 삼았다(16,1-3). 이어서 당시의 갈라티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 수도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에 갑자기 병을 앓아 여행을 중단하고 거기서 요양하게 되었다. 이처럼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티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를 창립했다(갈라 4,13-15; 사도 16,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16,8-10; 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오늘날 휴양도시 카발라)에 닿았다(16,6-11). 그리고서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리피·테살로니카·베로이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코린토 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 내륙으로 들어가 필리피에서 전도했다. 필리피 전도에 관해 사도 16,13-1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간키테스)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필리피 교회야말로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교회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필리피 전도 말기에 바오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준 관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킨다. 나중에 3차 전도여행 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무려 27개월간 머물렀는데, 한때 신앙 때문에 에페소 주둔 로마군 부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때 필리피 교우들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고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필리피서다. 주전 42년 필리피에서 로마 공화국의 운명이 판가름 났다. 율리우스 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씨우스의 로마군, 그리고 체사르 편을 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이 대회전을 벌여 후자가 승리한 곳이 바로 필리피다. 그 후 승자들끼리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다스리다가, 주전 31년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쳐 대권을 통합하고 주전 29년 로마제국의 첫 황제로 즉위했다(기원전 29~후 14년 재위). 바오로 시대에 필리피에는 주로 로마인들이 살았다. 주전 42년 대회전 다음에 제대한 로마군 퇴역 군인들이 많았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아크로폴리스 산비탈 아래에 극장, 에냐시아 국도, 광장 등이 남아있다. 바오로가 갇혀있었다는 작은 감옥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의심된다.
필리피를 떠나 바오로는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테살로니카로 가서 전도했다. 바오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다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제법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는 바람에 바오로 일행은 올림푸스 산 중에 있는, 95㎞ 떨어진 베로이아(오늘날 베리아) 마을로 피신했다(사도 17,1-10; 1테살 2,13-16). 바오로는 베로이아와 아테네를 거쳐 코린토에서 전도할 무렵에 테살로니카 교회로 편지를 보냈으니, 그것이 곧 테살로니카 1서다.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예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했다. 예수님 당신께는 부활이라는 종말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그분이 미구에 재림할 때면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유다인·이방인의 차별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날 테살로니카와 그 주변의 주민 수는 56만 명이다. 테살로니카는 수도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요, 항구로서는 가장 큰 도시다. 바울로 시대 유적으로는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 후대의 유적으로는 도심에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있다. 이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다. 베로이아 마을에서 전도하는데 테살로니카 유다인들이 들이닥쳐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베로이아에 남겨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다(사도 17,10-15). 당시 정치·경제적으로는 몰락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수준급이던 아테네에서 바오로의 설교는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전도 실패담이 사도 17,16-34에 적혀 있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75㎞ 떨어진 코린토로 가서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제법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코린토는 그리스 남부지역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일 뿐 아니라, 서쪽에는 레카이온 항구를, 동쪽에는 켕크레애 항구를 끼고 있어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자연히 풍기는 문란했다. 코린토 뒷산 위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여신전 주변에는 이른바 성스러운 창녀들이 천여 명이나 득실거렸다고 한다. 49~50년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했다. 그 때 로마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프리스킬라가 로마에서 코린토로 옮겨와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했는데, 바오로는 이들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베로이아에 남아 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코린토로 내려와서 테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테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으니, 곧 테살로니카 1서다. 이는 바오로의 편지 가운데 첫 편지일 뿐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첫 작품이다. 코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가서 고발했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18,12-17). 코린토 유적지에 가보면 레카이온 중앙통 끝에 총독이 연설하고 재판한 법정 축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했다. 바오로 역시 바로 같은 때에 코린토에 체류했다. 이것이 바오로의 연표 가운데 가장 확실한 연대다. 사도 바오로는 켕크레애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카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사도 18,18-22).
3차 전도여행(53-58년경)
사도 18,23-21,16에 3차 전도여행기가 실려 있다. 바오로는 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갈라티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아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내려가서 무려 27개월 가까이 활약했다(19,8-10; 참조: 20,31). 사도는 한편으로 전도하고 또 한편으로 많은 편지를 써 보냈다:
- 문이 활짝 열렸다고 바오로 자신이 말할 만큼 에페소에선 전도가 잘 되었다(1코린 16,9). 또한 사도는 제자들을 시켜 에페소 주변에 위치한 콜로새, 라오디케이아, 히에라폴리스에도 교회를 세웠다(콜로 4,13).
- 갈라티아 지방 여러 교회에 유다주의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 갈라티아서를 써 보냈다(갈라 1,6-10). 에페소에서 코린토 교회로 편지 세 통을 보냈는데, 첫째 편지(1코린 5,9.11)는 분실되고, 셋째편지(눈물 편지: 2코린 2,4; 7,8)는 편린(2코린 10-13장)이 전해오며, 단지 둘째 편지만은 고스란히 전해온다. 곧, 지금의 코린토 1서다. 또한 에페소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필리 1,13; 2코린 1,8-10)에 필리피 교회에, 그리고 콜로새 교회 신도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되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코린토 교회로 넷째 편지를 써 보냈다(2코린 2,12-13; 7,5-7; 사도 20,1). 곧 지금의 코린토 2서 1-9장이다. 에페소에는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는데, 세계 7경 가운데 하나라는 평판이 있었고 온 아시아에서 순례객이 모여들었다. 바오로가 너무 전도를 잘해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드는 은장이들의 수입이 줄어들 지경이었다. 그러자 은장이들의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바오로의 일행인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를 극장으로 데려가 난동을 피웠다(사도 19,21-40). 바오로 시대 유적들로는 가슴에 수많은 유방이 달린 아르테미스 여신상, 피온산 기슭에 자리 잡은 극장(수용좌석 2만 5천 석), 피온산 너머 아르테미스 신전터 등이 있고, 교부시대 유적들로는 1·2차 에페소 공의회(431년, 449년)가 개최된 바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 그리고 성 요한 대성당 등이 있다.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로 내려가서 석 달쯤 머무는 동안(사도 20,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교우들에게 보냈으니, 곧 로마서다. 장차 로마 교회를 방문한 다음 스페인으로 가서 전도할 작정을 한 사도인지라(로마 15,22-29), 자신의 신앙을 알리는 뜻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코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필리피 교회로 가서 58년 해방절을 보내고(사도 20,6), 에페소 남쪽 항구 도시 밀레토스, 그리고 오늘날 레바논의 항구 도시 티로,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 하이파(프톨레마이스), 이스라엘 총독부가 위치한 카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체포-구금-로마행-가택연금(58-63년경)
바오로가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 21,17-36에 적혀 있다. 아시아 출신 해외 유다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오로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 배신자로 규탄하다 유다인들이 그에게 린치를 가했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어서 지중해변 카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 갇힌 몸이 되었다(58년 오순절∼60년 가을: 사도 23,12-24,27).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했다(사도 25,1-12). 그리하여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 27,1-28,15에 압송에 관한 기사가 있다. 60년 가을(27,9) 카이사리아를 떠나, 그레타 섬을 거쳐서(27,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몰타섬에 상륙한 다음 석 달 동안 겨울을 났다(28,11). 61년 봄에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푸테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선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28,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28,30-31). 일종의 가택연금 상태라 하겠다. 사도행전의 경우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스페인 전도와 로마 전도?
58년 봄 코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오로는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로마 15,24.28). 그 소원이 실현되었을까? 로마 주교 클레멘스가 95년경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5,1-6,1)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했다고 단정한다. 아울러 스페인 전도 후에 언젠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오로의 전기를 쓴 보른캄 교수는 클레멘스의 증언을 신빙성이 없다고 일축하지만, 학자들은 오히려 그의 증언을 존중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면 바오로는 언제 어떻게 순교했을까? 그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64년 7월 네로 황제가 로마 시가를 불 지르고는 여론이 사나워지자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간(64~68년) 모질게 박해했다(타치투스. 연대기 15,44). 네로 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 둘 다 순교했을 법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 바오로 대성당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