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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리(別離) 그리고 시인의 사연
눈보라가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던 그해 1월 17일,
그가 고인이 되었다. 이 졸지의 절망 이후 오래도록 세 권의 시집『내 몸의 봄』,『밥꽃』,『마실 가는 길』을 만지고 또 더듬으며 꺼이꺼이 되새김질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는 몽환의 배경으로 안개 속 희뿌연 그림자로 나타나 소맷자락 지그시 당기기도 했으나 더러는 발가벗은 몸으로 담장 옆구리 쾅쾅 찍어서 나를 힘들게 했다. ‘제발 기다려.’ 신새벽, 창문을 열면 혓바닥이 쓰고 눈이 아렸다.
바다처럼 착한 벗이 안겨준
막걸리통 뒷자리에 쓰러져
-『밥꽃』의「막걸리」에서
나는 그의 승용차 조수석에 가장 많이 등을 기댄 전속 의뢰인이었으며 회합의 술자리 막판 헤어지는 길목 어디쯤 평상에서 ‘딱 한 잔민 더’를 종용하던 공범자였다. 그에게 의탁하며 긴 세월 보냈고 그가 있거나 말거나 옆에 있는 듯 혼잣말 안부를 나누곤 했다. 꽃 피는 봄날이나 낙엽 지는 산길마다 그와의 동행을 떠올렸고 연상에 옮길 때마다 탁자가 위태로울 만큼 가없는 술병을 쌓아놓는 상상으로만 행복했었다. 그랬다. 나는 혼자서도 그와 함께 해 저무는 금강을 걸었고 전교조 사무실에서 유인물을 만들었고 그의 등짝에 기댄 시위대가 되어 머리띠 매고 구호를 외쳤다. 그와 나는 그렇게 묶이고 얽힌 ‘연(鳶)과 실타래’였다. 더러는 대추나무에 걸린 줄이 엉키거나 끊어져 산 너머 사라지면 다시 패를 감아 옆구리 실타래를 확인하고서야 ‘됐다’ 안심한 채 잠을 청하곤 했다. 그 삼십 성상이 아, 덧없고 허망하다.
이렇듯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
실은 다 그대 때문이라는 것을
-『내 몸의 봄』,「낯선 길」에서
1989년 그해 여름, 전교조 교사 대량 해직 사태 사연부터 인연이 시작된다. 두 개의 열차가 암흑의 터널 속으로 정면 직진하는 치킨 게임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노동자를 고수하는 젊은 교사 1500여 명의 목을 난도질로 베어내었고 충남에서도 50여 명이 교단을 떠났다. 부부교사건 홑벌이 교사나 처녀 총각 젊은 스승이건 서슴없이 목을 내밀던 그런 애국의 시국이 실제로 있었다. 청년 교사였던 유지남 역시 단두대에 목을 내밀었다가 이차구차 칼날을 피해가면서 울멍울멍 상처를 보듬던 잔인한 여름이기도 했다.
그런 우울한 그림이 있었다. 사내 혼자 건넌방에서 술떡으로 뒹굴며 벽 너머 관료들의 탈퇴용지에 대리 도장으로 면죄부 찍는 피붙이의 스크린을 견뎌내는 것이다. 아프다. 쫓겨나지 못한 스승은 그 부채를 숙명처럼 감수해야 했다. 더 헌신하고 사랑하고자 몸을 낮췄지만 등짝이 따갑고 오금이 서렸다. 교정의 꿈나무들을 아무리 깊은 사랑으로 껴안아도 사슬처럼 목을 누르는 중압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즈음 내가 공주에 입성했고 우리는 대번에 원 카드로 끈끈이주걱처럼 끌고 당겼다.
남양 분유 열통쯤인가를 사다가
방 귀퉁이에 천장 가까이 깔아놓고는
돌아와선 안 되는 길 질끈 나서며
-『밥꽃』의 「철밥통」에서
교사가 노동자를 주장하니 빨갱이의 포로가 된 게 틀림없다, 며 코앞에 노조 포기 각서를 들이민다. 스물아홉 젊은 아부지였던 그는 장모님에게 ‘걱정 말라’며 전화 호기를 부리긴 했으나 기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밥줄과 타협’ 그 각서 한 장의 대결에서 한 발 물러서면서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짤린 목’ 1500여 명 이외의 수만 교사들이 그렇게 악몽을 감수해야 했다.
‘헤쳐 모여’ 직후 저마다의 통로를 모색했다. 우리들도 시장통 3층 백락다실 옆구리 전교조 사무실에 조우한 채 강병철, 전병철, 유지남 3인방과 김상배, 김상천, 가덕현 같은 떠돌이 시인 몇몇이 철새처럼 합류하며 이마를 맞대었다. 내가 먼저 원칙을 정했다.
‘시국을 피해가지 않는다.’
‘문학이 역사의 장애물로 판단되면 손가락을 자른다.’
두들겨 맞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투사가 아니라 지사였다. 혁명가가 아니라 착하고 소박한 스승 체질이었다. 투쟁의 결의를 마치고 현관 앞에 열쇠를 넣으면서 세상의 모순구조와 시적 본성의 간극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5년 후 해직교사들의 복직과 동시에 부채감을 덜어내면서 그동안 경직되었던 문장을 다독이며 감성의 문장을 다독일 수 있었으니, 애오라지 다행이다. 아픈 시국을 동행하던 그가 어느 날 돌연 본산지 입동리로 이삿짐을 싼 이유가 된다.
아빠 저거 독귀뚜라미지
아니야 그냥 귀뚜라미야
아니야 독귀뚜라미야
-『내 몸의 봄』의 「어떤 대화」에서
소도시 아파트에 거하던 분필쟁이의 귀농 핑계가 ‘신의 한 수’이다. 그러니까 목욕탕 독귀뚜라미 대화 사연으로 이삿짐을 쌌다는 스토리는 기실 넘어질 준비로 기울어진 다리를 누군가가 슬쩍 걸어줬다는 게 정답이다. 일상 속의 새로운 여유로움이 생산된 게 참으로 다행이다. 꽃 이파리 우수수 떨궈낸 가쟁이로 이른 봄 자두 잎새가 연두빛 속살을 내미니 눈의 호사가 새롭다. 지난여름 배설했던 참외씨가 여름철 뙤약볕 생강밭에 공룡알 같은 노란 참외를 불쑥 출산한다. 홀스타인 젖퉁이에서 우유도 짜내고 미루나무 잘라내어 느타리버섯도 키워낸다. 더러는 초딩 시절 벗님들이 오토바이 짐받이에 막걸리 통 달고 둥둥둥 나타나면 원고지를 내던지고 심야 술판으로 변신하니 자원방래(自願訪來)한 유붕(有朋)이 그리도 도탑다. 아, 어디선가 무던히도 그리던 풍경이다. 그는 그렇게 자작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숲이 되면서 시나브로 중년을 넘어선다. 그 즈음 ‘똥의 화사함’을 터득했으니 그게 ‘시인의 눈’이다.
변소간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는데
이상하게 똥냄새가 안 올라왔다
왜 그런가 곰곰 생각해보니
면소재지 큰 학교로 이사 간 애들 따라
똥이란 놈들도 그만
죄다 이사를 가버린 거였다
-『내 몸의 봄』의「폐교장 1」에서
엉덩이 붙이자마자 시집 한 권을 뚝딱 해치우는 ‘뒷간단골’이니 똥은 그의 시적 나무를 생산하기 위한 서정적 발아체이다. 그렇다. ‘똥’과 ‘뒤’와 ‘등’이 잡히면서 그에게로 시가 왔다. 용변의 어원을 새롭게 풀어낸 「뒤를 본다는 것은」을 주목하라. 노래방 화장실을 훔쳐보는 빨간 앵두 「도촬」로 이어지는 메타포는 또 어떠한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휴지로 똥을 닦는다는 것에서 찾아낸 질풍노도의 눈높이인「아름다운 발견」이나 황소의 꼬리를 치켜든 채 무더기 똥과 분수를 뽑아내는 「호모 크리넥스」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인사법」「그것」「뒷간의 명상」등 분수처럼 터지는 문장 모두가 생리적 소재에서 발현되니 고답적 조리개로는 찾아낼 수 없는 ‘유지남의 눈’이다.
뒤를 잘 보아야 건강한 것이라고
뒤가 아름다워야 잘 사는 것이라고
세상은 언제나 뒤를 치켜세우지만
정작 뒤를 잘 돌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마실 가는 길』의 「뒤」에서
맨질맨질한 호박잎 앞면을 만들기 위해 뒤편에 억센 힘줄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보병들의 행군에도 앞뒤를 살피는 첨병이 있어 안전을 살피며 대박치는 영화 한 편에도 오리물갈퀴 같은 스태프가 숨은 그림처럼 받치고 있다. 어쩌면 어디에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뒤란의 그늘을 그가 먼저 발견해서 감싸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껍데기는 가라’가 아니라 ‘껍데기야 어서 오라’ 다독이며 공생하는 설정이 정답이다. 그는 그렇게 60평생 뒤를 자처했고 뒤를 살피면서 너그럽고 넉넉해졌다. 보라.
삐이삐, 짧은 경적 소리에 이어
팔십 시시 오토바이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몇 분 뒤면 집 앞 은행나무 밑에 설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 모습 사진 바로 아래
낡은 화장대에 앉아 얼굴 매만지며
오토바이 신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는
팔십 노인의 바쁜 손길이 문틈으로 보인다
엄마보다 두어 살 적게 드셨다는데
날마다 오토바이 뒤에 엄마를 태우고
-『밥꽃』의 「사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에서
지아비를 먼저 보낸 후 꼬부랑 솔로로 살아가던 노모의 러브 스토리이다. 웬 남정네 오토바이 뒤에 실려 게이트볼 장에서 실버 스틱을 잡으니 ‘전원일기’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신박한 스케치이다. 고자질하는 당숙의 말씀에 오히려 짠하게 쟁그러워진 시인은 오토바이 노인 찾아 당장 담배 한 보루 안겨주며 모자(母子) 공범을 자원한 것이다.
바야흐로 일제강점기,
스무 살 그미가 시집오던 날까지 당신의 신랑감이 상처한 남자인 줄은 까맣게 몰랐단다. 가방끈 괜찮고 인물 훤한 행정관리이니 마땅한 혼처인 줄만 믿고 신풍면 골짜기로 족두리 쓰고 왔단다. 그런데 웬걸, 가슴 울렁이며 꽃가마에서 내리는 순간 너댓 살 남매가 빠드름히 올려보는 바람에 아뿔싸, 벼랑끝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그뿐이었다. 식민지 시대 ‘여자의 일생’이 그렇듯 참고 견디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시인이 팔남매의 막둥이 쉰둥이 출산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으니 지금 같으면 자칫 우주의 입자로 사라졌을 판이다.
그래서일까, 늙은 엄니는 자식들을 품에 껴안고 자는 법이 없었다. 어린 날 눈 먼 할머니 가슴을 만지며 성장했을 뿐 어머니의 등을 긁어드린 적이 없단다. 부친은 엄했고 늙은 엄니는 식솔을 건사하기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기까지다. 그 엄한 부친의 품격이 여관방 벽을 뚫는 신음소리로 흔들리기도 했으니.
일찍 자라는 말씀에 예하고 자리에 누웠으나 베니어판 장지문 뚫고 건너오는 젊은 남녀의 소근거리는 소리. 거친 파도 소리 들으며 하필 이런 곳에 방을 얻었는지 하는 원망과 허벅지 안쪽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벌레의 야릇함이 담쟁이 넝쿨처럼 몸을 번갈아가며 휘감았다 눈 감고 계신 아버지가 행여 민망스러우실까봐 몸을 돌려 잠든 척하였으나
-『밥꽃』의 「이명의 기원」에서
천안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던 열여섯 사춘기의 비하인드 고백이다. 칠십오 세 아버지와 동행으로 고입 예비소집을 마치고 중국집에서 짜장면도 먹었다. 포만감으로 아랫배 쓰다듬던 두 부자는 도심지 뒷골목 허름한 여인숙 층계를 삐걱삐걱 올라 2층 사이드 방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베니어합판 칸막이를 뚫고 들리는 깨꽃 같은 신음소리에 부자 모두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아들은 건성으로 책에 몰입하는 척하면서 늙은 아버지의 심사를 불안해하고 노부는 잠든 척 감은 눈을 뜨지 않으며 시간은 마디게 흘러갔다. 그 후 귓속에 벌 한 마리 웅웅 둥지를 틀었으니 그게 ‘이명의 기원’이다.
오늘은 우리 마을 도랑 살리기 대청소하는 날입니다
아침 여덟 시까지 모두 마을 회관으로 나와주십시오
(중략)
예초기 칼날 죽창처럼 앞세우고 목수건도 하나씩 돌렸다
빨간 장갑에 낫 부르쥔 모습들, 결기가 예사롭지 않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오십대 중반 이장을 선봉으로
트럭 몇 대에 나눠 탄 농군들, 적진 향해 돌격 앞으로
-『마실 가는 길』의「스마트 마을의 하루」에서
이제 마을방송도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다. 남녀노노(?) 오그르르 마을회관에 모이니 작금의 농촌에는 울울청청 젊음이 완전히 바닥친지 오래이다. 환갑 전후 역전의 용사들이 예초기 돌리면 머리카락 허연 칠순의 굽은 등들이 어슬렁어슬렁 둔치에 뒹구는 농약병이나 녹슨 깡통을 분리수거 봉투에 채우는 것이다. 비어가는 마을에 쓰레기는 차고 넘치는데 다행이랄까, 사이사이 물잠자리도 날고 도랑으로 풀뱀도 꾸불꾸불 몸을 숨기니 허허로웠던 가슴이 샘물처럼 채워지기도 한다. 잠시 후 새내기 면서기 아가씨가 배추흰나비처럼 나타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씩 돌린 다음 ‘웃으세요, 김치’ 찰칵찰칵 사진도 찍어가니 그게 보고서 제출용이건 말건 애오라지 21세기 농촌풍경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까. 신작로 공무원이라도 나타나야 벌판에 활기가 띄워지다니 아이러니하고.
봄이란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겨우내 잠들었던 ‘몸’에 근질근질 돋아나는 새싹 같은 두 팔 쭈욱 펴고, 한껏 기지개를 켜는 모습 같다
쉬는 시간마다 등나무 그늘 아래 붙어 앉아 마구 피어오르는 물 어쩌지 못해 배배 꼬이던 열일곱 열여덟 두 봄이 글쎄
-『밥꽃』의「봄 봄」에서
‘몸’이라는 글자 꼭대기에서 새싹 두 개가 손을 올려 ‘봄’으로 변신했으니 그게 싱숭생숭 봄바람의 근원이 된다. 하물며 그가 가르치던 질풍노도들이야 호리의 거침이 있으랴. 럭비공들은 구세대 스승들 눈총 따위야 내팽개치고 교문도 나서기 전에 연리지 나무처럼 한 덩어리로 얽혀 신나게 활개 치는 중이다. 기성세대의 숨어서 연애하던 두근두근 봄날과는 판이 다른 풍경들이니 섣불리 야단치다가는 꼰대딱지가 붙기 십상이다. 그렇다. 봄이다. 운동장에는 멧돼지처럼 축구공 쫓아가는 봄날도 있고 체육복 바람으로 율동에 빠진 여학생의 ‘방댕이 봄날’도 새롭다. 그리고 그는 지금 구천에서 예전의 그 봄날을 황홀하게 지켜보는 중이다.
아니다
차라리 화살 같은 강이다
백성들의 뼈를 발라 곳간 채우던
썩어버린 궁궐의 대들보
우지끈 박살내는, 에잇
무식해서 아름다운 반역의 횃불이다
-『마실 가는 길』의「다시 금강에서」에서
태어나자마자 실리콘 젖꼭지를 무는 갓 난 송아지를 포착하는 눈이 그렇고 저승길 떠난 남용할매가 텃밭에 나타나 채머리를 흔드는 걸 포착하는 낚시코가 섬뜩하다. 잘라진 손 하나 하늘에 묻은 채 나머지 한손으로 합장하는 구룡사 천수관음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과정이나 낡은 배드민턴 가방에 달덩이 같은 자식을 다섯이나 낳은 길고양이를 잡아내는 눈도 유지남 시인에게만 가능하다. 문우 이정록 왈 그의 시를 ‘백 번 이상 읽어 몸에 녹여야 한다’고 했고 문예비평가 김상천은 ‘미시적 일상에서 포착한 빛나는 타자’라고 평했다. 당연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당숙모네 댓돌 위로 흰 고무신이 아직도 초승달빛 받고 있으니 이제 아내와 더불어 저녁 산책길 나서서 열무김치에 국수 말아먹고 오면 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전교조 후원금을 걷었고 유인물을 뿌리며 최루탄을 맞았다. 술에 젖으며 날을 새울라치면 부실한 나의 몸을 걱정하며 ‘형님, 이제 일어나시우’ 등을 밀어내던 그가 먼저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흩어진 술상은 누가 치워주나요
음주운전으로 태워다 주던 승용차는 아아, 어떻게 호출하나요
이슥한 밤 전세방 쪽문 걷어차던 그 골목길
토한 등허리 두들기던 가로등은 제발 어디로 사라졌나요
-졸시 「동지여, 설국의 새해에」에서
언제부터였을까, 이웃집 한솥밥처럼 지내던 원 카드가 이차구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없는 술자리가 늘어났고 그도 역시 다른 술자리에서 어울리다가 외나무다리로 마주치며 머슥한 표정으로 잔을 건네기도 했다. 한 해가 흐르고 2021년 새해가 오면서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번에는 꼭 만나 진하게 풀어야지. 작심했던 그해 새해도 어느새 보름이나 빛의 속도로 지나간 것이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내일은 내가 먼저 꼭 손을 내밀자’ 그렇게 노심초사 작심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연옥 시인이다.
“유지남 소천했어요.”
폭설이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던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분하다. 하느님은 그래서 인간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섬마을 어디쯤 주막에 앉아 새도록 파도를 보고 싶었는데 작심한 바램이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돌절구 도굿대로 쿡쿡 찧는 메주 같은 시도 한참 칭찬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없다. 선명하게 없다. 나는 지금도 굼벵이처럼 뒹굴고 있는데 그대 혼자 먼저 자리잡은 구천에서 세속을 내려다보며 껄껄대고 웃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