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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사상가로,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이 오히려 그의 학문적 역량을 키워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정약용은 정조에 의해 발탁되어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시작된 세도정치의 바람에 휩슬려 어쩔 수 없이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에 금지했던 서학(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노론 실세들로 구성된 정권의 담당자들이 남인인 그를 제거해야만 했던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불행일 수 있겠으나, 그는 오히려 18년 동안의 기나긴 유배 기간을 활용하여 학문을 닦고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그 공백을 메꾸어 나갔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정약용의 학문적 역량을 확인하고, 그의 저술들이 지니는 가치를 재확인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모두 14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유학의 경전에 대한 해석을 다룬 ‘경학’과 그를 통해 세상에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한 ‘경세학’으로 나누어 그 업적들을 세밀하게 따지고 있다. 성리학을 국가 경영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경전을 공부해야만 했다. 이미 송나라의 주희에 의해서 정리된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통용될 정도로, 주희의 영향력이 강하게 지배를 했다. 정작 중국에서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파가 활동했지만, 조선은 철저히 주자(주희)의 논리를 신봉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주자의 경전 해석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올바른 학문을 해치는 적이란 뜻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처벌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시대에 정약용은 경전의 철저한 탐구를 통해서, 주자와는 다른 해석들을 펼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바로 정약용이 연구했던 유학 경전에 대한 저술들의 특징을 살피고 있다. 모두 7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저술들은 <대학공의>와 <맹자요의> 그리고 <논어>를 새롭게 해석한 <논어고금주> 등이다. 이밖에도 <중용자장>, <시경강의>, <상서고훈>과 <주역강의>를 포함해 이른바 유학의 ‘사서삼경’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2부에서는 정약용의 대표 저서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그리고 <흠흠신서> 등 이른바 ‘1표 2서’를 중심으로, 그밖의 한시와 논설 그리고 경전의 독법을 다룬 6편의 논문들을 수록하고 있다. 실상 그의 방대한 저술들의 특징을 아주 짧은 논문들로 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2,500수가 넘는 한시만 하더라도 몇 권의 저서로 연구해도 모자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정약용의 저술들이 지니는 특징을 아주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가칠게나마 그의 사상과 저술들이 지니는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저자로 참여한 연구자들의 학문적 역량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고, 오랜 동안 정약용을 연구하면서 ‘다산연구소’를 만들었던 박석무 이사장의 뚝심이 빚어낸 결과라 할 것이다. 특히 박석무의 서론에서는 ‘오늘 여기, 왜 다산인가’라는 제목으로 정약용의 학문이 지닌 현재성에 대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 모로 이 책은 정약용의 방대한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입문서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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