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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 오준, `사람의 땅 시의 길` 원문보기 글쓴이: 해와
勺詩富林 56강
6장 시의 소재; 6. 敬畏-쓸모-墮落-버려짐; 사물들
색-수-상-행-식, 2019년 6월 5일
느끼다; 손삽, 숟가락, 사과, 쌍둥이칼, 알약, 오븐, 보자기, 탁주, 은수저, 칫솔, 겨울 양말, 의자, 장롱, 보다; 등잔, 상자, 샤넬, 안경, 엽서, 여권, 팔찌, 유리, 꽃병, 전기스탠드, 신호등, 커튼, 클립, 듣다; 콘돔, 베개, 침낭, 지도, 털실과 코바늘, 도장, 꽃, 버스, 우주선, 음반, 크리스마스트리, 우편함, 만지다; 머플러, 봇짐, 바늘, 가발, 연필깎이, 교복, 맨발, 매니큐어, 플랫슈즈, 하이힐
갈대
김수영
갈대의 흔들림이 갈대의 마음인 것은 그때는 몰랐지.
갈대의 흔들림이 바람의 소리인 걸 그때는 몰랐지,
갈대의 흔들림이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는 몸짓인 걸 그땐 몰랐지,
갈대의 흩날림이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는 마음속 울음인 걸 알아가기 시작한 건, 내 살아가는 것이 뿌리째 흔들릴 때 였고,
갈대의 흩날림이 마음속 울음인 걸 알아가기 시작한 건, 내 살아가는 것이 의미 없이 흩날리기 시작할 때였지
갈대의 흔들림이 그리움인 줄 그땐 몰랐지,
- 그리움이 애 터지는 눈물이었던 건, 세월이 흐르고 알게 되었지
흔들리는 갈대가, 내 마음에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건 세월이 흐르고 알게 되었지
버려진 것들이 모여 있는 시간, 그 낡고 천하고 더러운 자리는
우리 영혼의 맑은 빈터
(…) 매력은 표층과 심층이란 두 개의 차원을 전제한다. 매력은 마치 커튼이 쳐진 창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와 같다. 우리는 대개 표층에만 머물고 거기서 살아간다. 사물을 쉽게 ‘일반화,’ ‘분류’, ‘범주화’, ‘도구화’, ‘상품화’, ‘자본으로 환원’ 하며 살아간다.
(…) 눈과 귀를 그냥 열어 두기만 해도 우리에게 제공되는 현실의 전체적인 한 부분, 즉 인상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인상들이 구조화되어 이루어진 배후 세계도 있는데, 이데아, 본질, 로고스 등으로 불리는 세계이다. 분명한 것은, 이 상위의 세계가 우리 앞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심층 세계는 표층 세계만큼 명백하지만 더 많은 우리의 노력이 뒤따라야 밝혀진다.
(…) 고흐의 구두는 그 구두의 주인이 신든지 신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즉 분명히 ‘눈앞에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눈앞에 있는 이 자립적인 사물이 구두인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발에 신겨지는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구두가 단순히 가죽 덩어리가 아닌 구두라는 사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손안에 들어가서 구두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용 가능한 존재, 즉 용재(用在)임을 의미한다.
(…)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심층구조)와 그것이 표현되는 표면적 형식(표층구조)간의 변형적인 문법에 관한 촘스키(Chomsky, 1965)의 이론에 의해 이루어진 구분이다. 예를 들면, 문장의 심층구조는 "철수가 영희에게 책을 주었다"가 될 수 있는데, 반면 이것은 "영희는 철수로부터 책을 받았다", 혹은 "책은 철수에 의해서 영희에게 주어졌다"라는 표층구조로서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법적 변화는 변형적 문법-의미는 변하지 않고 구문이 변하는 것-에 의해서 발생된다.
(…) 선불교의 돈오성과 현재성이 반본환원(返本還源)의 상전이(相轉移) 관계를 맺으며, 복잡한 피드백 작용으로 얽혀있는 인드라망 그물(一卽多 多卽一).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관계망인 동시에 일을 매개로 수행을 도와주는 상호의존 기제로는 십우도에 나타난 '소(牛)'의 의미, 숭산행원의 '순간의 세계'와 '원(圓) 수행'을 예로 들었다.
법신(法身)이라는 것은 진리의 몸으로 有無와 一體 개념들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모든 존재들을 통합하고 모든 현상. "우주적인 수준에서 모두가 연결된 동시에, 원자적인 수준에서도 모두가 에너지의 측면에서 연결돼 있다"
식당
프란시스 잠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어 있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 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서 아무 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다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관찰을 통해 객관적인 진술을 사용하여 시를 씁니다
(…) 매력과 권력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속이지만, 오직 사랑의 환상과 시적 언어만이 그 일치의 환상을 선사한다.
(…) 사물시란 사물에 대한 감각(sensation), 감성적 느낌(feeling), 감동(感動)이 버무려진 언어의 그림
(…) 美는 자연, 인생, 예술에 담긴 眞實이나 眞理가 인간생활에서 펼쳐지는 그 현상이나 가치를 체험할 때 일어나는 감명
(…) 미학은 플라톤에서 비롯되었지만, 미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한 자는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이며, ‘감성적 인식의 학문(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이라는 의미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 그리스어의 감성적 aisthetikos라는 말에서 유래)라는 명칭을 사용한데서 기인한다. 그는 볼프와 라이프니츠가 이성적 인식이론을 체계화하여 논리학을 수립한 것에 대하여 감성적 인식 이론을 확립하려고 했다. 이후 미학은 대체로 관념론적 미학과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 등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 관념론적 미학의 창시자는 칸트인데, 그는 미와 예술에 있어서 관념을 넘어선 경험적 판단을 인간의 정신능력 가운데 중요한 측면으로 파악하며, 이것을 미적 판단력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또한 미적 판단력이 오성(悟性) · 이성(理性) 등과 병치(竝置)되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미적 판단력은 특수한 인식능력이다. 칸트 이후 이러한 선험적·비판주의적 미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철학자로 쉘링 · 헤겔 · 쇼펜하우어 등이 있다.
(…)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은 19세기 말 실증주의(Positivism)의 전개에 힘입어 형성된 미학이다. 이 미학은 특히 실험적 방법에 의지한다. 특히 립스나 폴켈트 등이 내세운 감정이입설(感情移入說, Empathy)은 경험 및 심리 작용을 잘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미적 규범의 문제를 다루는가 하면,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미적 형식의 문제를 다루며 미적 관조의 구조도 파헤치고자 시도한다. 이와 같은 경험주의의 입장은 프랑스 역사학자인 텐느와 기요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적인 방법을 활용한 미학을 성립시켰는가 하면 예술학의 토대를 닦기도 했다.
(…) 랜섬(J. C. Ransom)은 사물시의 예로 이미지즘의 시를 들고 있다. 흄(T. E. Hulme)의 영향을 받은 파운드(E. L. Pound)가 주도했던 이미지즘 기법은 시에 있어서 시 속의 관념보다는 시어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주력한다.
(…) 몽상적이고 낭만적이며 종교적인 시를 쓰던 릴케(R. M. Rilke)는 1902년 조각가 로댕(A. Rodin)과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창작 방식을 시도하게 된다. 영감에 의지해야 하는 불안한 자신의 작업과는 달리 가시적인 조각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로댕의 작업은 부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릴케는 언어에 조각과 같은 조형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조각의 특성은 공간성에 있지만 문학은 시간적이다. 이에 릴케는 동시성을 강조한다. 그는 조형 예술가와도 같은 자세로 언어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거쳐 시어를 고르고 정확한 관찰을 통해 객관적인 진술을 사용하여 시를 쓴다. 시어의 극단적인 절제, 구체적인 사물적 윤곽과 완결성을 지향하는 사물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시,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사물(事物)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 릴케는 사물에 대한 경건한 태도는 사물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사물들의 마음을 열고 그 본질을 파악하여 하나의 예술사물로 변용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릴케의 문학적 태도는 1907년 사물시집이라고도 불리는 『신시집』에 잘 나타난다. 이 시들 속에서는 주관적인 주체인 시적 자아는 뒤로 물러나 있고, 사물들은 엄격히 객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마치 그 사물의 본질대로 묘사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시적 자아의 주관에 의한 산물들이다. 객관적인 진술을 통해 주관적인 주체가 후퇴되어 있는 것은 시적 주체가 점차 문제시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한다.
거미집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해 본다 그는 간간이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 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지우개
송순태
잘못 써내려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평안해지고 마는구나
잘못 쓴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
명품 (※수필)
홍경희
주책스럽게도 백발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쓰는 도구들을 좋아한다. 뾰족한 모양을 내서 예쁘게 깎을 수 있는 연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 꼭지만 누르면 심 조절이 가능해서 편리한 샤프,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제일인 붓, 정봉 중봉 세필 등의 필기구이다.
연필에 대한 욕심은 국민학교 때부터인 것 같다. 공부는 지질하게 하면서도 내 함석필통은 키가 제각각인 연필들이 잘 깎여진 채로 올망졸망 가득 차 있곤 했다. 어쩌다 친구가 가진 연필이 욕심 날 때는 만화책을 빌려주거나 물물교환으로 기어코 내 것을 만들고야 마는 집념까지 있었다.
나는 또 만화책을 동무들이 부러워 할 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은행이 학교 담과 붙어 있는지라 쉬는 시간이라도 달려가 떼를 쓰면 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고 싶거나 보고 싶은 물건을 학교 앞 문구점이나 서점을 통해 곧잘 구할 수 있는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진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로 불숙불숙 찾아오는 딸이 귀여워서라기보다 창피해서 선뜻 돈을 쥐여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제일 예뻐한다는 착각 속에 철없는 유년을 그렇게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연필회사인 독일의 ‘파버카스텔’에는 백만 원이 넘는 연필이 있다고 한다. 대 문호 괴테를 비롯해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그라스, 영국 수상 처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애용하던 연필이 이 회사 제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유럽의 귀족이나 국제적 명망가들의 애장품이 된 것은 우연히 그들이 먼저 쓰게 되서 유명해진 것인지 아니면 유명회사의 연필이어서 그들이 쓰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명품브랜드의 값을 높이는 데는 그들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볼펜에 욕심이 많은 내게 손녀는 빈번이 제 필통을 열고 갖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출장길에 기내에서 받는 볼펜과 호텔에서 색다른 모양의 볼펜이나 연필이 눈에 띄면 챙겨다 준다. 이렇게 출신지가 각각 다른 심이 가늘고 굵고, 여러 색을 내는, 이름도 가지가지의 볼펜들로 문구점에 가는 번거로움 없이도 내가 가진 네 개의 필통은 늘 배가 부르다.
이번에 새 식구가 늘었다. 아들이 작년에 박사학위 받을 때 들어온 선물이라며 까만 몸통에 은테를 두르고 뚜껑에는 흰 꽃을 얹은 중후한 모습의 볼펜 하나를 가져왔다.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데 그거야 말로 명품이란다. 나는 눈물 날 것같이 감격했고 기뻤다. 명품이라서?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 짠한 안쓰러움과 대견함에서 오는 에미의 마음에서였다.
직장 다니며 자식들 가르치며 남보다 곱절의 고생으로 일궈낸 형설지공(螢雪之功). 조금의 뒷받침도 못 해 준 부모의 미안함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내게로 온 그 까만 볼펜은 명품중의 명품임은 물론이고 대대로 소장(所藏)하는 가보(家寶)로 삼을 작정이다. 자랑할 기회가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꺼내 자랑하려고 핸드백 속에 늘 넣고 다닌다. 희망사항 일 뿐이지만 내가 언젠가 그럴듯한 책을 쓴다면 이 볼펜으로 싸인을 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꿈은 항상 착각 속에 꾸는 것일까.
대학생인 손녀는 요즘도 필통을 열고 내게 자유 선택권을 준다. 할머니에 대한 최대의 사랑 표현 방법이다. 이렇게 모여든 사랑 때문에 가슴은 늘 훈훈하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 볼펜들 하나 하나가 내겐 소중한 명품이 아닐까 생각하며 불룩한 네 개의 필통을 어루만져 본다.
피아노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잊혀 진 존재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 보이게 하는 것이 시
하이데거는 사물을 도구와 작품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도구나 작품이나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도구는 철저히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 반면 작품은 아무런 목적 없이 존재 그 자체의 의의를 갖는 것이다. 도구에서 실용이나 용도가 빠지면 작품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작품은 어떠한 목적을 띠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 내 존재’(being-in-the-world)인 인간은 본질적 존재의 결과일 뿐, 쾌감, 놀라움, 슬픔 등과 같은 어떤 감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풀어 보면, 대상은 영원무궁하고 불변하고 모든 것에 통하는 본질을 갖기 때문에 대상 안에 주체라는 것은 설 자리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예술관이다.
내 눈 앞에 고흐가 그린 〈구두〉그림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을 통해 돌아가신 아버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만주까지 도둑 기차를 타고 도망치듯 고향을 등지면서 신었을 듯한 그 아버지의 삶의 총체를 체험한다. 그 때 그 그림은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구두라는 존재자가 그 존재의 비(非)은폐성 안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존재자가 도구로부터 해방 되는 것을 그리스인의 개념을 따라 진리라 했고, 그렇게 존재자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 시라고 했다. 따라서 예술은 존재자를 모방이나 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잊혀 진 존재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 보이도록 만들려는 노력하는 것이다.
새와 날개
오규원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한 여자가
흐르지 않고 강가에 서 있다
안고 있는 아이에게 한쪽 젖을 맡기고
강이 만든 길을 보고 있다
길은 강에만 있고 강둑에는
흐린 하늘이 바짝 붙어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젖을 움켜쥐고
넓은 들에서 하늘로 무너지는
강을 보고 있다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는
새 한 마리가
강을 건너가고 있다
사진관 의자
유홍준
참 이상한 곳에 놓인 의자군,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졸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창 밖
지나가는 차 바라보지 않네
참 적막한 곳에 놓인 의자
외톨박이 의자군, 오늘도
혼자뿐인 의자 단 한번도
엉덩이가 따뜻해져본 적이 없는 의자
누구랑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나, 얘기를 듣나
오늘도 검은 커튼 뒤에 앉아
혼잣말만 하는 의자
독백의 의자 그래도 조용하고
단정한 의자군, 진짜보다 더
예쁜 가짜 꽃바구니 두어 개
제 곁에 갖다놓고 누구는
이 의자 한가운데 앉아
돌사진, 독사진을 찍고
누구는 졸업사진, 영정사진을 찍고
나는 또 새 이력서에 붙일
굳은 표정의 증명사진 몇 장을 찍네
시선이 없는 내 청춘의
무표정 몇 장을 남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