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 돌이켜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겻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로로 포섭되었는지 모를 그 동사무소 직원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와 우울, 허무와 냉소, 후줄근한 옷차림과 매력없는 용모가 어우러진, 잠시라도 함께 있기 불편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도 그의 가정에 불어닥친 겹겹의 불행을 짐작도 못 할 정도로 늘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 밝고 명랑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에서 후반부의 놀라운 반전을 위해 준비해 놓은 따뜻하고 환한 서두 같았다.
낡고 오래된 필름과 그것을 보러 오는 사람들,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속물의 허세로부터 비롯된 이상한 편안함이었다.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대도시의 익명성은 세련을 가장한 이런 속물성 덕분에 유지된다. 다시 말해 이곳에선 누구든지 모습을 감추고 살 수 있다.
우주선을 고치러 나왔다가 모선과 줄이 끊어져 우주공간으로 날아간 영화 속 우주인들처럼, 둘은 그 동안 자신들을 결속시켜주었던 힘이 사라지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와 기영 모두 일가붙이 하나 없는 남한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했고 새로 생긴 가족을 거두어야 했다. 그래도 가끔은 만나 술잔을 기울였지만 화제는 남한의 어느 고등학교 동창회처럼 진부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작금의 사태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공포가 언제나 유령처럼 그들 주위를 배회했으므로 술자리가 유쾌할 리 없었다. 입 밖에 내면 현실이 될까봐 그들은 애써 시시한 화제를 가지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불안한 예감은 이제 현실이 되어 버렸다.
(김영하, 「빛의 제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