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 이야기 1)
과거에 대전의 명소중의 명소는 단연 보문산 이다. 언뜻 계룡산이 먼저 떠오를지 몰라도 실은 그 산은 공주군 반포면에 속해 거리 상 유성에서 가까워도 대전의 명소라 불릴 수 없다. 어쨌든 보문산은 현재도 대전팔경에는 들어가 있으나 더 이상 주목의 대상이 되질 못한다.
대전의 중심핵이라 할 수 있는 시청, 법원 등 관공서들이 구심 권에서 둔산이라 불리는 서구 쪽으로 이전을 하고 연이어 상권마저 역세권과 구심 권을 떠나 버리고 나니 위치 좋은 곳에 서서 사랑을 독차지 했던 보문산은 이제 화려했던 추억을 곱씹으며 그야말로 덩그러니 멀거니가 다되어 쉬지근한 닭발만 핥고 있다.
난 가끔 그곳을 들른다. 우중충한 휴일 별달리 계획을 세우기가 난처한 날엔 우산 들고 그곳을 간다. 마치 나이든 동두천 양공주가 화장 진하게 하고 가랑이 벌리고 좌판 벌려 논 양 구질구질하면서 처량하기까지 한 길목은 70년대 말 구두 뒤축 꾸겨 신고 객심 가득 찬 몰골로 어느 뒷골목을 찾아 헤매던 기억을 그대로 연상시키기에 썩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추려한 그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기억이라는 것은 뭐랄까, 포근하고 애틋하여 지나간 추억이 정겹게 새록새록 솟아나는 그런 풍경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들추기 싫은 과거가 폐부를 찌르고 엄습하여 충혈 된 정서를 곳곳에서 뱉어내고 토해내는 이른바 더 무너질 것도 포기 할 것도 없는 도시 뒤편의 한 평짜리 토방과도 같은 침울한 표현이 차라리 맞을 성싶다.
비 오는 날 그곳이 오히려 제철을 만난 메뚜기처럼 펄썩거리는 것은 더 이상 감출 필요 없는 밑바닥이 비로소 깨끗이 씻길 수 있는 특혜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구름 새로 허연 빛이라도 비추면 금세 때꼽재기가 희뜩희뜩 밴 몰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외면하고 말 궁상. 한때 그곳이 사랑 받은 명소였던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보문산은 역사적 장소로서도 유명하여 백제나라 산성도 있고 야외 음악당,전망대,놀이동산,수영장,공원,비둘기광장등 여타 위락시설에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초등학교 사회과목 부도에 나오는 대전의 전경은 보문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던 것이 92년도 엑스폰가 과학 공원인가 들어서더니 단번에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 이후론 그곳에서 TV전파를 탄 노래자랑이 열렸다는 소릴 들어보질 못했다.
꾸역꾸역 칠팔 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에 그곳은 이제 철지난 세상 속 풍상만이 그대로 남아있다. 흔해 빠진 전자오락실 하나 없고 처녀도사 철학관, 꽁보리밥, 순대 집, 닭발 집, 뻥튀기, 파전 집, 번데기, 소라, 솜사탕, 리어카에 실린 곰 인형, 고무풍선, 엿장수, 다리 짤린 몸으로 노래하는 카수, 하모니카 부는 장님, 조준 안된 간이사격장, 3꼴 꼴인 하면 선물 주는 농구 대, 뺑뺑이판, 전기구이 통닭, 망이 쳐진 야구장, 무조건 천 원 하는 옷핀, 떡판, 튀김 집, 노상을 뒤뚱대며 걷는 천 원짜리 오리 장난감, 싸구려 총.......
난 그곳에서 어렸을 적 안양유원지를 맛보고 암담했던 나의 칠십 년 대 말을 느낀다. 주제비(안양 본가 동네 이름)에서 그곳까지 기어 들어가 거지마냥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갖가지진풍경에 서울 놈들 구경만 하루 종일하고도 신이 났던 내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한다. 참으로 청승맞다. 70년대 말 난 우울증 환자였다. 아니 세상이 우울했다. 그때는 정말 화나고 답답하고 되는 것 하나 없는 정말 부자유스런 세상이었다. 좁은 공간에 뿌연 연기를 채우며 허락되지 않는 말들을 숨죽여 떠드는 퇴폐적 고통과도 같은 낭만을 즐겨야만 했다.
이를 낭만이라 할 수 있을까? 처절한 절망의 끝을 뒤져야하는 환멸의 시대 저편에 스스로 폐허왕국을 지은 염상섭처럼 혼 없는 육체의 무가치를 감당치 못해 나 역시 스스로 퇴폐적 무덤을 밤새도록 만들었다. 결국 짐승과 유령의 삶 길목에 서서 어느 것도 택하지 못한 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친구 석이가 탁자 위 내 손을 재떨이 삼아 담배를 비벼 끈 후에야 정신이 들었긴 해도 취하질 않았다. 지금 그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진정으로 취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잠을 청해도 잘 수 없어 아예 자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때 그 몰골을 지금 여기서 또 다시 본다. 처마 밑을 제대로 수릴 안 해 빗물이 똑똑 치고 들어오는 전주 집에 들어서면 한 편에는 대낮부터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 영락없이 과거에 나를 꼭 닮은 젊은 놈이 주인과 시비가 붙어 빗소릴 못 듣게 한다. “아줌마! 동동주 한 되만 더 줘.” 퀭한 눈빛이 잠은 이틀째 안 잔 그야말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씌워진 될 대로 되라 식 인상이다.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허우대가 멀쩡해도 왠지 왜소하고 쫀쫀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애들 아이스크림을 두 번 사줬다 세 번 사줬다 등등의 부류 건으로 젊은 부부가 칭얼대는 애를 끌고 가면서 싸우는 광경을 몇 번 목격하고 나서부터이다. 천 원짜리 선글라스를 비 오는 날 낀 우직한 사내, 거기에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삐죽 튀어난 청바지에 애 하나 들쳐 업고 시종 돈 얘기를 쪼아대는 모습을 이곳 보문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밑 둥지를 지나 산등성에 오르니 겨우 맘이 가라않는다. 시루 봉에선 아래가 온통 푸르다. 내려가기가 싫어진다. 밑 둥을 피해 갈 방법은 없을까. 다시 밑 둥을 향해 터벅터벅 내려오던 난 파출소 앞에 멈춰 섰다. 꼬마 놈이 억세게도 울어댄다. “선생님! 여기서 미아는 그냥 놓고 간 경우가 많아요.”
낭만!
사전에 나온 대로 적는다면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인 상태”로 정의된다. 나의 자의해석은 간략해서 이렇다. “참담한 현실과 부적절한 정서를 한번쯤 처절하게 느끼고 겪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 서정적 현실 또는 현실적 희망 ” 행복은 참담함을 겪지 않아도 어떤 경우 거저 얻어 낼 수 있는 행운도 있지만 낭만은 상대적 아픔이 있어서 그 아픔 한가운데 속에서도 또는 아픔을 밀치고 새로운 무형의 형상으로 승화, 포용, 대비되어 마음속 서정적 현실이 된다.
북극에서 낭만은 있을 수 있어도 행복은 없다. 즐거움만으론 낭만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다. 젊은 시절 고달픈 참담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난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을까. 젊은 시절 사고의 혼돈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삭막한 물질 속 뭐라 변명하고 살고 있을까. 지금도 시원치 않지만 보다 훨씬 들 된 인간에 넉넉지 못한 맘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그 시절의 암담함으로 지금 난 나만의 낭만을 느끼고 산다.
어쨌거나 내가 가끔 보문산 밑 둥을 찾는 건 풋풋한 과거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못생긴 과거를 들쑤셔 지금의 나를 다시금 일깨워 지워지는 낭만과 생동감 넘치는 현실을 맞고 싶어서이다. 아직도 눈에 밟히는 파출소 앞 그 꼬마 놈을 맘속에서 두고두고 애처로워 하는 건 차디찬 현실 속 또 다른 낭만을 잉태하기 위한 내 맘의 혼돈으로 여기고 이젠 덮어 둘까한다.(200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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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문산 밑둥 안 거치고 정상에 갈 수는 없을까요? 아마 안 되겠지요?
현실을 회피하기는 어렵지요... 낭만은 처절한 항쟁의 마음을 겪는 수순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보문산.
참 그리운 이름이네요.
제게는 6,70 년대 낭만만 기억 되고 지금의 보문산 이미지가 없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해지네요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어느 산이든 올라가 내려다보면 참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발 밑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다시 구차하고 너절한 밑둥으로 내려와 한몸이 되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좀 울적해지곤 하지요.
쇠락한 보문산의 모습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 대전에 다시 내려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만 그것이 당최....
대전과 인연이 있으신가 봅니다. 저는 젊을 적 대전과 무관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전 여자와 선을 보고 살림을 차리고 나서 이 동네에 취직도 하고 그리고 30년이 됐네요.
참 이글 쓸 무렵 ... 막 뭔가를 쓰고 싶어서 끄적거릴 무렵이고 그 쯤 수필이란 장르가 나와 유관하다했지요... 벌써 14년 지났네요.
대전여중, 대전여고 출신입니다. 대학진학은 서울로 했지만 약국도 대동에서 한 5년 했어요. 결혼하면서 저는 대전을 떴습니다. 선생님과 반대네요.
저는 광주 찍고 대전 찍고 서울입니다. ㅎㅎ
명문고를 나오셨네요. 제 근무처에 대전고 출신들도 많습니다.원장부터. 대동이라면 역근처 아닌가요. 제가 함을 짊어지고 갈 때만해도 대전괴정동은 논이었는데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그 자리에 들어섰지요... 참 너무도 빠른 변모...
네 그렇게 많이 변했다고 들었어요. 몇 년 전에 여고 대선배를 뵈러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바로 올라오는 바람에 변화된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목척교 옆에 대우당약국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괴정동도 그렇게 변했군요. 하긴 만년장이 유일한 온천장이었던 유성이 구로 바뀌며 번화가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