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북위는 이민족 왕조입니다. 상대적으로 다수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탄압정책이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국가의 경영을 위해서 전투에만 능한 선비계 귀족들 보다는 행정 경험이 있는 한족 지식인층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북위왕실을 특별나가 거부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한족 지식인들을 등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죠.
한편 한족지식인들은 서진정권이 어이없이 망하고 오호 16국의 혼란상을 겪으면서 왕조의 정통성보다는 혼란을 잠재우고 자신들을 지켜줄 주인이 필요했습니다. 때마침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한족 융화책을 쓰면서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북위로 한족지식인들의 투신 빈도는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한족 지식인층의 수가 북위 조정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면서 지배층이었던 선비족 내에 입장 차이가 벌어집니다. 즉, 전제왕권을 확립하려는 북위 왕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위 황제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지키고 북위황제와 동등함을 유지하려는 선비 전통 귀족들의 대립양상이었죠.
원래 북위의 황제가 전통적으로 강력한 전제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목민의 특성상 군주는 집단의 대표자이자 조정자의 성격이 더 강했고 유목집단 내 구성원들은 대체적으로 평등한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자 화북의 막대한 물자는 분배권을 가지고 있는 군주에게 귀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북위가 화북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군주 전제권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인 북위 왕실에서는 전제권 확립을 위해 갖은 정책을 다 벌이죠. 대표적인 것이 한화정책입니다.(이 외에도 여러 정책이 있습니다.)
반면 북위 전통 귀족들은 이러한 황제의 전제권 확립에 반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호의 경우 북위 왕실 한화 정책의 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위 황제가 최호에게 한화정책에 대한 일임을 맡기기도 했구요. 최호는 황제의 신임을 받기도 했고 조정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일종의 환상을 갖게 됩니다. 서진 정권 때 있었던 한족 문벌 체제를 말입니다. 그래서 한족 지식인을 등요하는데 갖은 힘을 쓰죠. 이것이 가뜩이나 황제 전제권에 반발하던 선비귀족에게는 큰 반감을 삽니다. 안그래도 한족에게는 종족적 차별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하는 짓마져 눈밖에 난 것이죠.
결국 사서 편찬 때문에 최호의 일족이 망했다는 것은 계기일 뿐입니다. 최호는 어떻게 보면 북위 황제와 귀족이란 고래싸움에 끼인 새우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