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아버지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최대한 시간을 내서 그동안 못한 일들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병세가 빠르게 진행된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위해 휴가를 내거나, 업무를 조정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평소대로 출근해서 중차대하지도 않은 업무를 하는 사이에 아버지의 시간은 빠르게 소진돼 버렸다. 그리고 깊은 후회가 남았다.
직장 다니며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은 잘 감당해 왔다 자부했건만, 부모의 ‘웰다잉’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제도적 지원이 없기도 했다. 육아휴직은 있어도 부모 돌봄 휴직은 없고, 장례 휴가는 있어도 돌아가시기 전에 쓸 수 있는 휴가는 없었다. 그나마 현재는 우리 대부분이 ‘정상가족’에 속해 있다. 병세가 깊어진 어른이 있다 할 때 여러 자녀들, 며느리와 사위들, 손자손녀들 중에서 최소 한두 명은 돌봄을 전담할 수 있다. 정 안 되면 번갈아서라도 어떻게든 감당은 할 것이다. 자녀들의 이모 고모 삼촌들이 도울 수도 있고, 사촌들끼리 서로 손을 보탤 수도 있다.
앞으로 닥칠 ‘인구절벽’ 사회에서는 어떨까? 외둥이로 자란 두 사람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비혼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아이는 하나인데 돌봐야 할 부모는 두 사람이다. 손을 나눌 형제자매도 없고, 심지어 이모 고모 삼촌 사촌도 없다. 오롯이 혼자서 두 사람의 웰다잉을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부모까지 살아 계신다고 할 때 이 젊은이가 책임져야 할 노인은 최대 6명이다.
물론 연금과 국가 의료 및 복지 시스템, 사회적 네트워크가 잘 작동하면 개인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시간의 문제는 남는다.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은 웰다잉을 해칠뿐더러 남는 사람들의 ‘웰빙’과 존엄에도 상처를 남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결혼, 출산, 양육 등의 행위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이득(benefit)과 비용을 고려해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했다. 이 논리는 사회 및 복지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의 이득이 금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간과돼 왔다. 정성 들여 키운 만큼 노후에 자녀들이 나를 잘 봉양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20230425 경향신문
첫댓글 수년전 아들이 최대6명이라했다.
인구절벽 웰다잉앞서 웰빙으로
강아지6마리를 양육아닌
사육한다. 내 일이 될줄
상상못했다.
오늘날의 웰다잉은...
다들 알고있지않나요?
차마 말하기 두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