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동
임응식(67)씨는 한국의 원로 사진작가다. 어떠한 장소이건 어느 때이건 안경너머로 조
용하 고 인자한 눈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인물이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이든 또는 창작인이든 그 전문가나 창작인이기에 앞서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어려운 표현을 빌릴 것도 없이 예술이란 것도 궁극에는 인간을 위
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양
자를 너무나 형식적으로 분리해서 해석하다보면 예술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는 명제가 모순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기 때문이다.
임응식씨는 사람됨됨이에 있어서 선이 굵고 뚜렷하다. 현실사회에서 그리 찾아보기 힘
든 인물이다. 사물을 응시하는 시선도 안정돼 있고, 예술과 생활을 혼동하지 않는 분
별이 확연하다. 때로는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다는 평을 듣기도 하나 그의 투지와 집념
은 건장한 체구 와 경상도어조 그대로다. 이와 같이 그의 강인한 의지가 그로 하여금
오늘의 중진작가가 되게 했고 한국사진예술의 개척자가 되게 했다. 예술을 한다는 것
은 어려운 일이다. 황무지에 예술을 심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어두운 밤에 횃불을 들어 누리를 밝히는 선구자는 언제나 고독과 艱難(간난)
을 싸워 이겨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백절불굴의 투지와 집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임응식씨는 평생토록 사진예술을 이 땅에 심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일반대중에게
는 사진예술의 인식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사단 형성과 후진양성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실로 임응식씨가 사진 예술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 남긴 그의 족적은
한국사진예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제 때는 물론 해방 후 1947년 부산에서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52년 부산임시 수도
시절 전국규모의 사단형성을 기도, 당시 기성작가 37명을 규합하여 한국사진작가 협회
를 설립했었다. 곧이어 씨는 끈질긴 교섭 끝에 한국 문화계에서 소외당해온 「사협」
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사단의 권익옹호에 힘을 경
주하면서도 임응식씨는 사진작가의 자질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작가의 국제적 진출을
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십이년간 집요한 투쟁 끝에 64년 국전에 사진부문을 증설하
는데 성공한 점은 사단을 위한 특기 할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전에의 진출 성
공은 어쨌든 12년, 아니 그 이상의 긴 세월동안 임응식씨가 사진예술에 대한 인식이
불모한 풍토를 개선하는데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좋은 예라 하
겠다. 뿐만 아니라 씨는 사석이나 공석에서 늘상 한국에 사진교육기관이 없음을 한탄
하여 동분서주한 끝에 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사진강의를 개설케 하였고, 그 이
듬해엔 이대에 사진학과를 두게 하여 주임으로 그 지도를 맡았을 뿐 아니라 미술학과
가 있는 대학에서는 빠짐없이 사진학을 가르치게끔 교섭을 벌였다. 임응식씨가 걸어온
이상의 몇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첫째로 그의 일생은 오직 사진만을 위해 살았고 둘째
로 작가라기보다는 사진예술개척자와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강하게 풍기고 있다고 봄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는지 모른다.
일제시 1930년대 초반 씨의 초기작품은 그당시 동양에서 풍미했던 인상파화가의 모방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로 PIG MENT 화법에 따랐기 때문에 몽롱함에서 결코 이탈
할 수 없었다. 서양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신즉물주의 운동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으
나 동양에는 미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30년대 후반에 와서 회화성을 다소 탈피한 인
간의 生活과 연결된 리얼한 사진이 태동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작품은 「복원신삼」 일
파의 「광선과 그음영」의 영향권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사진다운 사진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은 해방 후 비로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을 했다. 해방 후 그는 「사진은
그 본질이 기록성과 사실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 회화에 더부살이 해 온 사진을 과
감히 사진의 본연의 위치에 정립시키는데 맨 먼저 앞장을 섰다.
6?25이후 1955년 국제적 사진권위지 미국의 「포토 애뉴얼 55」에 발표된 「나목」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진이 회화에서 사진 본연의 자
세를 찾은 것은 그의 대표적 업적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공로라 하겠다. 그때부터 그
후 그의 작품은 사실성에 입각하여 상황(Situation)과 그에 대처한 인간이 그대로 나
타내는 상황처리를 날카롭게 포착한 이른바 리얼리즘의 경향을 걷고 있다. 특히 「생
활주의 리얼리즘사진」이라는 유명한 말을 그가 창안하고 주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
다. 이와 같이 그는 시대착오적인 로맨티시즘이나 자연주의 인상파에서 일찍 손을 씻
고 리얼리즘의 선구자로서 방향전환을 기하여 굳건한 사진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혀나가
기 시작했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종군취재한 전쟁참화의 일련의 작품이나, 인간의 실존
적 고뇌를 담은 서민생활의 작품등은 모두 그의 강한 리얼리즘 성향을 저변에 깊이 깔
고 있다. 60년 이후 그는 한국전통문화의 기록에 정력을 쏟고 있는데 다소 그의 경향
에서 빗나간 느낌도 없지 않으나 그의 경향에서 본질적인 이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날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렌즈에 담는다는 사실은 기록성만의 사진본질을 감안한다
면 그런대로 의의있는 일이라 하겠으며 한편 그는 한국의 고건축시리즈 「비원」 「경
복궁」 「종묘」 「칠궁」등을 촬영, 이미 출판되어 정리해 주고 있다.
요즘 유행되는 컬러사진에 대해선 씨는 창작의 적극성을 띠지 않는다. 현상 인화등의
작업은 컬러라보(Laboratory)에 의뢰해야하는 한국 실정이기 때문에 컬러는 작가의 진
정한 작품이 될 수 없다 입장을 취하기는 하나 컬러가 횡행하는 국제적 시대추이에 몹
시 신경을 쓰고도 있다.
임응식씨는 1912년 11월 11일 부산 동대신동에서 사남이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그림. 하모니카, 바이올린 등 예능분야에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을 보면
예술에 타고난 안목과 소질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사진에 관심을 두기는 14세 때 맏형
응룡씨로부터 박스카메라를 선물로 받았을 때부터다.
일본 「와세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2년에 아마추어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
할 셈으로 부산여광회의 吉川收二씨에게 지도를 받았다.
풍도체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1934년) 일본 「사진살롱」지에 「정물」이 처음으로 입
선했고 35년 강릉에서 강릉사우회를 창립하여 회장역에 피선된 그는 전조선사진 SALON
에 출품한 「뚝을 가다」, 「母子」가 입선되었다. 해방 전해에 동경일본지질학회에서
과학사진을 연구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 부산예술사진연구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했
었다. 6?25가 터지자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UN군사진보도반의 일원으로 종군, 같은 해
(50년) 경인전선보도 사진전을 열어 사진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게 됐다. 그
로 인해 임응식씨는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게되어 회장직을 맡았다. 또한 그해에
일본국제사진 SALON에 「병아리」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53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는 한편 서울대미대에 사진학 강의를 맡고 그 이듬해엔 이화여대
미대에도 출강하였고 55년에는 일본국제사진 SALON에 「여인」이 입선되었다. 56년 「
한국의 가족」사진전을 기획하여 개전한 그는 이듬해 미국무성과 Steichen씨에 교섭하
여 「THE FAMILY OF MAN」을 국내에 유치하는데 성공, 경복궁에 전람케 하여 사진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었다.
이것이 훗날 국전에 사진부문의 계기가 될 만큼 미술계인사들에게 인식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그후 61년 미술부문(사진) 서울市 문화상을 받기까지 그는 서울시문화위원?
이대강사? 문교부 대학내부시설기준책정위원?홍익대 강사 등의 공사다망한 생활을
해 왔는데 60년 일본 「세계사진연감60」에 「입모」가 수록되었다. 특히 대한민국 문
화예술상 (72년)을 수상했고, 73년부터 78년까지는 후진을 양성코자 중앙대학 예술대
학에서 사진과 교수로 일을 했다. 또 임응식씨는 비상한 정력가임을 알 수가 있다. 다
소 사회생활에 치우친 느낌도 있으나 그런 그의 사회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 사진에
대한 인식이나 사단의 발전은 그토록이나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사진의 본질이 기록성과 사실성에 있다」는 그의 한결같은 태도는 그에게 있어 사진
에 대 하나의 신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