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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태의 수필 세계
삼단 구성의 변용과 경험의 은유적 융화
-박순태의 《사이시옷》(소소담담, 2023)-
여세주(문학평론가)
1.수필가의 전략
수필은 작가의 경험 세계를 특정한 언어형식으로 형상화하여 어떤 의미를 드러낸다. 경험 세계, 언어형식, 의미는 수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수필에서는 시나 희곡이나 소설과 달리 작가의 경험 세계가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시나 희곡이나 소설에서는 작가의 경험이 작품 창작의 밑거름이 될 뿐인데, 수필에서는 작가의 경험 세계가 굴절 또는 전환되지 않고 작품 속에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에서 경험 세계는 작품 외적 요소이면서 작품 내적 요소다. 구성과 서술 형태(진술방식, 시제, 시점 등)와 문체 등은 모두 언어형식에 포괄된다. 문학에서 구성은 사유 구조의 차원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담론도 언어학의 문제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언어형식에 해당한다. 작품의 의미는 경험 세계에 관한 작가의 해석 결과인데 작품의 주제가 된다.
수필의 세 가지 요소 모두에서 창작 전략을 모색하면 가장 바람직하겠으나, 수필가에 따라서 특별히 주안점을 두는 것이 다르다. 수필가의 대다수는 문학의 인식적 가치를 중시하여 작품의 의미 부여에 치중한다. 경험의 해석을 통해 삶의 의미나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자 한다. 독자들도 수필작품을 읽고 나서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경험 세계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써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 작가의 세계 인식을 통해 인식 지평을 넓혀가고 삶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를 넘어 언어형식에 창작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사물수필이나 시넥틱스적 유비 구조 등은 경험 세계나 언어형식의 창조에 작가의 전략을 집중한 경우다.
박순태는 언어형식을 중시하는 작가다. 그의 첫 수필집 《사이시옷》은 그런 경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엇에 대하여 말할 것인가’나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창작력을 집중한다. 언어형식 중에서도 구성과 진술 방식에 작가의 의도적인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2.삼단 구성의 변용
수필을 쓰는 데 어떤 정형화된 구성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의 개성에 따라 수필의 양식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필 쓰기에서 구성 방법을 유형화시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수필 쓰기의 양식화된 구성을 추출하려고 하는 것은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다.
자신의 경험 세계를 해석하여 의미화하는 글쓰기가 수필이다. 그래서 수필 쓰기에 입문하는 이들은 자신의 경험 세계를 충실히 기록한 연후에 그 의미를 찾아 마무리하는 미괄식 구성에 주로 의존한다. 박순태의 수필들은 다르다. 《사이시옷》에서 대다수 작품이 ‘서두-본체-결미’라는 3단 구성방식을 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처음-중간-끝’이라는 희곡의 구성방식으로 제시된 3단 구성법은 논문이나 에세이와 같은 논리적 글쓰기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글쓰기에 활용되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견고한 구성법이기 때문이다.
한국 수필은 원래 단일구성의 신변잡기적인 글쓰기로 출발하였으나 서구의 에세이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3단 구성법을 종종 변용시켜 활용했다. 박순태도 이를 다양하게 변용하여 작품을 매우 탄탄한 구조로 만들어내고 있다. 서두와 결미가 수미상관을 이루도록 구성한다. 결미 부분을 없앤 변용을 보이더라도 서두는 살려둔다. 서두 쓰기에 정성을 쏟는 구성 방법은 매우 바람직하다. 독자들이 작품을 끝까지 읽게 하려면 우선 제목에, 그리고 첫 문장과 첫 단락에 승부수를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순태 수필의 서두는 상당한 효용성을 지닌다. 박순태 수필의 서두는 주로 멘탈 모델mental model을 형성한다. 즉,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3단 구성의 견고함을 변용한 박순태의 수필은 의외로 상당히 많다. <반풍수라도>, <나방과 나비>, <고칠병>, <귀심초>, <돌사리>, <덩굴>, <우리동네 개들>, <양극전류>, <산토끼, 집토끼>, <감실할미>, <오래살이>, <특별지도>, <우리 동네 개들>, <속잎>, <죽방렴> 등등이 3단 구성을 변용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의 구성방식은 박순태 수필의 소중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는 감성보다 논리를 중시하는 작가의 수필관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적돌기>의 서두는 한 문장이다. “생존 경쟁의 터, 뭇 생명체는 적응과 진화로 존재를 이어간다.” 이는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멘탈 모델로서 경험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 작품의 서두에 멘탈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자칫 작품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제한하는 단점을 지니기도 하지만 이에 맞춰 작품 이해를 쉽게 유도하는 장점을 지닌다. 생존 경쟁이 이루어지는 지구에서 모든 생명체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한다는 사실은 상식에 가까운 지식이다. 그런데도 작가가 이것을 서두에 던진 의도가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한다. 상식적 지식을 서두에 던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펼쳐내려고 하기에 이 문장을 서두에 던져두었을까, 라는. 이 작품의 본체부에서는 거미의 생존력과 곱사등이 삼촌의 생활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날개가 없어 생활반경이 좁은 거미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방적돌기에서 점액을 뿜어내어 끈끈한 거미줄 덫을 치는데, 그 과정을 매우 촘촘하게 설명하면서 거미의 생존 능력을 서술한다. 이에 병치시켜 곱사등이 삼촌의 끈덕진 삶을 이야기하면서 삼촌의 도움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사연을 풀어낸다. 그러나 거미의 생존력과 곱사등이 삼촌의 생활력에 관한 이야기를 유비 구조로 병치시키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구성은 수필의 자연스러움에 오히려 흠집을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미 부분은 서두와 다르게 서술의 부피를 꽤 크게 늘려 놓는다. 거미의 생존력과 삼촌의 생활력을 은유적으로 결속시키면서 작품을 마무리한다. 방적돌기로 한올 한올 거미줄을 쳐서 험난한 생태계를 당당히 살아남은 거미와 제화 기술을 익혀 한땀 한땀 가죽을 기우며 살아온 삼촌을 은유의 관계로 포갠다.
<심화봉송>의 구성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경험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서두에서 미리 드러낸다. 서두가 멘탈 모델의 구실을 한다. 참았던 울화가 터져 나온,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지는 만큼이나 용기 있는 목소리라고 하는 작가의 판단이 그것이다. 본체부에 배치한 경험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문화예술회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학춤 공연이 절정을 막 지났을 무렵 진행자가 지방자치단체장을 소개하고, 그 단체장은 인사말까지 하고 바로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관중들이 비난하는 함성을 쏟아낸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현직 검사가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이른바 미투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두 사건은 전혀 관련성이 없는 듯한데 작가는 기발하게도 ‘불이익을 감수한 용기 있는 목소리’라는 은유적 유사성으로 엮는다. 작가는 실종된 문화의식에 대한 항의나 성추행 범죄의 폭로가 단발성으로 끝나서는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맺는다.
박순태의 수필은 이처럼 하나로 꿸 수 없을 것 같은 매우 이질적인 경험들로 짜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덩굴>에서는 두 개의 스피치 학원을 운영할 때 운전기사가 낸 교통사고, 광고업과 전문건설업에 뛰어들었던 경험과 직원의 추락 사고, 증권 투자 경험, 홍게의 대이동 행렬, 스프링복의 질주에 관한 이야기를 병렬연결로 배치해 놓고 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이런 경험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런 의문이 호기심으로 작동하여 독자들에게 작품 읽기를 독려한다. 그 의문은 결미 부분에 이르러 통쾌하게 풀린다. 숱한 어려움을 겪어온 작가 자신, 그리고 홍게와 스프링복의 삶이 덩굴의 성질을 닮았다는 것이다. 매우 이질적인 여러 경험을 이렇게 통합해 내는 데서 독자들은 감동한다. 이질적인 경험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수필가 박순태의 은유적 상상력과 해석력이 무척 놀랍기 때문이다.
3.은유적 상상력
박순태의 수필에는 ‘은유적 사상metaphonic mapping’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은유란 문장 내의 어구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수사법 차원이 아니다. 단락과 단락의 내용이 은유 관계를 이루는 ‘은유적 구조’를 의미한다. 어느 단락에서는 근원영역(보조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을, 어느 단락에서는 목표영역(원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을 서술하면서 병치시켜 놓은 구조를 가리킨다.
<사이시옷>은 <!와 ?>와 함께 부부의 동반자적 관계를 은유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이시옷이 두 단어를 결합하는 고리 역할을 하듯이 부부 사이에 존재하여야 할 고리를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가는 부부관계를 나뭇가지와 잎의 관계로 은유한다. 부부의 이상적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비유 단락을 병렬시킨다. 잎이 바람에 나부낄 때는 나뭇가지는 배경음악이 되어 주고 곡예를 할 때는 신경줄을 놓지 않으면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상상을 끌어낸다. 그리고 사이시옷이 들어가 합성어가 되는 낱말 ‘나뭇잎’으로 온전한 부부의 모습을 은유하기도 한다. 합성어 ‘나뭇잎’은 둘이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는 일심동체, 어느 쪽이 다른 쪽에 종속되지 않는 동반자적 평등 관계로 합성되어 있다는 서술 전체가 온전한 부부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작가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뭇 나뭇가지와 잎의 관계로 비유한다. 여기서 사이시옷의 어법적 기능에 대해서는 따질 필요가 없다. 형태적으로 두 단어가 사이시옷으로 연결되듯이 부부를 평등하게 연결하는 고리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아내를 종속적 관계로 치부해온 지난날을 반성한다.
<!와 ?>에서는 아내를 느낌표로, 작가 자신을 물음표로 은유한다. 느낌표와 물음표의 차이를 서술한 부분은 아내와 작가 자신의 성격 차이를 말하기 위한 대체 서술이다. 아내와 작가의 특성을 느낌표와 물음표로 기발하고 명쾌하게 비유한다. 미국 광고회사가 사용한 기호 ‘인터러뱅=?!’을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이 마침내 풀려 경이로운 성취를 맛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 단락은 성격이 다른 부부의 어울림 효과를 은유한다. 즉, 물음표가 없는 삶에는 그 어떤 느낌표도 찾아올 리 없다는, 부부 사이의 역학적 관계를 은유적으로 말하는 단락이다. 이처럼 단락 전체를 근원영역의 서술에 할애하는가 하면, 부부가 시소게임을 하며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면서도 줄곧 느낌표와 물음표로 비유하여 서술한다.
<집토끼, 산토끼>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토끼는 유권자인 국민을 은유한다. 어느 정치집단의 집토끼는 다른 정치집단의 산토끼인 셈이다. 집토끼와 산토끼는 서로 교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서로 담을 치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다. 현실 상황의 비판적 지적에 머물지 않고 두 종류의 토끼 마음을 사로잡는 길이 국가 운영의 공학이자 과제라는 비전을 제시하는 데 이른다. 이른바 통합의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비판이다. <우리 동네 개들>은 앞집의 누렁이 부부, 뒷집의 셰퍼드 한 쌍, 옆집의 도사견 한 마리의 행동 특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개들의 행실은 그들을 기르는 주인을 닮는다고 하면서 이웃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개의 행동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은유한다.
<에디슨의 셈법>은 북한의 작은고모를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가족 이야기로 작품의 씨줄(통합체)을 삼았다. 그 날줄(계열체)로 남북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현실과 남북통일의 염원에 관한 서술을 결합한다. 여기서 ‘에디슨의 셈법’을 남북통일의 마땅한 이치로 제시한 은유는 압권이다.
하나에서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되고, 하나에서 하나를 뺏을 땐 둘이 된다는 게 에디슨 셈법이다. 에디슨은 선생님의 호통에 찹쌀떡 두 개를 붙이면 하나가 된다고 논리를 폈다. 이번에는 찹쌀떡 하나를 두고 절반을 잘라서 두 개가 됐다며 나름의 논리로 설명했다. 그 셈법에 따르면 기다림의 몽유병 환자들이 간단히 치료될 것만 같다.
-<에디슨의 셈법>에서
에디슨의 논리를 빌려와 남분 분단을 ‘1-1=2’로, 남북통일을 ‘1+1=1’로 이해한다. 이 단락 전체가 남북분단의 현실과 남북통일의 해법에 대한 은유의 근원영역 구실을 한다. 작가는 남북통일의 의미를 이와 같은 은유로 간단하고 쉽게 풀어냄으로써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투자냐, 투기냐>는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를 온통 은유로 치장하여 알레고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텍스트 차원으로 확장된 은유가 알레고리다. <화중지교>는 동백꽃, 벚꽃, 밤꽃의 암술과 수술을 치밀하게 관찰하여 그들의 생식生殖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작품이다. 암술과 수술의 정교情交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성적 교합 본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똑똑한 바보>, <감별사>, <푸석돌>, <속잎>, <계절의 담을 허물다> 등 은유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은 많다. 이들 작품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은유적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박순태는 은유적 글쓰기의 고단수다.
4.삶의 갱신
박순태의 첫 수필집 《사이시옷》에는 삼단 구성을 활용하여 매우 안정적인 구조를 확보한 작품들이 대다수다. 이 구성법은 가장 탄탄한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자칫 단조로울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개의 경험을 병렬시켜 그 단조로움을 상쇄시킨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삶의 경험과 폭넓고 풍부한 지식을 깊이 있는 사유와 은유적 상상력으로 융화시켜 작품의 응집성과 완성도를 높인다.
첫 수필집임에도 이처럼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성과로 축적할 수 있었던 데는 ‘제대로 된 수필’을 쓰고 싶은 작가의 강한 욕망과 희망이 작용한다.
꿈 하나를 마음에 심었다. 양질의 삶을 누리는 이들이 부러워서 행한 일이다. 갈가리 잡념이 잡초처럼 번지는 마음 밭에 씨를 묻었는지라 싹틀 기미가 나타나지 않는다. 잡초를 먼저 제거한 후에 우량종 씨앗을 심어야 하건만 선후가 바뀐 우를 범했던 게다. 삶의 질적 농도를 높이려고 생뚱맞은 짓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풍수라도>에서
작가가 수필 쓰기를 하게 된 동기를 말하고 있다. 자발적인 욕구와 희망을 토대로 자아실현을 위해서 수필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 양질의 삶을 누리는 이들이 부러워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질 높은 삶을 살아가는 반열에 올라 타자와 차별되기 위해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장 보드리야르의 ‘차이적 소비’의 개념에 비의比擬 하면 ‘차이적 글쓰기’라고 하겠다. 박순태의 이 진솔한 고백은 수많은 수필가에게도 숨기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수필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자아실현의 모습일까? 그것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어떤 특정 집단에서 수필가라는 배타적인 특성을 갖춤으로써 타자와의 차별을 보여주려는 모습으로 수필가를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지 않을까. 타자와의 차별화 욕구가 박순태에게 문학에 심취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박순태는 지난날의 태만과 허물을 성찰하는 데서 글쓰기를 시작한다고 했다. <글 내시경>에서 말했듯이 세속적인 오락을 대신하여 글쓰기 기초를 다지기 위한 문학 서적 읽기가 여가활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박순태는 수필가 이전에 사업을 하며 도전적인 삶을 살았고 부딪쳐 오는 역경도 많았지만 잘 헤쳐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일과의 무게 중심은 일몰 후의 고스톱을 치는 일 등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세포적인 삶이었다고 후회한다. 지난날을 회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 온다고 털어놓는다. <단세포>에서는 그런 삶이 고급스러운 비유로 그려져 있다. 수필 쓰기를 단세포 무리에서 다세포군으로 전환하려고 세포 분열하는 숨 가쁜 시간에 비유한다. <나비와 나방>에서는 나방 같은 삶에서 나비 같은 삶으로 탈바꿈하는 시간으로 비유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수필 쓰기란 지나온 삶의 갱신이며 새로운 삶의 출발이다. 세속적인 삶을 청산하고 양질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박순태의 《사이시옷》(소소담담, 2023)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