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내용인지? 먼저 내용을 파악해보자. 내가 죽어도 좋다라고 마음을 단디 먹어야 남을 죽일 수 있다.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다. 남을 없애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 무언가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다. 살인욕을 느끼는 주체와 대상이 불일치 한 것이다. 일단 김수영이 제유법을 잘 쓴다고 하였다. 제유법은 체계적이어서 사회나 역사에 어울린다. 살인의 대상은 어느 개인일 수도 있고 사회나 국가의 없어져야할 대상이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나는 부인을 우산으로 때려눕혔어. 왜? 사건은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사건은 있어. 그런데 집에 와서는 마음이 꺼림칙해. 혹시 이 일을 누가 보았는가, 하고. 1연에서는 남을 죽이면 자기도 기꺼이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는데 여기와서는 그러질 못하다. 앞 말과 지금 이 말이 일치가 안 된다. 일종의 반어다. '아니 그보다도'라는 말은 주체가 더 위축되어 지우산을 걱정하는 못난 사람을 말한다. 일단 김수영이 제유법을 잘 쓴다고 하였다. 제유법은 체계적이어서 사회나 역사에 어울린다, 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 시를 제율 본다면 사회적인 어떤 현상에 대해 응당 죽임으롯써 처리해야하는 어떤 사건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은 들지만 막상 그리하지 못한다, 라는 주체의 의지박약이아 행동의 불일치를 말하고, 이 나약한 주체는 기껏 지우산이나 아까워하는 아주 속물적인 그런 주체로 그렸다. 그러니까 주체와 세계(대상)의 일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쯤해서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고민해야 한다. 죄가 있다 벌을 주어야 한다. 즉 죄와 벌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말이다. 번어는 통일된 언어거 분열된 세계를 제시하는 데서 비롯된 정서적 효과인 셈이다. 김수영은 平(평)하지 못했다. 무릇 사물이 평평함을 얻지 못하면 우는것이라고 한유는 "송맹동야서"에서 말했다. 그래서
비정합적인 언어 운용의 원칙을 다음가 같다. 1) 다른 시어, 시행, 시련과 연관을 의도하지 않는, 모든 차원의 배제: 비정합적인 언어는 한 가지로 수렴되지 않는 분산을 특징으로 한다. 2) 언어의 질감이 아니라 통사적인 구문에 대한 배려: 언어는 음운 차원에서도 음절 차원에서도 통일되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구문을 배치하여 전언을 통일하는 경우가 많다. 구문의 통일은 주체가 세계와 자신을 매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3) 주체와 분리된 채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진행하는 진술: 이러한 진술은 주체와 세계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데 유력하다. 4) 개방된 시공간의 창출 : 주체로 수렴되지 않은 세계는 그 자체로 곤혹스럽다.
‘한나 아렌트’ 책 낸 번스타인 교수 50년대 전체주의 주목한 아렌트 우리 시대 근본악 분석에도 유효
난민은 과연 불필요한 존재인가 예전 유대인·집시들 처지 떠올라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모든 사상가나 작가에 대한 관심은 부침을 거듭한다. 20세기 최고의 정치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독일 유대인 출신인 미국 정치 철학자·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도 그런 경우다. 최근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과 같은 저작,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논란이 많은 이 개념에는 ‘괴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겼다. 아렌트의 추종자들은 폭력·혁명·진실·거짓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아렌트를 읽어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보다 명료하게 보인다고 주장한다. 아렌트 붐에 힘입어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가 출간됐다. 저자는 리처드 번스타인 뉴스쿨(NSSR) 석좌교수, 역자는 한국아렌트학회 회장인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다.
견강부회(牽強附會)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 ‘촛불혁명’ 혹은 ‘촛불시위’도 아렌트의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국내 학계 일각에서 제기됐다. 저자는 한글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한국사에서 나타난 2016~17년의 비폭력적인 촛불시위 같은 사건들도 공동 행위를 통해 권력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현상인 혁명 정신의 발현을 보여줍니다.” 저자를 전화로 책 내용에 관해 인터뷰했다.
아렌트의 젊었을 때 모습. 유대인이었으나 시온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진 한길사]
질의 :당신은 진보 사상의 아성인 뉴스쿨(NSSR)에서 한나 아렌트를 만났다. 그는 어떤 인간, 학자였는가.
응답 :“내가 신참 교수였을 때 그를 만났다. 놀라운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박식하고 매사에 너그러운, 사물에 대해 정말 호기심 많은 인물이었다. 내 연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질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미국에서 부활했다고 하는데 이유가 뭔가.
응답 :“한나 아렌트가 1975년 별세했을 때 그를 연구하는 학자는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소수였다. 물론 그때도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오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 불러일으킨 논란으로 한나 아렌트는 유명했다. 1975년 이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아렌트 사상의 풍성함을 발견하고 있다. 그의 저작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됐다. 한국·중국·유럽을 비롯해 세계 어느 곳에 가건 많은 사람이 그의 사상에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아렌트는 인기 있는 주제다.”
질의 :미국의 경우에는 혹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때문은 아닌가.
응답 :“트럼프가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정치와 거짓말의 관계를 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가 1950년대에 이미 말한 것들은 2018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유관하다. 세계 곳곳에서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심지어는 전체주의적인 징후들이 발견된다. 아렌트는 ‘어둠의 시대’를 분석했지만, 그는 영감을 주는 빛(illumination)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민의 참여를 통한 운동으로 보다 민주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사상가다.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new beginnings)’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저자 리처드 J 번스타인
질의 :아렌트는 한국의 통일에 관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인가.
응답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아렌트는 행동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다만 논의가 필요한 문제들을 드러낼 뿐이다.”
질의 :악(惡)의 문제에 대해 아렌트는 어떤 입장이었나.
응답 :“많은 사람이 아렌트가 악의 이론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본다. 그는 평생 악의 여러 측면을 탐구했다. 특히 ‘근본악(radical evil)’에 주목했다. 그가 생각한 근본악은 어떤 사람을 완전히 ‘불필요한(superfluous)’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유대인·집시·동성연애자를 염두에 두고 근본악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이 세계의 수많은 난민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민들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아렌트는 우리가 사는 정치체제에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다. 그에게 악은 바이러스나 곰팡이처럼 확산하는 것이었다. 난민에 대한 학살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아렌트는 악의 확산을 예견하고 경고했다.”
질의 :악이라는 게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善)의 부재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응답 :“아렌트는 악이 세상에 실재한다고 봤다. 전체주의를 체험한 아렌트는 악이 선의 부재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질의 :아렌트에게 영감을 받은 정치는 어떤 정치인가.
응답 :“아렌트에게 정치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우리는 정치의 세계에서 협상하고 타협해야 한다.”
[책과 삶]불안한 미래가 불러낸 ‘과거에 대한 향수
레트로토피아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정일준 옮김 아르테 | 272쪽 | 2만원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로 주목받은 중간선거가 치러졌다. 민주당이 8년 만에 하원을 탈환하면서 트럼프의 일방적 국정운영에도 제동이 걸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유있게 상원 과반수를 확보했고 경합지역 주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트럼프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른 이유다.
사실 ‘중간평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트럼프는 만 2년이 채 되지도 않은 기간 동안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각국 지도자들이 트럼프 특유의 화법을 따라하는 ‘트럼프화(trumpified)’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반대자들의 의견을 덮어놓고 ‘가짜뉴스’로 치부하기, 이민자나 난민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일관하기, ‘아메리칸 퍼스트’처럼 노골적으로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하기 등이 그 예다.
이제껏 여러 석학과 전문가들이 ‘트럼프 이후의 세계’에 대해 진단을 내놓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이 살아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바우만은 ‘유동적 현대성(liquid modernity)’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에 관한 이해를 크게 확장했을 뿐 아니라 세계화, 테러리즘, 사회적 배제, 사랑, 성 등 폭넓은 주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대표적 지성이었다.
|폭력으로의 회귀
소외라는 공포가 유발한 ‘분노’경악스러운 ‘묻지마 폭력’ 양산
|부족으로의 회귀
트럼프의 차별·우파 포퓰리즘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 키워
|불평등으로의 회귀
고삐 풀린 자본을 방조한 정부노동자의 상대적 박탈감 확대
|자궁으로의 회귀
경쟁도 방해도 없는 안전한 곳자신만의 공간으로 도피 원해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언’‘유토피아’ 아닌 ‘판토피아’로 참여·실천으로 현실을 바꿔라
<레트로토피아>는 그가 지난해 1월9일 91세의 나이로 타계한 뒤 한 달쯤 후에 출간된 책이다. 시간적으로 트럼프라는 예기치 못한 리더의 등장,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충격을 준 브렉시트라는 맥락에서 책이 쓰였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작이 된 이 책에서 바우만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단계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 즉 ‘레트로토피아(retrotopia)’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째서일까. ‘유토피아’가 존재한다거나, 또는 노력하면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은 붕괴된 지 오래다. 바우만의 분석은 이렇다. “불안정하고 너무 뻔해서 신뢰할 수 없는, 미래에 더 좋아질 거라는 대중의 희망에 투자하기보다, 그 희망을 흐릿하게 기억되는 과거, 추정된 안정성과 그로 인한 신뢰성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과거에 다시 투자하기로 한 셈이다.” 한마디로 불안한 미래가 아니라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지구상에 만연한 폭력을 들어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회귀하고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홉스는 인간의 폭력성을 통제할 강력한 국가권력, 곧 ‘리바이어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리바이어던의 약속대로라면 폭력은 진작에 줄어들었어야 한다. 하지만 무기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모른다. 정부의 방관 아래 총기 등 소형무기 거래도 활발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지난달 22일(현지시간)에도 이민자들이 빼곡히 탄 트럭은 미국을 향했다.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울타리를 쳐서 불행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은 피신처에 숨어서 핵전쟁을 피하려는 행동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폭력은 미디어의 욕망과 결합되면서 날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시청률을 갈망하는” 미디어들은 “폭력을 우리의 관심사로 밀어넣는다”. 이전 저작들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사유한 바 있는 바우만은 이번에도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해 예리하게 서술한다. 그는 인터넷이 어떻게 “유동하는 현대라는 조건 아래서, 피할 수도 없고 절대 타협할 수도 없는, 소속감과 자아 형성이라는 열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지, 또 ‘좋아요’와 ‘공유하기’를 반복하는 행위가 어떤 감정을 낳는지를 설명한다.
최근 일어나는 폭력의 양상은 공격 목표나 동기 모두 불확실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는 ‘분노’야말로 자살테러나 무차별 살인 등과 같은 폭력의 근본 원인이라면서 “견딜 수 없는 창피함과 굴욕감, 또는 사회에서 타락하고 배제된다는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의해 생겨난 공격성”을 언급한다.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 거제도 ‘묻지마’ 살인 사건 등 근래 한국 사회를 경악에 빠뜨린 범죄들에도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두번째로 지적하는 ‘부족으로의 회귀’는 트럼프 당선을 떠받치는 사회심리적 구조와 맞닿아 있다. 다름 아닌 민족주의, 인종차별, 우파 포퓰리즘의 논리다. “유동하는 세계 엘리트층”과 “배제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현지 주민들” 사이의 간극은 넓어지기만 한다.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 의해 “장벽을 세우고 국경을 강화해 외국인을 본국으로 인도하자”는 정책이 힘을 얻는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놓고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며 이에 호응한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내는 것, 즉 “이방인이 사라진 미래의 국가”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바우만은 “자국 영토의 안전을 바라며 실제로 울타리를 쳐서 세계적인 불행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은 고작 가족 피신처에 숨어서 핵전쟁을 피하려는 행동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일갈한다.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동이라는 얘기다.
세번째로 언급하는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인류와 세계의 진보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문제다. 바우만은 불평등 확대의 “핵심 용의자”로 몇 가지를 지목한다. 세계화로 자본 규제가 풀렸는데 국가는 이를 방조했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의존적 관계가 깨졌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더 이상 소비자이기도 한 노동자의 구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빈곤율을 줄이거나 고용을 늘리는 일에 관심이 없다. 상대적 박탈감도 불평등 심화에 기름을 붓는 요인이다.
국가나 규범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소비사회 물결 속에서 “본능과 욕구의 노예”로 전락했다. 여기서 마지막 “자궁으로의 회귀” 현상이 나타난다. 경쟁자도 없고, 도전이나 방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장소인 자궁으로, 다시 말해 “자기염려와 자기지시라는 대피소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작지만-날마다-만족감을 주는 도구를 사용해 감당할 수 없는 예측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느라 바빠 보인다”는 서술은 요즘 우리 사회의 키워드인 ‘소확행’과도 직결된다. ‘성격 장애’인지, ‘사회 장애’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나르시시스트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건강관리에 대한 집착, 자기계발, 심리상담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14년 영국 리즈의 자택에서 만난 고 지그문트 바우만. 경향신문 자료사진
바우만은 ‘홉스, 부족, 자궁으로의 회귀’라는 세 가지 흐름에는 비슷한 구조가 놓여 있다고 본다. 바로 “분통 터질 정도로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맺음말에서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을 인용해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는 청년들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 공정한 경제 모델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집단적 사회운동을 불신하는 바우만은 각 개인이 참여하고 실천하는 현실 개선형 유토피아, ‘판토피아(pantopia)’가 대안이라고 본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바우만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영국 리즈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학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확보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의 글이 고루한 학술적 문체의 틀에서 비켜서 있을 뿐 아니라, 읽는 이와 적극적으로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트로토피아> 역시 고담준론과는 거리가 있다. 혹시라도 바우만의 독자적 서술보다 다른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이 더 많은 것 아닌가 싶다면 역자인 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의 설명을 참조하면 좋겠다. “그(바우만)가 지은 사상의 집에는 여러 사상가가 동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바우만이 소환하는 여러 사상가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은 뤼트허르 브레흐만이다. 브레흐만은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저널리스트로, 2016년 발표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김영사) 정도가 대표작이다.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모두 경험한 노학자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어느 패기있는 젊은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극단의 한 세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학자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 끝났다. 경향신문과 박용진 의원이 제시한 내부문건을 보면 속된 말로 빼박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모든 사람이 공범이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물론 관계 회사, 대응안을 컨설팅해주는 외부감사인인 회계법인들과 변호인, 분식이 아니라고 의견서를 써준 전문가, 무심했던 이해관계자까지.
문건을 보면 기업은 자본잠식을 막기 위해 실질지배력과 공정가치 서열체계 및 콜옵션 분류방식을 이용했다. 또한 해당 회사를 감사한 회계법인은 콜옵션의 처리방식에 대한 대안까지 친절하게 제시했다. 각종 수치와 평가금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처럼 치밀한 의도가 있으면서도 의도적인 공시누락이 아니며 적절한 가치평가라고 시종일관 변명한 삼바 측과 변호인 측은 웰메이드 영화의 주역이다.
아, 모든 구성원이 공모한 행위에 방어수단이자 면죄부를 준 국제회계기준의 애매함을 빼먹었다. 이 상황에서도 ‘국제회계기준 내의 정당한 회계처리’라고 말하는 분이 계시는가? 사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국제회계기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쪽은 기업 측이었던 것 같다. 회계사도, 교수도, 규제당국도 기업이 착점을 한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으리라. 마치 알파고처럼 사람들에게 화두를 제공한 셈이다. 실제로 공정가치서열체계에 의한 가치평가와 실질지배력에 대한 연결범위의 모호함을 이용한 회계처리를 몇몇 기업들이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국제회계기준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된다. 회계기준은 사용하는 주체의 의지가 투영된 것뿐이다. 국제회계기준에서 부여한 경영자의 재량권을 남용한 주체 탓이지, 진정으로 기업의 실질을 올바르게 보고하기 위해 국제회계기준을 사용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또한 이번 사건을 통해 원칙 중심의 회계처리는 변명만 정교하고 그럴듯하면 분식으로 잡아낼 방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무리를 해서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했던 걸까? 초일류 글로벌 기업의 윤리의식은 어디로 실종된 걸까? 기업을 돕기 위해 사면팔방으로 뛰어다닌 후원자들은 어떤 동기로 움직인 것일까?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의 회계투명성이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규제당국의 위원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기업의 사외이사로 간다. 회계감사는 형식적이고 심지어는 감사인이 대안과 숫자를 제공한다. 기업의 감시기구와 규제당국, 회계업계의 많은 관계가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국제회계기준은 변명과 모호함의 근거가 되며 새롭게 도입한 회계개혁법안은 특정 이해관계자의 배만 불리고 기업에는 비용만 야기할 뿐 정보이용자 측면에서 진정한 회계투명성의 제고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것인가? 돈만 잘 벌고 수익만 창출하고 고용을 많이 하면 면죄부를 주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은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돈과 가시적 성과와 성공만이 중요한 가치요소일 뿐이다. 너무 급격하게 성장해서일까? 과정의 중요성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경쟁, 성공, 일등, 세계화, 최고, 그들만의 이너서클….
모든 구성원의 뼈를 깎는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당사자인 기업과 운명공동체가 된 회계법인, 기업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은 소액주주나 내부감시기구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좌우나 보수·진보의 개념이 아니다. 투명과 불투명,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다. 이제 부끄럽고 치욕적인 숫자(분식회계 금액)와 순위(우리나라 회계투명성 순위)는 이별하고 싶다. 과정을 공개하고 정보접근성을 높이자. 윤리적 사고와 공시 및 회계정보의 중요성을 알리자. 학연, 지연 등 관계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벗어야 한다. 결국 투명성을 높이려면 범국민적 차원에서 결과 위주의 사고방식을 전환하고 이해관계자 간의 정보비대칭을 해소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삶의 향기] 만나지 않아도 가르침을 주는 멘토
정여울 작가
이 세상에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저절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있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영혼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에게는 그런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학연과 지연이 아닌 오직 내 마음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바로 그 자리에 든든한 거목처럼 서 계시는 분들이다. 첫 번째 스승은 문학평론가 황광수 선생님이다. 우리 사이에는 무려 3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세대 차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선생님께 어처구니없는 농담도 스스럼없이 던지고, 가족에게도 말 못한 비밀스러운 아픔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선생님 앞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과 겪지 못한 사람의 차이마저 사라져버린다. 선생님과 나는 얼마 전부터 ‘향연(饗宴: Symposium)’이라는 테마로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이건 ‘둘이서도 향연이 가능하다, 공부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 있다면!’이라는 나의 뻔뻔한 자신감에서 기획된 작은 세미나다.
우리 두 사람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두 사람의 향연’을 마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시작하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고전의 숲을 오래오래 함께 걸어볼 작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처럼 성대한 연회를 베풀 수는 없지만, 둘이서 커피와 함께 달콤한 마카롱을 곁들여 먹으며 ‘이런 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향연의 아름다움이구나’라고 감탄하곤 한다.
삶의 향기 11/10
그런데 얼마 전 선생님께서 큰 수술을 받으셔서 몇 달간 세미나가 중단되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슬퍼하고 걱정하면 선생님께서 더 아파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그 고된 수술을 마치시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우리들의 ‘향연’을 생각하셨다고. 살아남아서 여울이와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으니까, 힘을 내셨다고. 나는 수화기 너머로 내 흐느낌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신경 썼지만, 선생님은 아셨을 것 같다. 나에게 이 ‘둘만의 향연’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지녔는지.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할 때도 늘 선생님의 말과 글이 내 곁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처럼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내 두 번째 스승은 얼마 전에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세상은 문학평론가를 ‘인기 있는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나에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은 문학평론가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심어주신 분이 바로 김윤식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늘 ‘최고의 이론으로 최신의 문학작품을 분석한다’는 스스로 정한 생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공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업적이 아니며 생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하는 무섭도록 정직한 과업임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조문을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한 대신 나는 선생님의 그 모든 수업들과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선생님의 책들을 맹렬히 회상했다. 다른 제자들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가지 못한 나의 소심함조차 선생님은 이해해주실 거라 믿으며. 배움이란 스승과의 친밀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얼마나 삶 속에서 실천하는가로 판가름나는 것이니까.
두 분의 삶의 빛깔은 너무도 다르지만 나는 생의 어둠 속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이 분들의 삶과 글과 눈빛을 생각한다. 내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내 영혼의 목마름이 불러낸 마음의 스승들이 뿜어내는 형형한 눈빛을 생각하며, 오늘도 책을 펴고, 아름다운 글에 밑줄을 긋고, 그 행간의 여백에 나의 감동과 배움의 흔적을 또박또박 쓰고 또 쓴다.
에드거 칸 박사가 벽시계를 뒤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그에게 1시간의 노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한 행동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엄마 뱃속에서부터 평등을 배웠다는 사람이 있다. ‘타임뱅크’ 창립자로 유명한 미국 사회운동가 에드거 칸(83) 박사다. “쌍둥이 여형제가 있다. 엄마 자궁에서 열 달을 함께 지내지 않았나. 그때부터 나눔과 평등을 배웠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단단했다. 인터뷰 내내 인간·이웃·사회·가난·정의·지역·공동체 등을 꺼냈다. 긴긴 세월 담금질한 노년의 지혜가 번뜩였다.
타임뱅크 38년 이웃 위해 1시간 일하면 1 ‘크레딧’ 혈액은행처럼 쌓은 만큼 돌려받아
호혜성 원칙 노인·장애인도 할 수 있는 일 많아 고령화 헤쳐나갈 해법으로 주목
‘빈민법의 아버지’ 젊은 시절 흑인·인디언 인권운동 나는 더 나은 세상 만드는 투사다
우리에게 생소한 타임뱅크는 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이웃을 위해 1시간 일하면 1크레딧(신용점수)을 쌓고, 그간 모은 크레딧만큼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일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점.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숙달된 의사든, 코흘리개 꼬마든 1시간 노동은 동일한 값어치를 인정받는다. 혈액은행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타임뱅크는 사랑·헌신·우애·돌봄·양육 등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주목한다. 어린이·노인·장애인·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를 껴안는다.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완하는 ‘제2의 경제’를 겨냥한다. 1대99 사회, 초고령사회에도 안전망을 치려 한다. 지난 40년 타임뱅크 씨를 뿌리고, 땅을 일궈온 칸 박사를 7일 만났다.
40개 국가에 1700여 개 타임뱅크
칸 박사가 지난 7일 서울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강연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질의 :1980년 처음 타임뱅크를 생각했다.
응답 :“예일대 로스쿨을 나왔다. 젊은 변호사 시절부터 사회정의를 향해 뛰어왔다. 흑인·인디언 등의 인권신장·빈곤퇴치를 위해 일했다. 그러다 몸에 탈이 났다. 심장의 60%가 망가졌다. 그때 저를 친절하게 돌본 간호사·조무사·자원봉사자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서비스를 어떻게 하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질의 :시간을 저축한다는 개념이 새롭다.
응답 :“경제학을 제대로 배우러 런던정경대(LSE)에 갔다. 그곳 학자들은 처음에 고개를 저었다. 경제활동이라면 비용보다 이익이 커야 하는데 타임뱅크는 남을 위한 시간(비용)과 내가 돌려받는 시간(이익)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익이 꼭 금전만의 문제일까. 성취감·자존감도 이익이 된다. 일례로 자원봉사를 생각해보라.”
질의 :자원봉사와 차별점을 강조하는데.
응답 :“시혜자가 일방으로 베푸는 자원봉사와 달리 타임뱅크는 수혜자도 노동을 한다. 호혜성이 원칙이다. 예컨대 외출이 불편한 노인도 우울증 환자의 전화 친구가 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숙제를 도와주면 역으로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줄 수 있다. 그런 고리를 넓혀가다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게 된다. 타임뱅크는 사랑의 노동이다.”
질의 :시장경제를 부인할 수는 없다.
응답 :“돈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사회 전반의 지나친 자본화를 걱정한다.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를 떠올려보자. 손이 닿는 모든 게 황금으로 변하는 미다스는 되레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딸마저 잃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돈이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됐다. 요즘은 어떤가. 다들 돈, 돈 하고 살지 않나. 황금송아지를 좇다 이웃을 잃고 있지 않나. ‘미다스 단일경작’의 폐해다.”
질의 :무슨 말인가. 단일경작이라니.
응답 :“오래전 아일랜드 감자기근을 생각해보라. 감자는 아일랜드 경제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재앙이 닥쳤다. 단일품종만 경작하다가 특정 바이러스에 걸린 감자가 죽어갔다. 19세 중반 수확이 급감하면서 1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일경작의 비극이다. 타임뱅크는 화폐 단작(單作)경제에 또 다른 돈을 심는 다종작(多種作)경제로 불 수 있다.”
질의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나.
응답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40여 개국 1700여 타임뱅크가 설립돼 있다. 미국·영국에는 각각 300여 단체가 있다. 한국에도 경북 구미시 사랑고리와 서울 노원구 시간은행이 있다. 여러 지자체에서 고령화 문제를 푸는 방안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들었다. 미국 뉴욕 대교구가 운영하는 타임뱅크의 경우 회원이 1300명이나 된다. 회원들은 그간 저축한 크레딧으로 야채를 사고, 가전제품도 수리한다. 모르는 사람끼리 친구가 된다. 유대감이 쌓이다 보니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의료비도 줄었다고 한다.”
돈만 좇는 ‘화폐 단작경제’ 보완
영국 타임뱅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1시간 타임 크레딧 지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질의 :그래도 노동의 질이 다르지 않는가.
응답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내가 하는 1시간 법률상담과 초등생 학습지도 1시간이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화폐경제선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영원이란 잣대로 둘을 견주어보라. 비교가 무의미하다. 시장경제 역사는 이제 수백 년이다.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키우며 어떤 조건을 붙이는가. 우리는 서로서로를 필요로 한다.”
질의 :타임뱅크 이전에 공익법률가였다.
응답 :“지금은 사별한 첫 아내와 1956년 결혼했다. 나보다 먼저 예일 로스쿨에 들어간 흑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여러 주에선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불법이었다. 아내의 고향 메릴랜드주가 그랬다. 합법인 워싱턴 DC에서 식을 올려야 했다. 마치 어제 일만 같다. 로스쿨을 나와 존슨 대통령 법무부에서 빈민퇴치 업무를 맡았다. 아내와 함께 미국 남부를 돌다가 백인과 흑인이 동승했다는 이유 하나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흑인·인디언들의 인권·식량 문제에 전념했다. 연방정부를 상대로 많은 소송을 냈다. FBI에 가면 내 사진이 많다. ‘미국 빈민법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자식이 많은 편이다. (웃음)”
질의 :정의를 위한 전사(워리어)를 자처한다.
응답 :“법철학자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정의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게 뿌리가 된 것 같다. 법은 사회정의를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법률가를 양성하는 대학도 세웠다. 현재 내가 교수로 있는 워싱턴 DC대(UDC) 로스쿨의 전신이다. 80년 재정위기로 폐교 위기에 놓이자 기금을 모으려 밤낮없이 뛰었는데 그때 심장병이 생긴 것 같다.”
질의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나.
응답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다. 항상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다, 더 할 게 남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질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응답 :“알고 있다. 인내와 끈기가 있기에 오늘도 웃을 수 있다. 타임뱅크는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어렵거나 아픈 사람도 남에게 힘이 될 수 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된다. 윈도 같은 컴퓨터 운영시스템(OS)이 있다. 워드·엑셀·파워포인트 등을 작동시키는 밑천이다. 타임뱅크는 현재 돈으로 도는 운영체제를 사람으로 바꾸려고 한다.”
질의 :기억에 남는 성공 사례라면.
응답 :“2년 전이다. 출소한 수감자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할 일이 없다며 절망에 빠진 상태였다. 그들에게 아이들의 우범지역 등·하교 안내를 맡겼다. 그들은 그간 모은 크레딧을 바탕으로 직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인공지능(AI) 시대다. 자동화에 따른 대규모 실업이 우려된다. 소외계층일수록 사회변동에 취약하다. 이웃에 대한 신뢰와 헌신이 절실한 때다. 타임뱅크 영역이 확대될 것으로 본다.”
질의 :개인적으로 크레딧을 어디에 쓰나.
응답 :“나는 불량소비자다. (웃음) 잘 쓰지를 못했다. 한 달 전에 춤을 배우는 데 6크레딧을 썼다. 다리에 힘이 없어 스텝을 연습했다. 어쩌면 타임뱅크가 나를 살렸다고 볼 수 있다. 심장이 85%까지 치료됐다. 하루 두 시간도 움직일 수 없다던 내가 지금은 하루 14시간, 주 7일 일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 건강했으면 한다. 우리는 세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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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성인식 거부했다가 팔순에 치러 … “이제 열여섯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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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열여섯 살이 된 게 아닐까요.”
칸 박사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 나이 여든셋인 그가 아닌가. 설명을 들어보니 수긍이 갔다.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교에선 전통적으로 남자는 열셋에 성년의례를 치른다. 히브리어 성서를 읽어야 하고, 또 이를 음송(吟誦)할 줄 알아야 된다. 아이들은 율법 관련 책임을 지게 되며, 사회활동에도 참여하는 권리를 얻는다.
칸 박사는 열셋이 됐을 때 성인식을 거부했다. 부모·친지들이 어른이 된 아이를 축하하며 선물을 주고, 행사도 벌이는 데 어린 나이의 그에게는 종교의식보다 돈 잔치처럼 비쳤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3년 전 성인식을 치렀으니 유대교 나이로 열여섯이 됐다는 유머다. 왜 그가 마음을 바꿨을까.
“유대교 전통을 새로 배우고 자부심도 갖게 됐어요. 유대인이든, 유대인이 아니든 똑같은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유대교 유일신 신앙이 많은 비판을 받아온 건 알지만 사람 한 명 한 명 모두가 우주라는 가르침은 귀중합니다. 평등한 거죠. 기독교·이슬람·불교 등에서도 강조하는 대목이고요.”
그는 “타고난 음치라 어린 손녀에게 히브리어 성서 음송을 배웠다”고 했다. 그가 모은 ‘타임 크레딧’ 일부도 건네줬다. 3년 전 쉰여섯인 아들과 함께 성인식을 치렀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쾌한 할아버지다.
박상순, 이 가을의 한순간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 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와 고양이가 들어 있는
소랍이 열렸다
울고있던 내 돌이 말했다
초침이 돌고 있는 네 눈 속에
단풍잎 하나
떨어지고 있어
새와 고양이가 들어 있는
서럽이 답혔다
텅 빈 버스가 굴러갔다
: 텅 빈 버스 속에서 도저히 내닐 수 없는 동물과 사람이 내렸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지금 동물과 사람이 어디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다가 다 내린 텅빈 버스가 내 손안으로 굴러온다고 아마 장난감 자동차? 모르겠다. 돌이 울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지 . 돌이긴 한데 슬픈 추억이 묻어있는 것이다. 결국 서럽을 열어 보고 이 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랍을 여니 추억의 물건이 나온다는 것이겠다. 그 옛날의 추억의 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단풍이 잎이 떨어지는 가을에 너 슬프구나라고! 그리곤 서럽을 닫았다. 주체는 서랍을 열어보는 사람이다. 대상은 서랍 속의 여러 물건들. 굴러왔다라는 것으로 보아 서럽이 바퀴가 달려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증거들이 출현한다. 서랍은 둘 사이의 추억을 매개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은 가을의 한 때다. 가을날 한 때를 추억하는 그런시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 속의 사람과는 어긋나 있다.그래서 슬픈 것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구문응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통일성이 나와 대상을 관통하는 유일한 일관성이다. 이 시의 공간이 개봉과 밀봉을 오가는 열린 공간임을 알겠다. 서랍을 연 한순간에 과거의 모든 추억이 함께 떠올랐으니 이 시의 시간이 과거로 열린 개방된 시간임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