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별학교 독서모임 (2015년 3월 9일)
도서명:샴고로드의 재판 (LE PROCES DE SHAMGOROD)
엘리 위젤지음/하진호,박옥 역/216쪽/ 포이에마
1.이 책은 노벨 평화상 수상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엘리 위젤의 문제작입니다.
엘리위젤은 17세기에 있었던 집단학살로 큰 충격을 받은 폴란드계 유대인 공동체의 상처난 마음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부조리와 고통이 가득한 인간의 비참한 현실속에서 신의 권능과 선의를 의문에 부치는 현대판 욥기라고 할수 있다. 읽은 소감은?
2.부림절이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
3.이 작품의 배경은 1649년 2월, 부림절에 폴란드 남동부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공동체를 덮친 대재앙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당시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폴란드와 가톨릭교회에 불만이 쌓이자 봉기를 일으켰는데, 코사크인과 타타르인의 지원을 받은 하급 귀족 흐멜니츠스키가 앞장선 이 봉기는 곧 유대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게 되는데 가톨릭 신자인 귀족들과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농민들 사이에서 유대인이 중개인, 곧 마름 역할을 했던 터라 농민들의 적대감이 컸던 탓이다. 그리하여 바르, 나롤, 네미리프 등지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이루어졌고, 유대 회당이 불탔는데, 유대역사에 보면 당시 300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고 1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근대 유럽 역사는 바로 종교전쟁으로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처형한 죄값을 물어 십수세기에 걸쳐 박해를 받아왔다. 심지어 히틀러도 루터교 신자였다.
우리는 유대인의 징벌은 끝났다고 보아야 할까?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안에 유대인들의 구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190쪽 마지막 줄에서 193쪽 가운데까지 읽기>
주인공인 유대인 베리쉬는 ‘한 살인자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인하게 두면 신에게 책임이 있는 거요. 고통당하거나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사람, 강간당한 모든 여인, 학대당하는 모든 어린이는 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지음받은 피조물이 그런 짓을 하도록 방임한 신을 기소해야겠다고 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신을 법정에 세우는 것은 인류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라고 매튜폭스는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신을 숭배해온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5. 우리시대에도 세계 모든 종교들의 근본주의자들은 바로 본문에 나오는 동방정교회 신부의 사고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가톨릭. 이슬람, 기독교에서는 공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있다. 어쩌면 신을 살해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6.등장인물 중에 샘이라는 인물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스스로 신을 열렬히 변호하지만 그의 과거를 아는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 볼 때 그는 악마였다. 어쩜 우리도 내면을 편견없이 성찰할 때 신성과 악마성이 함께 공존하는 두 얼굴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그의 변호는 오늘날 현대신학의 변호방식과 다르지 않다. 악은 선의 결핍으로만 끝나지 않고 악은 신의 변호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것이 사람들에게 신에 대해 혼란을 주며 하나님을 왜곡하게 해석한다.
7.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는 이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베리쉬처럼 험악한 세월이 있기 전에는 그럴 수 없이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사회에 헌신하며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한 던 사람들이 전 인격을 파괴하는 시간을 보낸 뒤에는 신에대한 혼란, 인간에 대한 상실, 선의 부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굳어지는 것을 본다. 마치 욥처럼...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공감이 필요할까? 신에 대한 변호가 필요할까?
8.마리아를 통해 작가는 “악”이란 심장도 영혼도 감정도 없는 것, 곧 비애감이 없고 감정과 열정과 공감과 연민이 없는 것이라면...우리는 어떤가?
9.모슬렘 신자들을 보면서 나는 그 종교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자식이 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는데도 ‘알라는 위대하다’ ‘신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정의롭지 못하다.
신에게 항의하지 못한다면 그 신은 인간을 만든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오늘날도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신자들이 자신과 이웃에 대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신을 옹호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을 본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변호를 필요로 하는 우상을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0.우리가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욥과 같이 (211쪽 읽기) 고백하는 것일까?
이런 고통의 시간은 지나가고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쩌면 우리를 통해 지금도 진행형이다. 홀로코스트가 지나가고 새로운 유대역사가 쓰여 지고 있듯... 릴케의 고백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기적이다”라고 하듯...하나님이 침묵한다고 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해 몹쓸짓을 하는 것은 그를 지은 이를 모독하는 신성모독이며, 우리는 악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해야하고 저항하며 창조역사를 쓰는 자만이 산자이다. “창조주와 공동 창조자”
어쩌면 외부로서의 구원은 내부로서의 자각과 구원에로의 열망이 커질 때 가능하다 본다.
동의 하는가?
11.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것, 우리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숙의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숙명적 받아 드림이 아니라 창조적 정신으로 극복해야한다는 숙제를 준다.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