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느님
전에는 그토록 부담으로 생각되던 하느님의 얼굴이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지니 너무도 그리운 얼굴로 변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을 답답하다고 생각해서 재산을 챙겨 멀리 떠나갔다가 알거지 신세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했던 탕자의 탄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거지 몰골을 하고서라도 일단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한 순간, 그의 방황은 끝이 났습니다.
요나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도망갔었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잠시 하느님을 떠나 죄를 지어도 늘 마음속이 편안치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곳을 신나게 여행해도 당장 몸이 아프면 집에 가고 싶습니다. 고통 속에서 가장 그리운 것은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빵 한 조각보다 더 그리운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면 초가삼간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성당을 다니던 한 미군장교가 월남전 때 월맹군의 포로가 되어 몇 년 열악한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 했을 때, 그는 바로 이 경험을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아예 없었고, 큰소리로 성가를 부를 수도 없었고, 성경은 일주일에 2시간 그것도 한 명이 대표로 나가 베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베낀 것도 그 다음 주엔 돌려줘야 했습니다. 포로들은 그래서 베껴온 성경을 그 중에 나눠서 다 외워 버렸습니다. 성가도 소리 없이 입술로만 불렀습니다. 그렇게 찬양하면서 은총을 받고 울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오직 하나의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찬양하며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강렬한 하느님의 성전에 대한 그리움이 그로 하여금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을 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에서조차 자비를 베푸십니다. 자식이 잘못해서 때리더라도 죽도록 때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훈육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손에 맡겨지는 게, 훈육을 피해 하느님의 성전을 떠나는 것보다 백배 낫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광야가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은총의 오아시스가 곳곳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아시스는 때에 맞는 한 편의 강론일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물이 지천인 곳에서 오아시스는 별 의미가 없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감동입니다. 작은 오아시스라도 만나면 고마워서 목이 메어 눈물이 납니다. 오아시스가 곳곳에 있는 까닭에 광야는 죽을 것처럼 괴롭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이 오아시스에서 영혼의 생명수를 길어냅니다.
요나는 “제 얼이 아득해질 때 저는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2,8)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편할 때는 세상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나갈 때는 우린 너무 열심히 세상을 바라보고 삽니다. 내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피곤할 때는 하느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육체를 이기는 영혼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순조로울 때는 속삭이듯이 말씀하시지만, 고통 속에서는 고함치듯 분명하고 크게 말씀하십니다. 영성은 인생을 하느님의 시각으로 정확히 해석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깊이 있게 하느님을 생각하는지요?
요나는 맹탕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줄 정도로 요나는 영적 저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능력이 고난을 통해 겸손하게 된 인격에 담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할 때가 된 것입니다. 모세가 실력이 부족해서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40년간 썩히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적 실력이 너무 넘쳐나서 문제였습니다. 광야를 통해서 그는 부서진 마음, 겸손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능력이 그에게 담겨져 큰일을 감당할 때가 된 것입니다.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겸손하고 낮아진 마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겸손하고 낮아진 마음은 광야를 통과해야만 가능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지독한 기근을 겪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비전의 첫걸음을 기분 좋게 시작한 아브라함에게 초창기부터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하게 다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먼저 축복을 담을 만한 그릇으로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우리 믿음을 깊고 단단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려운 상황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련되지 않은 믿음은 강해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져 버립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코드를 잡는 왼손가락들이 쇠줄을 잡으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까지면서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이를 악물고 잘 견뎌내야 비로소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여서 나중에는 별 문제없이 기타 코드를 잡고,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초반의 준비 과정으로 일련의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단단해지고 순결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런 믿음이 시련을 견뎌 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내 길을 알고 계시니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욥 23,10)
요나의 물고기 배 속과 아브람의 기근과 다윗의 광야 시절은 믿음의 사람을 단련하는 하느님의 용광로였습니다. 그곳은 새로운 컨텐츠가 준비된다기보다 그 컨텐츠를 담을 영적 그릇, 인격의 그릇이 녹아지고 깨어지며 다시 빚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람은 시련이 와도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자리에서 인내하며 버텨 내야 합니다. 기근이 닥치자 바로 이집트로 피했던 아브라함처럼 하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우리는 당황해서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지?”라고 반응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실수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계신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려울수록 우리의 생각을 접어 두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했으면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인간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돌파구를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예레 33,3)
약속의 땅에서의 시련은 마침내 축복이 된다
기도해서 하느님께서 움직이라 하실 때까지는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약속의 땅을 쉽게 버리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실수를 할 때 보면 보통 기도가 없습니다. 상황에 대처하기에 급급해서 기도가 맨 나중으로 밀립니다. 기도하지 않고 상황만 분석하면 충동적으로, 세상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들을 지금 한 번 잠잠히 돌이켜 봅시다. 십중팔구 그 결정을 내미던 시점의 앞뒤로 기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보 수집도 하고,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회의도 해 보고, 여러 가지 다 했겠지만 정말 하느님 앞에 엎드려 진실하고 심각하게 기도할 짬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련을 만났을 때, 하느님의 사람이 생각을 기도보다 더 많이 하면 인생이 자꾸만 더 힘들게 꼬입니다. 고난의 시간은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지 고민해야 할 순간은 아닙니다.
한 도시 전체를 칠흑같이 메우는 안개도 한 컵 정도의 물의 양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을 끊임없이 압박해 오는 고난의 안개들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믿음으로 눈을 질끔 감고 기도하며 견디면 열병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파워 기도는 눈물로 만들어집니다. 지금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그 누가 어떤 말로 우리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하늘의 능력을 다운로드 하는 기도를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첫댓글 한 도시 전체를 칠흑같이 메우는 안개도 한 컵 정도의 물의 양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을 끊임없이 압박해 오는 고난의 안개들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믿음으로 눈을 질끔 감고 기도하며 견디면 열병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파워 기도는 눈물로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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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하며
와 닿아요
"시련을 만났을 때, 하느님의 사람이 생각을 기도보다 더 많이 하면 인생이 자꾸만 더 힘들게 꼬입니다. 고난의 시간은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지 고민해야 할 순간은 아닙니다."
하느님, 시련이 오는 매순간 가장 먼저 주님을 찾는 이가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예수님의 마음은 펠리칸의 새와도 같은 마음이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해서 마음이 무너질때면 십자가에 매달려계신 예수님께 여쭈어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모든 걱정.근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하느님아버지만 죽도록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
"고난의 시간은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지 고민해야 할 순간은 아닙니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예레 33,3)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