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로 시작될 때의 세대는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며 자기표현에 충실했던 엑스(X)세대부터 “일찍 출근하면 수당이 나오나요?”라며 권리 주장에 밝은 제트(Z)세대까지 청년들은 매번 기성세대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세대 간 인식 차이가 크다는 건데, 그 이질성은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와 폭에서 기인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일제강점의 수난에 이어 한국전쟁과 분단, 유신의 억압을 겪고 바로 신자유주의 경쟁체계로 편입하며 진폭 큰 변화를 맞은 경우, 간극은 클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뜨거웠던 세대를 꼽자면 1960년대 청년세대가 아닐까 싶다. 4·19혁명을 이끌며 외신기자의 눈에도 ‘무기화한 신세대’로 비쳤던 그들이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한 학생 시위가 정권을 교체한 혁명에 이른 데는 마산 시위에 참여했다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된 16살 김주열 군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라”며 궐기를 촉구했던 서울대 문리대의 4·19 선언문에는 세대가 공유했던 분노가 서려 있다.
4·19세대는 탈정치적 성향의 기성세대와 달랐다. 전후세대는 흔히 한국전쟁의 기억만을 소환하지만,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광복 이전 초등교육에서 모어 대신 일본어를 배우며 억압을 체화했다. 반면 4·19세대는 한글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웠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선거부정에 학생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분노한 배경에는 주체화 과정에 작동된 언어와 교육의 영향이 크다.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전제할 때 예술가라고 예술 안에서 고고했을까.
그 시대 청년작가들을 떠올린 건 국립현대미술관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공동 주최한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기획전 때문이다. 여기서 ‘실험미술’은 회화나 조각 같은 기존 범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실험적 미술을 말한다. 완전히 다른 양상의 작품이 출현했다는 의미다. 시대를 넘나드는 내내 무엇을 실험했다는 건지 명칭 자체는 모호하지만, 전시는 청년들을 시대의 주역으로 호명한다. 국문 제목에서는 삭제됐지만, 영문에서는 특정된 ‘젊은 그들’(Only the Young)은 현실을 추상화하는 대신 사물로 일상성을 구체화했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이태현(1940~)의 ⟨명(命) 1⟩은 특히 직관적이다. 목숨 또는 명령을 의미하는 뜻글자를 제목으로 택한 작가는 실제 방독면과 군용가방을 노란색 패널에 붙여 벽에 걸었다. 작품은 홍익대 출신 청년작가그룹 ‘무’의 2회 전시에 처음 등장했다. 1967년 6월의 전시였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또다시 불거진 부정 의혹으로 대학가의 분노가 들끓던 6월이었다. 대학 단위로 성토대회가 열리자 서울시경은 갑호비상령을 내렸고 관내 모든 경찰은 방독면으로 무장했던 그달이었다.
사실 ‘실험미술’이라는 명칭에는 군부정권의 공권력을 방독면으로 표상할 정도로 사회성 짙은 작품을 배태한 시대의 실정이 누락돼 있다. 1960년대 청년작가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정작 우리 미술계가 외면해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최루탄과 곤봉 세례로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대학 시위 기사가 넘쳐났던 당대의 작품을 정치 현실과 무관한 예술 내 형식실험으로 한정시키려는 담론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하지만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냈던 세대였다. 4월 혁명 직후인 그해 10월 서울대 미대 3학년 학생들은 “현실은 차디찬 벽이 되어 눈앞에 있다”며 그룹 ‘벽’을 조직하고 서울시청 옆 정동으로 뛰쳐나와 최초의 거리전시를 열었다. 홍익대 미대 4학년 학생들이 ‘무’라는 이름 아래 붓을 내던졌던 첫 전시도 1962년에 열렸다. 캔버스를 불로 태운 작품도 1960년대 초반 등장했다. 최루탄 연기가 끊일 날 없던 데모의 시대를 청년예술가들은 뜨겁게 살았다.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20230616 한겨레신문
첫댓글 아~ 시대를 함께하는 청년예술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