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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적 위기와 문학의 대응력
-1970년대 —1980년대를 중심으로-
게오르규의 『25시』에 등장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로 서두를 연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이차구차 독일 망명 후 군에 입대한 게오르규가 배치된 곳은 심해의 잠수함이었다. 산소 측정 장비가 없었던 그 시국, 승무원들이 심해에 들어갈 때는 산소 부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토끼를 데리고 탄다. 승무원들은 토끼를 잠수함 가장 아래에 앉혀 두면서 토끼가 산소 부족 이상 반응을 보이면 물 위로 떠올라 공기를 환기시켰다. 토끼의 ‘민감함’이 위험을 알리는 경보장치 역할을 한 것이다. 훗날 게오르규는 작가의 역할을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로 비유하면서 ‘진정한 문인(文人)은 현실의 문제점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대중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존재’라고 했다. 특히 어둠의 시대일수록 문학인들이 가장 예민한 감각대가 되어 잠든 세상에 경각심을 주는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문학인은 어느 특정 개인의 역량에 의해 문장을 생산하지만 때로는 그 조직의 물리적·정신적 지향점이 풍파를 일으켜 세상을 소용돌이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소주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공주문화재단>의 요청으로 본고에서 다루어야 할 논제는 ‘사회적 위기와 문학의 대응력’으로 조금은 민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1970-80년대의 시국 상황과 공주 문단을 접맥시키면서 논하게 될 것인데 지역사회에서 발생했거나 연관된 사태를 중점적으로 파헤칠까 한다.
첫째, 통제된 시대의 문학 위기
둘째, 문학의 현실참여논쟁
셋째, 문학의 대중화와 문인의 증가
이에 대한 부연 설명 및 정리 과정의 미흡함도 함께 설명해야겠다.
첫째, ‘통제된 시대의 문학 위기’의 경우 특히 해방 이후 공주에서의 능동적 참여 흔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70년대 당시 저항문화의 인사들과 직접 교류한 인물은 당시 공주사대에 재직했던 전채린, 조재훈, 김정헌 교수 그리고 공주교대 진영일 교수와 그 제자들이 맥을 이어온 정도이다. 물론 순수문학 작가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진보 인사들과 친분을 가지며 시대의 아픔에 동조하기도 했다.
둘째, ‘문학의 현실참여’ 부분이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이란 부제는 현재 공주라는 소도시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논하기는 불편한 사안이 될 수 있다. 시국의 쟁점이 지역사회로 이동되면서 소통의 차이점도 있고 이미 일부 작가들이 두 공간을 아우르는 활동을 진행 중이라는 이유도 있다. <예총>과 <민예총>, <문인협회>와 <작가회의>의 정체성은 차치하고 공적·사적 공간에서 조우하더라도 ‘순수’와 ‘참여’를 쟁점으로 거칠게 설전이 오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공주의 문학’이라는 대주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셋째, ‘문학의 대중화와 문인의 증가’ 부분이다. 이것은 기성작가들이 반드시 짚어나가야 할 내용이지만 이 글의 대주제인 ‘문학의 정치·사회적 위기’와는 내용의 지향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즈음하여 활자를 생산하는 시스템 자체의 엄청난 변화를 간과할 수는 없다. 작금의 정치적 스크린처럼 세대 간의 단절과 소통의 해결 사안이 우선되어야 함도 이유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화두 모두가 문학사의 지난(至難)한 도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전제로 한다. 동시에 앞으로 금강권의 중심이자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우금티를 근간으로 한 지역문학이 나아가야 할 미래에의 준비 작업이 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첫 번째 ‘통제된 시대의 문학 위기’ 부분은 시대적으로 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그리고 유신독재 시국인 소위 ‘70-80’시국 시국에 해당될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인 ‘문학의 현실참여 논쟁’의 경우 한반도의 구조적 상황과 공주라는 지역 사회의 특성은 그 내용이 다룰 수 있다. 실제로 공주의 경우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필자의 간극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가시적 문제로 드러난 경우보다는 상보적 소통의 관계를 지닌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상황과 지역의 상황을 따로 논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항목인 ‘문학의 대중화와 문인 숫의 증가’는 창작 시스템의 변화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예상보다 훨씬 스피디하게 확장되는 자본주의 소통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고무적인 동시에 우려의 쟁점을 동시에 지녔다고 하겠다.
1절 통제된 시대의 문학 위기
일반적으로 작가가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감각대인 만큼 시대를 빨리 파악하고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파급력이 큰 만큼 행위에 대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일제 강점기가 그 사례이다. 식민지 시대 작가들 중에서 민족 해방을 꿈꾼 시인은 모두 목숨을 걸었고 배반을 도모한 작가는 대개 총독부의 총애를 받았다.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은 해방을 목전에 앞둔 그해에 옥사했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인물 중에서도 김동리, 황순원 등은 친일 행위를 거부하고 몸을 피한 채 붓을 꺾는다.
그러나 시류에 따라 변절한 작가들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남선, 이광수 같은 천재 작가들은 약관 스무 살의 연륜에 이미 계몽사상이 넘치는 잡지들을 발간하였다. 최남선의 경우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는 등 깨어있는 지식인의 역할을 자처했으나 식민지시대 막바지에 친일파로 전향하면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대동아전쟁의 참여를 독려했으니 슬픈 일이다.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모윤숙, 김동인 등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하다.
특히 김동인은 1945년 8월 15일 10시에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아베를 찾아가 <문인보국단>을 조직하겠다고 간청했으니 불과 광복을 두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미 천황의 항복 선언 정보를 입수한 총독부에서 거절의사로 잘라냈으니 슬픈 코미디이다. 해방 후에 결성된 반민특위조차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문단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지금은 친일 작가들의 분석은 이 정도로 그치고 다른 지면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이상, 김유정, 나도향 같은 천재성 젊은 작가들은 방치와 탈선의 문학에 몸을 던지다 일찍 유명을 달리하였고 이기영, 조명희 등은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농촌을 꿈꾸는 소설을 썼다. 나혜석, 김명순 등 신세대들은 여성 해방을 주장했고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청록파를 결성하여 그들만의 순수문학의 길을 걸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이쯤에서 접겠다. 이제 백제의 옛 도읍 공주의 문학 탄압 사례로 넘어간다. 식민지 시대와 유신정권으로 분류되겠다.
백제의 도읍 공주는 조선시대는 물론 개화기 이후까지 가장 다양한 역할이 가능한 중부권의 수부 도시였다. 교통의 거점 위상과 함께 다른 지역에 앞서 신식 제도의 학교 설립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전국적인 교육도시로 칭하여졌다. 그리고 서양 문물의 상징인 개신교 도입과 선교 활동, 청나라 일본 등의 외국문물과의 교류도 활발했던 도시이다. 또 객지와 타국 유학생들의 증가와 함께 극장 건립, 일간지 발행 등 근대적 문화도 성행하면서 현대문학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교량적 소도시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식인들의 의식이 특히 깨어있으면서도 보수적 정서의 지역이었으니 때때로 검열과 탄압이 빈번했던 것도 놓칠 수 없다.
공주 역시 식민지 시대의 탄압을 피하기 힘들었으니 윤귀영 등이 합류한『백웅』의 폐간 사건이 그 경우이다. 1927년 한글연구회가 결성되고 1928년 『백웅』과 같은 월간잡지가 2호까지 발행되다가 3호 발행 중 검열문제로 중단된 사건을 공주 근현대문학사의 출발점으로 보면서 해방 이후 공주 문예운동의 정치적 수난을 다룰 것이다.
조동길 교수의 글에 의하면 이 『백웅』을 주도한 서덕순은 갑부 집안의 시민운동가인데 원래 일본 유학생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한글연구발표, 한글잡지와 도서발간, 한글강연회와 각종 강좌를 개최하였다. 그렇게 소년 동맹 등 진보 시민단체 운동에 참여하는 등 계몽운동의 전선을 달린다. 이 한글학회와 『백웅』의 연결고리를 담당한 사람이 윤귀영이다.
그는 19세 젊은 나이에 소설을 써서 전국적으로 인정받아 공주의 근대소설을 출발시킨 작가이다. 1928년의 월간지 『백웅』도 3호 발행 중에 검열문제로 중단된 사례를 앞서 밝힌 바가 있다. 그는 어린이날 기념행사에 공주소년동맹위원장을 밭아 구류 8일을 살고 1930년 공주법원에서 보안법 7조, 조선형사령 42조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는다. 그는 또 1930년 광주사건 혐의로 안병두, 정용산과 함께 검거 송치된 후 1932년 ‘공주고, 영명고 비밀결사 격서 사건’의 배후로 다시 검거되기도 한다. 1933년 다시 사회과학서적 소지 혐의로 논산 부여의 지식인 15명과 함께 검거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소설가 윤귀영의 작품이 『개벽』현상모집의 「흰 발빛」과『백웅』창간호의「첫 추위와 함께」뿐이라는 점이다.
본디 『백웅』발간은 윤상갑(발행인) 배상인(인쇄인) 윤귀영과 강운곡(편집) 등이 분담 수행했는데 대개 일간지 공주 주재를 겸업했던 것으로 미루어진다. 영명학교 출신 안신영이 수필을 발표했고 금원이라는 호를 사용하여 창간호에 바표한 「흰곰이 났네」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예산 출신인 영명학교 졸업생 방인근은 그 후 공주에서 공부한 인연을 「방랑의 가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공주 문인들과 가까이 교류했던 논산 출신 엄홍섭은 카프의 핵심 맹원이었음도 염두에 두어야겠다. 서울에서 활약한 박아지, 진우촌, 홍효민, 한형택, 김도인 등이 참여했으니 지방의 소규모 잡지『백웅』이 전국적 수준이었음으로 짐작된다.
진보적 시인 정용산은 논설이나 기타 글은 정우진이란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론된다. 식민지 시대 카프와 깊은 연관으로 살아온 그는 공주고보 4학년 자퇴한 후 1928년 일본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한다. 그 후 공주에서 1930년 윤귀영의 출옥 직후 안병두 등과 ‘글벗 두레’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불온서적 소지와 공주청년회 집행위원의 이유로 여러 차례 수사와 체포를 경험한다. 그 후 좌익 운동가 이용하가 체포되자 경성으로 도피하여 김남천, 임화, 안막, 최승희 등과 함께 카프 산하 연극 단체인 <청복극장> 회원으로 활동한다. ‘탄갱부’ ‘파업조정안’ ‘전선’ 등의 공연이 무산되자 월간 『신계단』에 시와 논설을 발표하였다. 1933년 적색 비밀결사 단체의 연루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된다. 1935년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은 이후 그의 기록이 없다. 그의 시 중 일부를 수록한다.
(전략)
새벽인가 보구나! / 지금의 너는 나보다 약한지 모른다/ 지금의 너는 나보다 백배나 자유롭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오늘 이 새벽을/ ×혀 있는 내 생각으로 흘리어버리지는 말어다구!/ 사랑하는 사랑하는 계집애야/ 앞날의 너는 반드시/ 이 집의 커다란 문을 두드리어서/ 나를 나를 맞어 주기 믿고 믿고 있다
「잠 못 자는 밤」부분
수인 상태인 갇힌 서정적 자아가 애인에게 자신의 심경을 전하는 내용이다. 동시대의 평론가 백철은 1930년대 문단의 전망에서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 기성문학은 통속과 파시즘으로 전락했다면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신예작가로 이기영, 한설야, 임화, 안막 등과 함께 정용산을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윤기영과 정용산 두 작가 모두 공주고보와 신문사에서 젊은 날의 고락을 함께 한 벗이자 동지였음을 밝힌다. 두 작가가 공주 근대문학 출범기에 막중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함에도 2020년 조동길 교수가 『작가마루』32호에 발표한 게 최초라는 점이 아쉽다.
해방 이후 유신정권 시국의 공주지역의 문학과 관련된 문화운동의 수난사를 살펴보겠다. 문화운동과 문학을 접맥시킨 이유는 이 지역 운동권 인물들이 나중에 양질의 저서들을 발간하였으니 그게 진보문학의 태동과 연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공주에서 출생하거나 학연을 가진 문인과 현재 공주에서 거주하는 문인들로 나뉘겠으나 때로는 두 경우를 아우르며 소개할 것이다. 유신정권을 연장하려는 1969년 3선 개헌 이후 문학계에서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이 싹을 트던 즈음이다. 그 상징적 사건의 배경이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이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발표된 장시 「오적」은 김지하, 부완혁, 김승균 등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문학계의 석방운동은 지식인, 재야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유신정권의 막바지인 1975년 공주대 <수요문학회> 행사에서 ‘대통령 사진 경례 거부 사태’가 있었다. 이 공주사대 연극부 <상황>은 불어과 교수인 전채린과 함께 창립되었다. 1974년에는 황석영 작 「돼지꿈」을 공연하였으며 그해 11월 22일 ‘닉슨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상황>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본관 202호 강의실에서 3일 동안 점거농성을 주로 했다. 이듬해 1975년 김지하의 작품 「금관의 예수」를 준비하다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배포 담당 운영책이 시인 고은과 소설가 황석영이다. 이때 인연을 맺은 고은과 황석영이 공주사대 문학서클 <수요문학회> 행사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기실 이 행사는 해마다 진행되던 연례행사로 이어서 시낭송회을 진행할 차례였다. 수요문학회 선후배 회원들은 물론 일반 학생과 지역 주민 그리고 지역의 시인들도 참여한 상태였다. 무대 뒤로는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함께 걸려 있어서 낭송자가 그쪽을 향하여 경례를 한 다음 시낭송과 노래가 번갈아 행해지는 자리였다. 4학년 최교진 회원의 시낭송회 차례에서 무대를 가리키며.
“나는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것이지 저 독재자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선언 후 유신시국을 비판하는 시낭송이 끝나고 곧바로 ‘국가원수 모독혐의’로 체포 구속되었고 구류 28일 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으며 당시 지도교수였던 조재훈 시인이 엄청나게 곤욕을 치렀던 사건이기도 하다. 2021년 현재 세종시 교육감으로 임하는 그는 교육산문집 『사랑이 뛰노는 학교를 꿈꾸다』를 간행한 바 있다.
81년 <금강회 사건>은 5공화국의 공안조작으로 탄압한 대표적 학생운동의 하나이다. 젊은 대학생들로 구성된 그들은 공주에서의 독서 모임을 가지고 문학과 사회과학 사적을 탐독하였다. 1978년 <곰나루> 회원들이 ‘유신철폐 벽서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금강회>를 구성하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다. 1981년 11월 13일 그들이 읽은 판금서적『역사란 무엇인가』『농촌경제학』등을 빌미로 회원 모두 좌경용공분자로 몰아 구속된다. 정선원, 최연진 등 수십 명이 구속되고 실형을 받은 사건이다. 그 후 2000년도에 정선원은 공주의 우금티 전투과 관련 있는 후손들을 취재한 『공주와 동학혁명』이라는 르뽀집을 펴내면서 동학정신의 고취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80년대 초반 공주사대 77학번을 중심으로 하는 <이웃끼리 문집> 사건이다. 재기 표현의 글짓기가 아닌 참삶이 담긴 글쓰기 운동은 이오덕, 윤구병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연수와 학생글문집 등을 출판하면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은 순수 동심주의보다 아이들에게도 절실한 생활이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공주사대 70년대 학번인 최교진, 황금성, 이인호, 조재도 등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 활동을 하면서 학급신문과 학급문집 등을 통해 학생들의 삶이 담긴 글들을 공유하고 나눴다. 1984년 조재도, 이은택, 박경이, 이인호, 황금성 등이 학급신문을 만들면서 이 신문을 교환했다. 연말이 되면서 한 해 동안 학급신문을 나눈 학생들이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남을 준비하면서 충남의 각지로 흩어진 젊은 교사인 이인호, 조재도, 이은택, 박경이 등 국어과 77학번 중심으로 학생들 시와 산문을 추려 모아 책자로 엮었다. 그 80쪽짜리 글 모음집에 붙인 공동문집 이름이 『이웃끼리』였다. 재단을 맡긴 인쇄소에서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화가 되었다. 인쇄물은 무조건 신고하라는 당시 지침에 따른 것인데 여러 고등학교 글이 실려 있으니까 도교육청에 통보되었다.
충남도교위와 경찰은 교사들이 고교생연합조직을 만들려고 했다면서 사건을 키웠다. 마침 대전 민속 예술패 <우금치> 후원회원 명단에 이 연합문집을 낸 교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자 고등학생들까지 연계된 조직을 만들려 했다는 확대해석으로 탄압한 것이다. 책자는 모두 압수되고 교사들을 1985년 3월 1일자로 벽지 중학교로 뿔뿔이 강제전보를 냈다. 조재도는 안면중, 이인호는 당진 고대중, 이은택은 서천여중 등으로 서로 거리를 떨어지게 한 조치였다. 이후 <충남 글쓰기모임>은 <홍성 Y중등교사협의회>와 함께 충남 교육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웃끼리』문집사건은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에 충남교육청의 ‘문제교사식별법’중 ‘학급문집을 내는 교사’와 함께 소개되었다.
그 연루자들이 지난한 세월을 거쳐 발간한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황금성의 산문집『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아이』, 이은택 시집 『벚꽃은 왜 빨리 지는가』박경희 산문집 『만화, 학교에 오다 『천방지축 아이들 도서실에서 놀다』『엄마, 꽃밭은 내가 가꿀게요』그리고 이인호의 『얘들아, 연극하자』『우리 연극해요1,2』『학교야 학교야 뭐하니? 연극한다』『소설, 연극을 만나다』『학교에서 낭독극 하기』등을 펴냈다. 특히 조재도는 시집『자물쇠가 철컥 열리는 순간』『쉴참에 담배 한 대』『좋으니까 그런다』청소년 소설『싸움닭 샤모』『이빨자국』『불양아이들』『위로받고 싶은 날들』그리고 산문집『꽃보다 귀한 우리 아이는』『전쟁말고 평화를』등 수십여 권이 있으나 나중에 다음 지면에서 소개를 할까 한다.
다음으로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한 염무웅 교수이다. 고교 시절 교생실습을 나온 은사 조재훈과 인연을 맺은 그는 고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독문과와 대학원을 나온 후 덕성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었다가 1976년 초에 이르러 용공 혐의로 해임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그는 1968년부터 『창작과 비평』편집 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민중 시대’를 선포한다. 지금까지 그는 『한국 문학의 반성』『민중 시대의 문학』『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등의 평론집을 펴낸 바 있다.
그는 월북 문인들의 작품 발굴에도 힘쓰며 민족 문학론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한다. 염무웅은 ‘위대한 작가’란 어떤 시대이건 제 양심의 실체를 제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 속에서 발견하는 사람이며, ‘위대한 작품’이란 일상생활에 길든 범인들에게 계몽적·해방적 작용을 하는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문학 작품에서 민중적 삶의 전형을 읽기보다 민중적 투쟁의 위대함을 읽으려고 하며, 이상화된 민중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1985년『민중교육』에 교사들이 대거 연루되어 17명이 해직되는 사태가 있었는데 그 필자들 중 공주와 학연이 있거나 공주에 기거하는 인물들이 있어서 소개한다. 『민중교육』은 서울 광주의 『오월시』동인의 김진경, 윤재철, 유상덕, 심성보, 고광헌 등과 충남의『삶의 문학』동인인 이은봉, 김영호, 김흥수, 이은식, 송대헌, 최교진 등이 편집한 무크지이다. 그 책의 필진들은 주로 서울 지역과 충남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충남의 경우 대부분『삶의 문학』이라는 무크지 동인이었다. 그들은 무크지 6집 발행 특집으로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농민들을 만나 전국 최초의 ‘농민공동 창작시’인 「옹매듭두 풀구요」를 수록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제 7집 특집으로 ‘문학과 교육’을 잡았는데 그 주제가 서울의 『오월시』동인들의 특집과 내용이 일치하자 두 단체가 모여 『민중교육』을 출간시킨 것이다.
그러다가 5공화국 신군부 정권이 그 내용을 구실로 17명의 교사를 구속하거나 해직시킨 필화사건이다. 최교진은 한 해 전에 보령 탄광촌에서 제자들과 후배 대학생들을 대동하여 탄광촌에서 함께 체험학습을 했다는 이유로 이미 해직된 상태였다. 그 사건으로 조재도, 강병철 등이 교단에서 해직되었고 공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은봉, 이은식과 공주교대를 졸업한 김흥수 시인, 공주사대를 졸업한 정영상 시인 등이 연루되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1992년 ‘문민정부’ 표방 이후 금서들이 해금되어 예술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지워진 역사 복원하는 작업과 새로운 진보 단체를 세우는 사업들이 활발해졌다. 그동안 신산의 세월을 이끌어온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1987년 그 명칭을 <민족문학 작가회의>로 기명하면서 중부권에서도 <대전·충남 민족문학인 협의회>가 발기된다. 회장은 조재훈, 부회장에 홍희표, 김수남 그리고 사무국장에 이은식이 선임되면서 70여 명의 진보 문학인 단체가 출범되는 것이다. 그 후 한국의 문단구조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후신인 <한국작가회의>와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한국문인협회>까지 두 개의 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2절 문학의 현실 참여논쟁
- 순수와 참여논쟁 -
무릇 예술인은 자유인 체질을 토대로 하며 자신의 창작성과물에 의해 그 존재 가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외국의 경우 문화예술 단체가 부각되는 사례가 드물지만 유독 한반도에서만 문학예술 단체의 구분이 뚜렷한 점이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 후반 일제강점기에 조선통치 계통을 강화할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한 게 그 출발점이다. 반면에 카프의 경우 혁명에 의한 세상 변화를 꿈꾸며 변혁의 선봉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의 작가들 중 일부 역시 일제의 탄압이 강해지면서 친일의 길로 방향 전환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 구호의 항구성을 신뢰하기 힘든 사례도 있다.
해방 이후 작가단체들의 우여곡절 끝에 50년대 말 남한 사회에는 <문총>과 <자유문협>이라는 두 단체가 있었다. <자유문협>은 김광섭·이헌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유학파나 외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들이고 <문총>은 박종화·김동리를 종심으로 한 국내 토착계열 문인들이었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한국문인협회>가 태동되어 문학의 발전과 문학인의 권익옹호 등을 내걸고 전국적인 그물망을 구축하였다. 초대 이사장은 전영택이었고 박종화,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조병화 등이 역임했으며 2000년에는 성춘복이 이사장으로 취임 이후 맥을 이어오는데 현재 그 조직은 8개 분과, 7개 지회, 114개 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사업은 한국문학상 제정, 연간 작품집 간행, 『해방문학 20년』 간행, 문학강연회, 문학 세미나, 문예강좌 개최, 『월간문학』발행, 신문학 60년 종합전시회, 전국문학인대회 및 해외문학 심포지엄 개최, 해외문인초청사업 등의 행사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진보단체의 본격적인 태동은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시작된다. 1974년 11월 18일 고은,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박태순 등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학인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저항문학 단체로 결성되었다. 문학계의 ‘반유신 운동’의 본격화를 알린 것은 1973년 12월 24일 백기완이 주도하던 <백범사상연구소> 주최의 ‘민족문학의 밤’이었다. 이로부터 ‘100만인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개시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 1월 7일에는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이 발표되면서 61인 전원이 연행되는 이 사건은 소위 <문인 간첩단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이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는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2007년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하여 내실과 외연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공주에서 참여문학으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숫자는 많으나 <충남작가회의>나 <충남교사문학회> 등에 개별적으로 활동했을 뿐 특별한 구심점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공주에서 학교를 졸업한 연고를 가진 염무웅, 이은봉, 권덕하, 신현수, 하재일, 김상천, 박찬세, 이정록, 조재도, 안학수, 이문복, 신경섭, 최경실 등의 출향 작가와 조재훈, 조동길, 김홍정, 박명순, 박도화, 최은숙, 안연옥, 류지남, 강병철, 박용주, 김혜식, 전병철 등 충남작가회의에 소속된 시인과 소설가 등이다. 강병철은 2001-2004년 <대전·충남작가회의> 회장과 2018-2019년 <충남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망자가 된 류지남 시인은 2016-2017년 <충남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중에서 공주지역에서 소재한 작가들은 틈틈이 문학 활동을 벌이면서 개별적으로 문인협회 회원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반면에 <공주문인협회>를 근간으로 하는 순수 문학을 표방하는 작가들은 비교적 단단하게 뭉쳤다고 할 수 있다. 6.25 동란 직후 공주사대 교수, 학생, 일반인 등이 모여 <시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그 명단은 교수와 일반인, 학생으로 구별된다. 교수로는 이원구, 임헌도, 이재복, 조윤제 등이고 일반 문인은 김상억, 정한모, 김구용, 최문휘 등이며 학생으로는 임강빈, 임성숙, 최원규, 이창섭, 조재훈, 이상설, 안명호, 한상각, 유병학, 윤강원, 이명수 등이 있다. 이 <시회>는 1961년 공주사대 문학모임인 <수요문학동인회>와 한동안 병존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나태주 시인 등이 <공주문학회>를 주도하고 유병학, 이극래, 구중회, 조동길 등이 참여하였다. 그 후 1989년 한국문인협회 공주지부로 재출발하여 지부장에 원종린, 부회장에 박정환, 이극래, 구중회, 사무국장에 강복환을 선임하여 <한국문인협회 공주지부>를 창립하여 창간호를 발행하고 해마다 책을 출간하였다. 그들은 해마다 문학의 밤 행사와 중고생 및 대학생 백일장 ‘찾아가는 문학교실’ 등을 순방하며 지평을 넓히고 있다. 공주문인협회는 1989년에 결성된 이래로 2021년 현재 32호의 기관지를 발행했으며 참여 인원은 97명 안팎이다.
<공주문인협회> 역대 회장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초대 故림헌도 시인(1987~1989)에 이어 故원종린 수필가(1990~1991), 조재훈 시인(1992~1993), 이극래 시인(1994~1995), 유병학 시인(1996~1997), 구중회 시인(1998~1999), 조동길 소설가(2000~2001), 나태주 시인(2002~2003), 유병환 시인(2004~2005), 이극래 시인(2006~2007), 신현보 극작가, 박정란 시인(2010~2011), 유준화 시인(2012~2013), 정연용 시인(2014~201), 조동길 소설가(2016~2017), 안연옥 시인(2018~2019)이며 2021년 현재 박용주 시인(2020~2021)이 회장으로 임하는 중이다. 이들은 대개 대학이나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시민운동을 도모하면서 공주의 문학을 끌어가고 있다.
70년대 공주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은 대개 공주사대와 공주교대 졸업생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 명단은 나태주, 유준호, 김명배, 윤석산, 이장희, 이대영, 조재훈, 최문희, 유병환, 윤강원, 박정환, 한상각, 김흥수, 엄기창, 김동현, 김영만, 구재기, 이관묵, 오철석, 정진석, 오명규, 이명수 등의 시인과 동화작가 강순아, 정만수, 남궁경숙 평론가 유신호가 있다. 어림잡아 30명이 넘으니 초창기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양적 증가이다.
80년대 활동한 작가로는 나태주, 조동길, 원종린, 구중회, 김동원, 김명수, 한용구, 이극래, 김흥식, 심장근, 유병학, 조근호, 전민, 신응순, 최자영, 임환군, 강복환, 안홍렬, 이심훈, 강경철, 안학수, 권인주, 남락현, 이정록, 하재일, 조재도, 백우선, 오필석, 송계헌, 정영상, 최교진, 백남천, 변재열 유재봉, 리헌석, 우희태, 김영훈, 박진용, 김정헌, 이예복, 최일순 등이다. 이들 역시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을 아우르는 작가들도 있으므로 깊은 논쟁은 삼가는 편이다.
동인회로는 소설가 조동길이 참여한「신인문학」, 나태주 시인인 시작한 「계룡문학」, 공주교대 출신의 「터」, 「석순」, 공주사대 출신 임강빈, 조재훈, 구중회, 이명수 등이 참여한 모임인「곰나루문학회」「목요회」그리고 강병철, 전병철, 유지남 등이 참여하는 『삶의 문학』등이 있다.
1991년에 나태주 시인을 중심으로 발행한 「공주문학」제 3호의 경우 320쪽의 분량으로 제작하였는데 시 부문에는 구상회, 권인주, 김명수, 김연화, 림헌도, 변재열, 오철석, 유동삼, 유병학, 이수일, 한상각 등이며 수필에는 강복환, 김진규, 원종린, 유동삼, 이극래, 이소자가 발표하였고 희곡에는 박일동과 신현보, 소설에는 조동길, 양병옥, 평론에서는 오필석이 글을 써 종합지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1992년에 강병철, 전병철, 유병환, 이효범 등 새로운 필진이 등장하기도 했다. 1994년의 경우 4개의 특집이 수록되었는데 특집 1은 ‘나태주 소시집(구중회 해설)’ 특집 2는 ‘여류 문학’인데 김영이, 김춘원, 안연옥, 이종희, 정혜실, 주위출, 최정숙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몇 년 후 강병철과 전병철, 유지남은 <대전·충남작가회의> 발족과 함께 <공주문협>을 탈퇴한다.
그 『공주문학』이 지닌 몇 가지 문제점은 대개 한국문단의 문제와 비슷한 맥락이 된다. 먼저 젊은 회원들의 수혈이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여 대부분의 단체의 ‘발등의 불’이다. 젊은 문인들은 그들끼리만 네트워크를 형성하므로 이들과의 소통을 위한 전폭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데 이 과제는 다음 3절의 ‘문학의 대중화와 문인 수의 증가’에 밝히려 한다.
다음으로 재정후원금 확보 건이다. 이는 이미 설립된 ‘충남문화재단’과 올해에 창립된 ‘공주문화재단’의 도움과 충남도청과 공주시청 등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채워지는 전망이다. 그리고 작품의 질 향상 문제이다. 이는 개인적 노력과 스터디 그룹 형성 그리고 모임을 통한 상호 평가와 점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요즘처럼 코로나 시국에는 줌을 통한 대화도 필요하니 새로운 시스템에의 적응이 요구된다. 그리고 회원들의 친교, 문학의 저변인구 확장 등의 과제 등은 다른 자리에서 얘기될 것이다.
2020년에 간행한 공주문학 32호의 필진을 소개하면서 현재 『공주문학』의 구성과 경과를 보여주며 마무리 짓겠다. 먼저 지회장 박용주 시인의 인사가 있고 임동식 화백의 ‘나의 애송시’ 소개가 보인다. 다음 시인으로는 강헌규, 김근식, 김배숙, 김승배, 김현주, 김혜식, 문희봉, 박용주, 석용현, 손경선, 신현보, 안연옥, 양애경, 양진모, 유계자, 유준화, 육근철, 이극래, 이병연, 이부용, 이수일, 이재흠, 이종옥, 이희정, 임경숙, 임영남, 임영선, 임태래, 장인무, 정금윤, 정태형, 조동수, 조옥희, 조제선, 조효순, 최대승, 최복주 등이다. 다음 수필로는 김진규, 박정란, 석미경, 성낙희, 신원철, 이상호, 이은무, 임정민, 정연용, 조은이며, 기행문으로 박기영, 성재봉, 최홍숙 그리고 강수정과 조동길 소설가의 영화 평론 리뷰가 있다. 아쉬운 점은 위의 명단에서 나타나다시피 시인의 숫자는 넘치는데 소설가의 이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조재훈 시인과 나태주 시인의 글로 마무리한다.
둥둥 북을 울리며,/ 새벽을 향하여 힘차게/ 능금빛 깃발 날리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금강, 넌 우리의 강이다.// 산맥을 치달리던 마한의 말발굽 소리,/ 흙을 목숨처럼 아끼던 백제의 손,/ 아스라이 머언 숨결이/ 달빛에 풀리듯 굽이쳐 흐른다.// 목수건 질끈 두른 흰옷의 설움과/ 가난한 골짜기마다 흘리는 땀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고난의 땅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적시며 흐른다.// 흐르는 물이 마을의 초롱을 켜게 하고// 모닥불과 두레가 또한 물을 흐르게 하는/ 하늘 아래 크낙한 어머니 핏줄/ 금강, 넌 우리의 강이다 -조재훈 시인 「금강」 전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시인 「풀꽃」전문
3절 문학의 대중화와 문인의 증가
조선시대의 시조는 양반 계급끼리의 고답적 문화로 음풍농월과 가무가 주를 이루었다. 실체가 드물지만 서민들의 사설시조와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작자 미상의 작품들이다. 문맹자인 민초들은 전기수의 낭송에 귀를 기울이며 소설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그 후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문학은 소위 지식인들의 고답적 향유문화였고 민초들은 대개 문학 창작의 직접 참여하기 힘든 객석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민중문학의 열풍이 불면서 노동자와 농민들까지 문예의 대열에 참여하면서 현장 문학의 열기가 불었으니 <구로노동자문학회> 같은 단체가 대표 사례이다. 누구나 함께 문학의 생산 대열에 함께 참여하는 ‘문학의 민주화’ 시대의 도래를 꿈꾼 것이다. 84년 『삶의 문학』6집에 수록된 ‘옹매듭두 풀구유’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민중문학의 일부는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도 많았다. 시인들이 농민들의 언어를 녹취하여 문장으로 만들어 다시 농민들의 확인을 받아 활자화시키는 대리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다가 전체 학력이 상승하는 와중에 자본주의의 약진과 함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모든 시스템에 변화가 생긴다.
그 경계점은 대략 1980년대로 즈음한다. 그 이전에는 몇몇 문학지들이 전국적인 판매망을 가지고 명망가 문인들의 배출로 권위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집이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은 모든 조건이 달라졌다. 문인들의 폭발적인 양산과 쏟아지는 작품들로 이제 문학은 일부 특정인에 의해 제작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에 의해 제작·향유되는 대중문화가 된 것이다. 이제 어느 특정 문학지로 전국을 지배하기는 힘들며 작가 역시 모든 일반 독자를 사로잡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 파편화, 지역화, 회원 주임의 다양한 문학지와 생존양식에 변화가 온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 문화에 걸맞는 사이버리즘이 공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백일장 대회 등 각종 행사에서는 인터넷과 종이지면을 통한 행사의 양립을 병행한다. 공주의 경우 주로 교육청과 문인협회, 공주시청 주관의 백제문화제, 시민단체와 함께 하는 우금티 모임 등에서 여전히 원고지와 인터넷을 병행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속도감의 가성비와 종이지면에서의 대면 소통 두 가지 모두 꿈나무들을 위한 문학적 역할이 될 것이다. ‘문학의 대중화’ 시대에서 기성문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일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래의 첫째와 둘째 항목은 그 근간이 유사하고 셋째와 넷째 항목도 비슷한 종류이지만 소소한 차이를 떠올리며 세분화시켰음을 밝힌다.
첫째, 디지털 시대의 적응 문제
둘째, 출판 판도의 변화
셋째, 청소년을 위한 매체 간행
넷째, 젊은 피의 수혈
첫째, 디지털 시대의 적응 문제이다. 1990년대 전후 천리안에서 ‘PC통신 문학’이라는 서비스가 개시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고지 20-30매 분량의 아마추어 SF 과학소설이던 것이 점차 순수소설 추리소설로 확대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자리잡았다. 이들 중 인기 있는 작품들이 출간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 이를 ‘PC통신 문학’ 혹은 ‘사이버 문학’이라 부른다. 그 후 92년 하이텔을 위시하여 나우누리, 유니텔 등에서 수많은 통신문학전용 게시판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문학형식이 인지도를 높여갔다. 90년대의 판타지 소설에 이어 2000년대 귀여니 작가의 『그놈은 멋있었다』등이 대표적이다.
이 통신문단이 신인들의 등단통로가 되면서 기성작가들과의 간극을 메우는 과정도 순식간의 변화였다. 김영하, 송경아. 김호진, 황세연 등은 통신문단에서 이름을 얻어 기성문단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작가들이지만 그 반대로 기성작가들이 웹소설에 뛰어들기도 한 것이다. 박범신의 『촐라체』, 황석영 『개밥바라기』, 공지영 『도가니』, 이기호 『사과는 잘해요』등이 그 경우이다. 이들 모두 종이 지면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네이버, 다음, 교보문고 예스24, 인터파크 중에서 동반 활약 중이다.
디지털 시대의 문학은 사이버 전자문학, 온라인 소설, 웹 소설 등으로 불리우는데 150만의 회원을 가진 인터넷 카페도 있으니 기존의 문학 판도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주로 무협, 로맨스, 판타지, SF, 퓨전, 미스테리 등 다양한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모바일 웹 소설을 운영하는 ‘북팔’에서는 한 달 작가에게 지급하는 원고료가 1억 원이 넘는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공주를 근거로 한 어느 젊은 작가의 경우 월 몇 천 이상을 확보했다고 들은 바 있다. 종이책은 완결된 결과물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들은 인터넷 상에서 독자들과 댓글로 상호 소통하면서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모바일 웹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교보문고와 예스 24 등 대형 서점가에서도 웹소설 시장에 뛰어들었다.
또한 기존의 장르인 시, 소설, 희곡의 벽이 허물어지고 이른바 퓨전(fusion) 문학의 시대가 되래한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느긋한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다양한 장르가 합쳐진 식으로 문학 형태가 바뀌는 중이다. 디카시나 이모티콘을 활용한 문학 생산은 이미 공공연해졌다.
둘째, 위와 연관된 디지털 시대 도래에 따른 출판 판도의 변화이다. 2000년 새 천 년 이후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면서 문학의 판도가 바뀌었다. 한 마디로 출간은 쉽고 판매는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자신의 아파트에 ‘나 홀로 출판사’를 차려놓고도 영업이 가능하다. 몇 명이 모여 몇 십 권의 책만 출판하는 것도 가능하며, 구태여 종이라는 활자 매체가 없어도 인터넷 상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다. 이처럼 21세기 이후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은 미디어 간 융·복합기능을 더하여 e-북, 데이터 방송, 인터넷 신문, 스마트폰 등 다 기능 멀티미디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테블릿 기기만 있으면 신문 영화 만화 소설 그림까지 모든 걸 통달할 수 있다. 디지털이 선도적으로 발달된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 시대를 선도할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는 셈이다.
종이책은 이미 사양화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고 문인들의 작품도 디지털로 남기는 게 그 보존이 안전한 시대이다. 또 능력있는 문인들은 스스로 인터넷 상에서 전자책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여 자신의 책을 디지털화하기도 한다. 미래 사회는 종이책을 구매하거나 주문하는 경우는 줄어들고 대형 서점에서도 전자책을 다운 받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셋째, 청소년을 위한 매체 간행이다. 주로 교육청이나 시청, 문화재단 등 공공기관의 행사와 <우금티 연구소> <공주문인협회> <충남교육연구소> <풀꽃문학관> 등 시민단체 기관에서의 행사로 나뉘어져 있다.
충남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충남 청소년문학상>은 학생들의 작품을 교육청 홈페이지에 게재하면 지도교사들이 멘토를 해주는 형식이다. 지도가 끝나면 연말에 최종 심사를 하여 1박 2일의 대면 행사를 갖는데 2020년의 경우 코로나 때문에 인터넷 지도만 할 수밖에 없었다. 멘토 작가로는 공주대 출신인 이정록 시인과 공주에 거주하는 강병철, 최은숙, 소종민 작가 등이 있다. 이 과정 역시 인터넷 게시판을 활용한 습작 멘토를 진행한다. 2021년도에 <충남 학생문학상>을 <충남 청소년문학상>으로 개명하여 제도권 바깥의 청소년들도 함께 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대전·충남작가회의>의 사업으로 발행하는 청소년 잡지 『미루(발행인 강병철, 편집주관 최은숙)』는 2001년부터 10년가량 간행하여 충남의 중고교에 배포하였는데 경비 문제로 발행이 중단된 게 아쉽다. 서점 판매가 어려운데 지원 경비가 끊어지면서 접게 된 것이다. 책마다 청소년 토론광장과 특정 마을을 ‘톱아 보기’ 체험으로 중고생들의 활동 공간을 만든 바 있다. 미래 세대인 공주의 청소년들 역시 이러한 매체 속에 서 꿈나무들의 미래가 이루어질 터이니 그들과 만나는 공간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장의 교사들에 대한 ‘디지털 문학’ 연수 공간도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전자책 활용에 관심을 가지도록 디지털문학관, 전자문학도서관을 개관하고 있고 사이버문학관을 개관하는 등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바꾸는 작업을 전개하는 중이다. 또한 <디카시> 이외에도 새로 등장한 다양한 장르의 포함 문제도 논의되어야 한다.
넷째, 젊은 피의 수혈이라는 과제이다. 진보적 단체인 <한국작가회의>나 보수 단체인 <한국문인협회> 그리고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나 <한국 소설가협회>까지 망라하여 고령화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즉 글을 쓰는 젊은이들의 문학적 네트워크는 공간 자체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젊은 작가들만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그들과의 소통이 시급한 현안이다.
중앙문단의 시대가 사라지고 지역문학으로 흐르다가 개인과 소그룹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 현재 지나치게 팽창된 한국문단도 점차 무너질 것이며 지역 자치단체의 도움을 받는 지역중심체제 문학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 공주시 역시 시청과 <공주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을 때 청소년 매체와의 연계를 고려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 소통공간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작가들끼리도 세대간의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공주에서도 고등학생을 포함한 습작 작가들이 있다. 2020년 <충남학생문학상> 수상자인 공주고 복제창 학생을 중심으로 김정연, 선형윤, 임민경, 손혜윤 등의 청소년들이 소설집 『느루』를 발행한 것도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공주대와 공주교대, 영상정보대 등의 문학동아리에서도 그들의 연합 문학 소통공간이 진행 중이다. 따라서 공주의 기성 문인들도 이제 아날로그의 구태에서 벗어나 디지털 시대로 능동적 전환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영상과 음성에 길들여진 차세대 꿈나무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문학작품을 만드는 것도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의 콘텐츠 환경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문제, 상업화에 따른 문학정신의 옹호문제도 기성세대가 품는 과제가 됨을 주장하며 글을 가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