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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40년 집필 외길…“세월 상처 보듬은 영혼의 내시경” -이청준-
선화 추천 0 조회 6 08.08.02 05: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0년 집필 외길…“세월 상처 보듬은 영혼의 내시경”

 

 

 

 

  "우리 현대 소설사를 가장 빛낸 지성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이청준을 꼽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소설 '글길'은 우리 현대사 반세기에 있어서 가장 진실한 영혼의 궤적이다."(우찬제 서강대 교수)

 31일 폐암으로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69) 씨가 우리 문단에 남긴 족적은 작지 않다.

 1965년 등단 이래 40여 년을 한결같은 보폭과 열정으로 소설 쓰기의 외길을 걸어 온 장인적 작가였다.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서편제', '비화밀교', '자유의 문', '흰옷'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속에서 보여준 그의 웅숭 깊은 작품세계는 그를 40여 년간 문단의 '큰 기둥'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청준이 걸어온 길


이씨는 1939년 8월 전남 장흥 대덕면(현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소설 '침몰선'과 산문 '어린 날의 추억 독법' 등을 비롯한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유년시절은 공부 잘하는 모범 어린이의 모습이었다.

모범생 이청준은 들어가기 힘들다던 광주 서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는데 이씨는 생전 한 대담에서 시골에서 태어나
살다 도회지로 옮겨오면서 갖게 된 어떤 절망과 동경 같은 것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회지 속 현실에 끼어들지 못하니 말로라도 끼어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학의 동기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후 광주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에 진학했고 졸업을 앞둔 1965년 단편 '퇴원'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등단 이후 '사상계'와 '여원' 등 잡지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병신과 머저리'로 등단 2년 만인 1967년 동인문학상을 거머쥐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은사인 강두식 교수의 주례로 남경자 씨와 결혼한 이씨는 ''소문의 벽', '조율사',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
자서전들 쓰십시다', '예언자' 등의 작품집을 꾸준히 내며 2000년대 초반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중앙문예대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인촌상 등 각종 문학상도 다수 수상했다.

 간간이 잡지사에서 근무한 것과 길지 않은 기간 대학에 출강한 것 외에는 대부분을 전업작가로 창작활동에만 매진해 온 그는
말년에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로 임명돼 강단에 서기도 했다.



 
◇쉼 없는 창작 열정과 깊이 있는 작품세계 


 1965년 등단 때부터 최근까지 40여 년간 이씨는 큰 공백 없이 꾸준한 작품 활동을 보여왔다.

 지난해 암 선고를 받고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신작을 발표해 지난해 11월에 작품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열림원
펴냄)를 묶어내기도 했다.

 1998년 열림원에서 작가의 전집을 발간해 2003년 완간했는데 장편소설 11종 12권, 중.단편소설 10권, 연작소설 3권 등 모두 24종 25권에
이른다.

 전집 완간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과 또 전집에 포함되지 않은 다수의 산문과 동화까지 포함하면 워낙 그 수가 많아 평론가들조차도
정확한 작품 수를 산정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어떤 주제든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 그가 작가적인 개성을 가지고 이처럼 많은 작품을 거의 비슷한 속도로 발표해왔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그의 직업 의식이나 지성으로서의 작가 의식에 있어서나 괄목할 만한 저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쉼 없이 작품활동을 해오는 동안에도 그의 작품에는 태작이 거의 없으며 작품 속에 담긴 주제의식의 깊이와 넓이 역시
남다르다.

 

 소록도를 무대로 진정한 이상향과 삶의 의미를 탐구한 '당신들의 천국', 억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와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린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과 '조율사' 등에서부터, 한(恨)의 정서와 예술혼을 탐구한 '남도사람' 연작과 종교적, 철학적 구원의 문제를 다룬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자유의 문' 등까지 그의 작품들은 사회문제에서 인간의 내면까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권오룡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청준의 소설은 영혼의 내시경과도 같다"며 "그의 글쓰기를 통해 증언되고 있는 세월은 미처 다스려지지 않은 채 누적된 상처의 후유증과 이에 덧붙여진 새로운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던 세월이지만, 이 시대의 아픔을 이청준은
그것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영혼의 영사막에 투영된 상을 통해 동시에 포착해낸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심오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데다 소설의 표현이나 묘사가 현실적이지 않아 그의 소설은 관념소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형식면에서는 격자소설 형태의 중층구조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이청준 소설의 두드러진 색깔 중 하나다. '나'라는 화자가 등장해 독자에게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이다.

 성민엽 서울대 교수는 "인간의 모순적 존재는 인간의 삶을 단층의 삶이 아닌 겹의 삶이 되게 하는데 이청준 소설은 이 겹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탐구"라며 "겹의 삶에 대한 문학적 탐구로서 겹의 문학의 형태적 특성을 띤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택영 경희대 교수는 "중층구조란 화자를 앞장세워 작가가 먼저 '살아 있는 늪'의 바닥에 내려섬으로써 독자를 동참시키려는
은밀한 수법"이라며 "그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하기에 은밀하다. 가장 지배적이 아닌 방법으로서의 지배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이청준 문학의 뿌리 '고향', '어머니' 


 '고향'과 '어머니'를 빼놓고 이청준의 문학을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 아래서 컸는데 '눈길', '새가 운들', '연', '빗새 이야기', '서편제', '해변 아리랑', '축제' 등 많은 작품이
그의 고향과 어머니의 바탕 위에서 탄생한 '망향가'이자 '사모곡'이었다.

 이씨 자신도 산문 '이 나이의 빚 꾸러미'에서 "내 삶과 문학에 대한 은혜를 따지자면야 그 삶을 주고 길러준 고향과 그 고향의
얼굴이라 할 '어머니'를 앞설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등 문학적 뿌리로서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1977년작 '눈길'은 이청준의 문우인 나한봉 감독이

 "이가(이청준)는 손만 빌리고 진짜 뒤에서 소설을 쓴 것은 고향과 어머니"라고 할 정도였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큰형 대신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한 탓에 노모에게 빚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중년의
'나'가 아내와 함께 고향에 혼자 사는 노모를 찾았다가 20년 전 노모와 함께 걷던 눈길을 회상하는 내용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1994년 노모가 세상을 뜬 후에는 '어머니 이야기'의 결산격으로 장편 '축제'를 썼는데, 이 소설 속에는 소설 '눈길'이나 '기억여행',
'빗새 이야기', 동화 '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등의 소설 속에 썼던 어머니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새기기도 했다.

 '축제'에 붙인 머리말에서 작가는 "나는 어머니에게서 늘 아버지를 느꼈다. 온화한 모정과 함께 남성의 대범함과 냉엄스러움을 느꼈다"며 "그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이면서 아버지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심정섭 서울여대 교수는 1970년대 작가 이청준에 대해 쓴 글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전라도적인 사람이고, 또 누구보다도 전라도적인 것을 좋아한다"며 "그가 판소리와 남도창을 좋아하는 것이나 한량의 풍모가 여실하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그가 애초부터 고향의 땅과 밭두렁 논두렁에 맺은 약속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이청준이 남긴 발자취 


 이청준과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평론가 김현은 생전 한 평문에서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있는" 이청준과 박경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며 "상업주의에 어떻게 영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책을 사줄 독자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에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앞서 세상을 뜬 선배 문인 박경리가 그랬듯이 삶에서도, 문학에서도 모범적이었던 이청준은 후배 문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다.

 소설가 이승우 씨는 한 산문에서 "이청준 선생은 내게는 너무 높고 커서, 희망이면서 동시에 절망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내 속에 숨어 있는 미미한 문학적 감성을 세차게 흔들었다"며 이청준을 자신의 작품세계의 뿌리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청준 전집 편집에 참여했던 소설가 이인성 씨도 "작가 지망생이었을 무렵 김현 선생의 배려로 평소 사숙하던 이청준 선생의 여러 면모를 직접 곁눈질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행복이었던지. 더구나 등단 후에도 항상 내 작품을 읽고 술잔을 건네는 당신의 따뜻한
관심은 또 얼마나 고마웠던지"하고 회상했다.

 그의 문학은 장르를 넘나들어 영감을 주기도 했다.
고향 후배인
화가 김선두 중앙대 교수는 그의 소설 전체를 그림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으며 '석화촌', '이어도',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영화 천년학'), '눈길', '벌레 이야기'(영화 '밀양') 등이 영화와 드라마, 연극으로 제작됐다.

'선학동나그네', '서편제', '소리의 빛' 등 판소리의 세계를 서사화한 '남도사람' 연작도 그의 고향을 뿌리로 한 작품들이다

 

 

 
        <이청준이 말하는 이청준 그리고 그의 삶과 소설 >

 

 


 "당신은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는가."

 글을 써 오면서 주위에서 자주 듣는 물음이다. 그 물음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내 처음 동기와 함께 지금도 계속 소설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곤 한다. “나는 왜 계속 소설을 써야 하는가?” 그에 대해 내가 자주 내세우는 동기로 우선 내 태생이 시골내기임을 들곤 한다.

 

 6ㆍ25 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봄 4월 초순 나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처음으로 고향 마을을 떠나 먼 도시의 친척 누님 댁으로 더부살이 길을 나섰다. 신세를 지러 가는 처지에 변변한 선물거리를 마련할 수 없어 전날 한나절 마을 앞 개펄에서 어머니와 함께 잡은 바닷게 자루를 짊어지고서였다. 그런데 열 시간 가까운 버스길에 흔들리고 바스라져 누님 집까지 도착하고 보니 자루 속의 게들은 이미 심하게 상해 있었다. 그 게 자루를 누님은 코를 막으며 대문 앞 쓰리기통에 내다 버렸다. 그때의 그 부끄럽고 무참한 심사라니! 나는 나 자신이 바로 그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내 졸작 ‘키 작은 자유인’ 중 한 부분을 요약한 주인공의 이 같은 술회는 나 자신의 체험 그대로인 셈이다. 뿐더러 나는 그로부터 남루하고 부끄러운 시골뜨기 자신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유족하고 자랑스런 도회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했다.

 

 그 시절 시골에서 도회 학교 진학 목적이었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내게는 그렇듯 떳떳한 도회 살이 끼어들기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도회의 높고 단단한 벽은 쉽사리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도회 살이는 내게 늘 낯설고 서툴었으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주눅 들게 하였다. 나는 언제까지나 도회인다운 익숙함이나 이룸, 거둠이 없는 얼치기 떠돌이 꼴일 뿐이었다. 나는 자연히 나를 끼워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삭이고 무력한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자기 위안의 길이 필요했고, 그것이 나를 배제한 현상의 질서보다 더 나은 다른 세상을 내 나름대로 꿈꾸는 격인 소설 쓰기의 욕망을 싹트게 한 셈이었다.

 

 그런 내면의 동기에서 시작된 새 세상 꿈꾸기 ‘소설 질’은 현상 질서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그 부조리를 개선하고 싶은 희망을 앞세웠음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역시 내 세상 끼어들기의 한 방식과 노력에 불과했던 탓인지 모르지만, 한동안 그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는 어느덧 자신의 소진감과 함께 그 나은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에서조차 심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당엔 버려두고 떠나온 내 남루한 시골 살이의 기억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내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회귀 혹은 확인의 과정이었고, 그로부터 나는 새 귀향길을 닦는 심정으로 옛 시골 고향길을 다시 찾아다니며 도회에서 소진된 삶의 피로를 덜고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조금씩 회복해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과정이 내 소설의 다음 번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회의 삶에 비해 보다 자연 친화적이고 감성적(정의적)이며 개별적, 정적, 자족적, 근원적 생존 질서의 측면이 강해 보이는 시골 살이의 특성이나, 그에 비해 보다 인위적이고 이성적(공리적)이며 사회적, 동적, 의존적, 현상적 제도의 측면이 앞서 보이는 도회 살이 행태는 어느 한 쪽이 보다 본질적 속성이기보다는 양자가 우리 삶의 없어서는 안 될 보완적 양가성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 도회에서는 내 근원에 대한 결핍감에 시달리고 시골에서는 다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도회살이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내 정신의 균형과 조화를 얻어 나가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며 그 도회와 시골 사이를 반복해 오가고 있었다. 도회와 고향 사이를 되풀이 오간 떠남과 되돌아옴의 반복 과정은 그러니까 그 양면성을 온전히 조화시켜 보려는 내 소설의 바른 길 찾기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껏 소설을 써온 또 다른 절실한 연유일 것이다.

 소설이란 다름 아닌 우리 삶 베끼기(모방)일 뿐더러, 기왕지사 소설 질로 삶의 길을 나선 내게는 그 삶의 이룸과 성패가 내 소설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찾았는가. 아직도 어두운 길 위의 헤매임 속에 계속 소설을 쓰고 있음이 반증이거니와 그건 물론 아니다. 어두운 밤 산길을 멀리도 헤매온 느낌이다. 그러고서도 아직 제대로 밝은 길을 찾지 못해 계속 헤매고 있음이 아쉬울 뿐이다.

 

 이는 한 달 여 전 40년 가까운 내 소설 질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문우들 앞에 털어놓은 소회다. ‘밤 산길’은 어둡고 장애 많은 우리 삶과 소설의 길을 내가 자주 비유해온 말인 바, 최첨단 정보의 대량유통 시대에 들어선 작금의 우리 삶은 그 숨막히는 속도와 가치 변동 현상 속에 오히려 더욱 혼란을 겪고 있는 꼴(정보의 바다에 빠짐!)이다. 그리고 그 삶을 베끼는 소설도 계속 그 어둠 속 산길을 헤매는 답답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소설은 그 어둠과 헤매임 속에서도 제 삶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지난한 길 찾기를 계속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일깨워 가며 일어서 나아가지 않으면 삶도 소설도 끝장일 터이므로. 내가 소설의 길을 계속해 가야 하는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비록 그 밤 산길에서 다른 사람을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독행자(獨行者) 처지더라도. 하지만 어두운 산길을 헤매는 독행자 꼴이 어찌 소설의 길을 가는 나 한 사람의 처지일 뿐이랴. 언젠가 나는 한 프랑스 시인 친구에게 그런 내 소설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를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도대체 이 독행 밤 산길 헤매기 식의 내 소설 질이란 게 무엇인가. 내 이웃들에게 그것이 무슨 뜻을 지닐 수 있는가? 그 친구는 내게 충고했다.

 

 “그 어두운 밤 산길은 너 혼자서만 가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 네 뒤에도 그런 독행자가 어둠 속을 외롭게 가고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가 가고 있는 밤 산 근처에도 다른 수많은 산이 있고, 그 산길에도 너 같은 독행자의 영혼들이 제각기 어둠과 두려움, 절망감 속을 헤매고 있을 수 있다. 그런 독행자들은 상상보다 많을 수 있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 독행자의 처지일 수 있다. 그들 중 누가 네 발자국 흔적이라도 만난다면 그는 자기 혼자 어두운 산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얼마나 반갑고 큰 위안을 얻겠는가. 이웃 산들에도 또 다른 누군가가 제 불안한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네 독행자의 소식은, 그것으로 지나간 우리 삶의 길에 대한 진상을 일깨워주는 일은 그 지치고 불안한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노릇이겠는가.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내가 아직도 소설 일을 놓지 못하는 또 다른 구실일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그런 헤매임 끝에 근자 들어 어떤 어슴푸레한 길 표시 빛줄기를 만나게 된 탓도 있을 듯싶다.

 앞서 말했듯 몇 년 전부터 지난 시절의 작품을 한 데 묶어내는 작업 중에 깨달은 일로, 지금까지 내 소설은 꿈(이념)과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 그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정신태의 한계 안에 머물러 온 느낌이었다. 그 현실과 역사의 유전적 침전물로서의 태생적 정서가 담겨 있을 넋(종교성과 맞먹을 우리 신화와 신화적 서사)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었다. 내 소설이 여태껏 긴 세월 어둠 속 길을 헤매 온 것은 그렇듯 우리가 누구인지 본 모습을 결정짓는 첫 요소라 할 우리 신화와 신화성에 소홀한 탓이 아니었던지. 근자 들어 새로운 시작의 시도로 우리 무속의 현세적 덕목(삶의 구원)을 주제로 한 졸작 소설 ‘신화를 삼킨 섬’을 쓴 것은 그런 뒤늦은 깨달음 덕이었다고 할까. 문이 보이면 착각일망정 열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출   처: 한국 가톨릭 문화원

     

     

    이루마의 'If I could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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