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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의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두 개의 뉴스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미국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인 팀 쿡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동성애자인 것이 자랑스럽고,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그것을 ‘신이 준 선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이전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여겨졌다. 아마도 기독교에서는 이를 ‘신성 모독’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까 싶은데, 그렇지만 이성애가 그렇듯이 동성애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사실에 팀 쿡의 이 발언이 논쟁을 축발시키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하나는 엄마를 죽인 아빠를 사형에 처해달라는 청원을 올린 세 자매에 관한 기사이다. 이들은 살인을 저지른 아빠가 지속적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으며, 엄마를 죽인 아빠가 ‘심신미약’으로 풀려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청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잔혹한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때마다 그들은 우울증과 같은 병력을 내세우며 심신미약을 주장하곤 한다. 예전에는 이러한 자녀들의 청원에 대해서 유가적 이념을 앞세운 ‘천륜’이라는 덕목을 들어 비난하였지만, 이제는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는 기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다 보니, 앞의 두 기사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 책은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이 교리를 확립하던 시기는 이미 남성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출발한 종교는 남성중심적인 체계를 굳건히 세우고 그것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페미니즘이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태생적인 성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믿는 신자로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책속의 글들을 통해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닫는 글’에서 이제는 ‘가톨릭교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종교 생활을 하면서 겪는 불편함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의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나 자신을 찾는 길이고 구원과 해방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때로는 종교인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모습에서 나름의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배려’는 수직적 질서의 위에 선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은혜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종교의 교리가 여성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페미니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에서는 다양한 종교의 경전과 의식에서 드러나는 여성차별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그것이 지닌 문제점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서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종교 사이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인식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저자는 ‘어떤 종교가 더 여성친화적이고 어떤 종교가 더 남성중심적인가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성을 차별’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으며, 단지 종교의 교리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성 차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실제 과거 한동안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라는 주장을 들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일종의 자기반성을 통하여 사회의 분위기를 개선해보겠다는 긍정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초래하는 집단들에게 일종의 면죄부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결국 그러한 거대한 구호 속에서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은폐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종교적인 측면이 작용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처지와 실천적인 페미니즘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점검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2장,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에서는 얼마 전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남혐/여혐’이라는 인식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른바 ‘미투’운동으로 시작된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행태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동안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인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군대나 학교, 그리고 직장의 문화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차별적인 요소가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과 같은 행위들은 범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관행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성희롱’도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저자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종교 신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겪었던 교리와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체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특정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제들이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 사고와 현실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파악된다. 과거에는 특정 종교의 신자였지만, 나는 지금은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그동안 만나본 성직자나 신심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의 신념은 존중하지만, 나에게는 강요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곤 했다. 모든 사람의 신념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땐 ‘사회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문제점을 지적한 ‘3장, 평등하지 않은 사랑, 희생의 굴레’에서는 가정의 본질과 그 인식에 내재된 문제점에 대해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에 활동했던 국회의원 중에 남장을 한 여성 의원이 있었다. 그녀가 남장을 한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또한 10여 년 전에 유시민이 국회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선서를 하려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나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사실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많이 변화했지만, 복장에서부터 정장을 고집했던 당시의 국회의 풍속도 역시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머물고 있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전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던 때에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겉으로는 변화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최근 모 정당에서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포용해야 한다고 밝히자, 그에 대해 날선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목도한 바 있다. 대체로 언론의 분석에 의하면, 열성적으로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노년층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제기되었지만, 아마도 이 책의 ‘4장. 희생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이라는 표현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 시절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변화된 사회의식과 분위기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노인 여성은 노인이자 여성으로서 중층적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단지 노인 여성에게만 국한된다고 할 수 없지만, 저자는 여성들에게 가족들과 떨어져 여행을 즐기고 주체적인 활동에 나설 것을 그 대안으로 권유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무엇인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행복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질문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가족을 돌보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나의 고통에 기반해서 타자가 행복한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타자를 변화시켜야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희생에 근거한 돌봄이 아니라, 돌붐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5장, 돌봄의 재발견’의 요지라고 이해된다. 장애 여성의 삶과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돌봄’이라는 인식의 문제를 보다 확장시키고 있다고 여겨진다.
‘6장, 호주제에서 히잡까지’에서는 다양한 종교에서 비롯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를 제시하고, 그러한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양하게 개최되고 있는 축제에서 여성들이 주변인에 머물고 있는 현상을 진단하고, 축제의 주인공으로 여성인물들을 개발할 필요가 잇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축제의 주인공만이 아니라, 축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저자는 특정 종교의 신자 입장에서 페미니즘과 종교의 동행이라는 문제에 착안하여 글을 쓰게 되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그것이 종교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종교계에조차 깊이 뿌리박힌 성차별적인 요소가 산재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경전들, 수많은 언론의 기사들, 나로서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많은 영화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많은 책 등 논의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저자의 논거를 마련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결국 페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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