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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산성,관산성전투 원문보기 글쓴이: 아람
(3) 옥천 고리산
지도 01에 고리산의 ‘고리’는 고구려, 고려를 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리산은 옛날 세계적으로 대홍수 전설, 노아의 방죽 전설과 같이 이 지역이 크게 홍수가 나, 물이 차서 산 정상에 배를 매는 고리
가 있어서 고리산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전설에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고리환자를 사용한 環山(환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이전의 기록인 삼국사기제43권 열전 3 김유신편 하에 古利山(고리산)이라는 말이 나오고, 주 28) 삼국사기 34권 잡기 3 지리 1에 管城郡 本 古尸山郡 景德王 改名 (관성군 본래 고리산군으로 경덕왕때 개명했다.) 주29) 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볼 때 배를 잡아매는 고리 이야기는 삼국사기 작성 이후에 전설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옥천군 농산물집산단지 예정 부지 내 문화유적 연장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자료에서 『신라 尙州 管城郡(옥천군 옥천읍)의 옛 지명. 여기서 ‘尸’는 ‘羅’의 省文으로서 ‘ㄹ’ 받침을 나타내는 자이니(梁柱東, 《增訂古歌硏究》, 一潮閣, 1965, 96쪽), 古尸山은 ‘골산’ 처럼 발음 났을 것이나, 여기서는 현재의 한자음대로 ‘시’로 읽어두었다. 古尸山郡은 본서에서 표기된 방식이 각기 달라서, 신라 진흥왕 15년 7월에 ‘管山城’ 전투에서 신라 高干都刀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 하고(권4 신라본기), 그 전투 장소를 문무왕의 회고담에서 ‘古利山’이라고도 하였다(권43 金庾信傳下). 위의 ‘管山城·古利山’과 그 郡名인 ‘古尸山郡’ 및 郡북쪽 16리의 山名인 ‘環’(《東國輿地勝覽》沃川郡山川條)은 모두 ‘고리산’을 音또는 訓을 따서 표기한 지명인 듯하다. 古利山은 현재의 충북 沃川郡 郡北面 環坪里 뒷산인 環山으로 추정된다(鄭永鎬, 〈百濟古利山城考〉, 《百濟文化》7·8, 1975).』 에서 古利山, 古尸山, 環山을 같은 산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尸’는 ‘羅’의 省文으로서 ‘ㄹ’ 받침을 나타내는 자이니 古尸山은 ‘골산’ 처럼 발음 났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30)
여기서 우리나라의 옛 문자음에 관하여 정리한 구결의 문자 목록을 인터넷 위키 백과에서 위의 표와 같이 자료를 참고해 보면, 구결문자 목록에 尸의 발음이 '러', 종성표기로 'ㄹ' 발음이 되는 것으로 표시 되어 있습니다.
구결 尸의 정확한 발음이 '리"와 일치하지 않으나 'ㄹ' 로 시작한다는 것으로 고러산, 골산인데, 구결이 양주동박사에 의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고, 지금까지 고리산이라는 지명이 계속 구전되고, 삼국사기에 古利山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감안 시 古尸山의 발음은 古利山과 같이 고리산으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구복 교수는 고구려의 ‘고려’국호에 대한 일고 – 삼국사기의 기록과 관련하여- 에서 ‘장수대왕 10년대(422년)에 국호를 고려로 고쳐져 말기까지에는 완전히 고려로 칭해졌다.’라고 하였고,
고구려 연구재단 서길수 교수는 『‘高句麗’ ‘句麗’ ‘高麗’ 국호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에서 고구려가 고려로 칭한 시점을 423년으로 잡으면서 ‘중국 송나라가 처음 나라를 세운 420년, 외교문서에서 나라이름을 高句驪라고 쓰고, 3년 뒤인 장수왕 11년(423)부터는 공식적으로 高麗라고 썼고, 그 뒤 단 한 번도 高句驪라고 쓰지 않고 高麗라는 나라이름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423년 쯤 高句麗는 나라이름을 정식으로 高麗로 바꾸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하여, 장수왕 10년후에 나라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高麗의 麗자의 소릿값(音價)를 ‘li(리)’로 주장하면서 한ㆍ중ㆍ일의 자전(字典)과 옥편(玉篇)에도 대부분 ‘高句麗=고구리’, ‘句麗=구리’, ‘高麗=고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31)
또한 삼국사기 권34편 ‘지리’에 옥천를 管城郡 本 古尸山郡(관성군은 본래 고리산군으로),(주석 29) 참조) 보은을 三年郡 本 三年山郡 (삼년군은 본래 삼년산군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주석 17) 참조) 그리고 삼년산성은 3년동안 공사해서 쌓은 산성이라 삼년산성이라 한다.(주석 16) 참조)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삼년산군이 삼년산성에서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유추하여 생각하면 고리산군 지명 역시 5세기 후반의 고구려의 남진으로 관련되어 생긴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관산성의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삼거리토성에서 바라본 고리산 모습입니다. 저 산 너머로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이 곳에 산성을 쌓는다고 하고,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패하면 죽는다는 내용과 이 성을 쌓으므로 고구려를 막을 수 있다는 말로 노동의 강도를 높였을 것이고, 높은 강도의 노동 속에 고구려가 쳐들어온다는 방향의 높은 산을 향해 고구려를 욕하며, 고리산(고구려산)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진 01 삼거리토성에서 바라 본 고리산
(4) 백제의 반격, 사현성, 이산성 그리고 사정성, 보문산성과 우술성(계족산성)
(가) 사현성 및 이산성에 대한 학계의 견해
지도 01의 사현성, 이산성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의하면 백제 동성왕은 490년 음력 7월에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주석 17) 참조) 기록이 있습니다.
충청남도역사문화 연구회에서 출판한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 - 한국편 Ⅰ- 에 사현성은 井上秀雄 교수는 ‘조선성곽일람’ 논문을 인용 현재의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산성에 비정하였고, 김영심 교수는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5〜7세기를 중심으로-」 논문에서 광정리 산성은 차령을 넘어 공주로 진압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왕도 웅진 방어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주32)
같은 책에서 이산성은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祥地分(삼국유명미상지분)에 나오고, 민덕식교수의 「고구려 道西縣城考」에서 충북 증원군 도안면의 이성산성으로 보았으나 그 곳이 삼국사기 지리지 4에 의하면 고구려 영역이기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고 언급을 했고, 井上秀雄교수 해석한 『三國史記』에 이산성을 현재의 경북 고령군 고령읍의 主山城으로 보았으나 고령이 대가야 지역이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 고 언급했으며, 서정석교수는 동성왕 20년(498) 이전에는 웅진도성과 그 부속 시설의 정비와 함께 왕도 주변에 환상으로 산성을 배치하는 위성방비체제를 구축해 왔다. 이 시기에 새로 축조된 牛頭城(청양, 486) · 沙峴城(공주 정안, 490) · 耳山城(490)은 왕도 웅진을 방어하기 위해 차령을 넘어 금강유역으로 통하는 요충에 설치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산성도 웅진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주 33)
양기석 교수는 『5~6세기 百濟의北界 - 475~551년 百濟의漢江流域 領有問題를중심으로-』 논문에서 동성왕대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한 지점은 牛頭城(486), 沙峴城과 耳山城 (490), 沙井城(498), 加林城, 炭峴(501)으로 보았고, 우두성은 대동지지 권 5 한산 성지조 에 의해 충남 한산의 乾芝山城(건지산성)에 비정하고, 沙峴城은 井上秀雄의 조선성곽일람 논 문을 인용 현재의 충남 공주시 정안면 廣停里山城에 비정하였고, 이곳은 차령을 넘어 공주 지역에 진입하는데 요충지이다. 라고 언급하였고, 耳山城은 민덕식교수의 「고구려 道西縣城 考」 논문을 인용 충북 괴산군(증평군) 도안면 노암리 산 74번지 尼聖山城으로 비정, 沙井城 은 성주탁교수 「대전지역 고대산성고」논문을 인용 대전시 중구 사정동으로 비정, 加林城은 충남 부여 임천면의 성흥산성으로 비정, 炭峴은 성주탁교수 「백제 탄현 소고 – 김유신 장군의 백제 공격로를 중심으로-」 논문을 인용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숯고개로 각각 비정된다. 고 하면서, 이처럼 동성왕대 축성 지점을 살펴보면 충남 한산, 공주, 부여, 금산, 대전, 충북 괴산(증평)으로 거의 차령산맥 이남 지역에 걸쳐 분포한 것으로 드러난다. 주 34) 고 언급하였습니 다.
사현성 및 이산성에 대한 현재 학계의 시각입니다. 광정리 산성은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천안 에서 차령을 거쳐 공주로 오는 길목에 있는 광정리에 있는 산성인데, 광정리 옆에 사현리가 있어 광정리에 있는 산성을 사현성으로 비정하였고, 이산성은 공주(웅진)을 방어하기 위한 위치로 충북 증평군에 위치한 이성산성으로 비정하였는데,
충북 증평군의 이성산성은 여러 차례 발굴 작업하여 증평 이성산성Ⅰ -남성남수문지- 에서 ‘사현성은 괴산군 모래재로 추정되고, 이현성은 증평과 도안의 경계에 위치한 이성산성으로 추정된다. 증평지역은 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어, 이 두산성을 경계로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35)
증평이성산성Ⅱ -남성북동문지- 에서는 ‘백제도 490년(동성왕 12) 사현성과 이현성을 쌓았 다. 사현성은 괴산군 모래재로 추정되고, 이현성은 증평과 도안의 경계에 위치한 二城山城 으 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증평지역은 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어, 이 두산성을 경계로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36)
증평 이성산성Ⅲ - 남성1,2,3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에서는 증평은 초기 백제가 진출 후 475년 이후 남성골산성의 발굴조사 및 진천대모산성과 부모산성에서고 고구려 토기출토 등으 로 청주, 진천과 인접한 증평 또한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라에 의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490년 백제 본기의 이산성을 이성 산성으로 비정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잠정 확인이 되었습니다. 주37)
삼국사기의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라는 의미를 웅진(공주)를 기준으로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보았고, 공주보다 북쪽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주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에 산성을 쌓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했고, 고구려가 대전까지 남진한 사실을 감안하여 사현성과 이산성을 옥천과 대전의 근교 산성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나) 사현성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대전에서는 대전시 동구 사성동(모래재)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성동산성이라고, 옥천에서는 옥천군 군북면 항곡리(항골)에 있다하여 항곡리 산성이라는 산성이 있습니다.
모래재를 한자화 하면 沙峴입니다. 그러나 사성동과 모래재는 서로 관련이 없는 단어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모래재라는 지명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이정표에 모래재라는 말을 넣은 것 같습니다.
사현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존재하였습니다. 대전지명지에 대전지명의 유래를 찾기 위한 근거 자료로 우암 송시열의 장례에 관한 일기인 『초산일기』를 인용하였는데 그 초산일기에 ‘사현’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그 주변의 마을 이름을 지도 02에 빨간색으로 표시를 하였습니다.
지도 02, 1919 오만분에 1 지도, 사현성 중심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부록 권2의 「초산일기(楚山日記)」에 나타나는 이 고장의 한자지명을 「초산일기」의 해당 부분을 다음에 번역하여 소개한 부분을 보면
7월 11일(乙巳) 새벽 2시(축시)에 빈소를 파한 다음 조전(朝奠)과 상식(上食)을 올리고 나서 시신(柩)을 상여에 실은 다음 발인제를 지내고 바로 길을 떠나는 새벽 미명(未明)에 비바람이 치다가 오래지 않아 조금 개었다. 상여를 메는 등의 인부들의 담당은 주산(注山), 마산(馬山), 사현(沙峴), 와지(瓦旨) 등 4개 부락과 배달촌(白達村), 대전(大田), 사오(沙塢), 초동(草洞)에서 사창계(社倉契)가 차출(調出)하여 3연패로 나누어 번갈아 메고 동화동(東華洞)까지 갔는데 이덕원(李德遠) 등이 병풍과 차일을 냇가에 치고 기다리고 있기에 거기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초산일기(楚山日記)」로 여러 마을 이름과 더불어 '대전(大田)'이 쓰였음을 확신할 수 있는 확증적인 자료이듯이 ‘사현’ 역시 확증적인 자료일 것입니다.
‘초산일기’에서 '대전(大田)'을 비롯하여 '주산(注山), 마산(馬山), 사현(沙峴), 와지(瓦旨), 배달촌(白達村), 사오(沙塢), 초동(草洞)' 등 8개의 지명이 발견되는데 주38) 송시열이 1689년 賜死되었으므로 상기의 지명은 1689년 지명입니다.
그 외에 昌山 成九鏞이 지은 은진송씨 主簿公 眉年 墓碣銘(묘갈명) 중에서 司直 娶安東權氏 副提學 梅軒遇之女 生公 諱曰 眉年 表德與生卒俱失無傳 配安東權氏 綠事貴達女 同葬于懷德東沙峴 (사직공은 안동 권씨 부제학 매헌 우(遇)의 따님과 결혼하여 공을 낳았다. 이름은 미년(眉年)이다. 드러난 덕과 생졸 년대를 모두 잃어버려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록사의 벼슬을 한 귀달(貴達)의 따님이다. 장례는 회덕 동쪽 사현에 합장하였다.)
은진송씨 주부공 미년은 쌍청당 송유의 아들 지평공 계사, 사직공 계중 중 둘째 사직공 계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주부공 미현의 묘갈명에서 표현되는 사현은 15세기 후반에도 모래재를 사현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도02는 1919년도 편찬 된 지도로 주산은 주산리로, 마산은 마산리로, 배달촌은 송촌으로 주39) 초동은 초동으로, 와지는 와리나 와정리일 가능성이 있는데, 사현은 사성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반 평민은 모래재로, 문서와 한자를 쓰는 양반은 사현으로 불리던 곳이 일제강점기 초기, 1914년경에 지명이 사성리로 바뀐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사성리는 모래재이고 모래재를 한자화 한 것이 사현입니다.
(다) 이산성
대전시 중구 소호동에 있어 소호동산성이라하고 비파재 옆에 있어서 비파산성이라고도 합니다. 지도 03는 1919년 오만분의 1 지도로 이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지명(빨간색)을 볼 수 있도록 편집을 하였고, 노란색은 주변 산성이 있는 위치를 표시한 것입니다.
지도 03을 보면 이산성(소호동산성) 위에 이사리(이사동)이 있습니다. 대전지명지에는 500년전 은진송씨들이 정착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사한리라 하였고, 윗사한, 아랫사한이 합쳐져 이사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주40)
지도 03 1919 오만분에 1 지도, 이산성 중심
그러면 이사리는 이사한리의 준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전지명지 971쪽에서 언급된 유성구 노은동은 논골이 한자화 과정에서 노은동이 되었다고 하는데, 노은을 빨리 발음하면 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한를 빨리 발음하면 ‘산’이 됩니다. 이사한리를 이산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사리는 ‘이산’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 사현성과 이산성의 공통점
사현성과 이산성은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옥천(관산성)에서 대전으로 넘어 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현성은 지도02의 독골재(대전지명지에 돌이 많아 돌골, 독골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 골짜기로 옥천을 오고 갔다고 함) 주41) 를 경유하여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산성은 지도03의 관산성에서 옥천 닭재(계현, 계현산성)를 경유 대전천 따라 대전으로 갈 수도 있지만, 공주말(촌) 경유 이산성 옆, 오도산보루, 무수동(리), 사정성에서 유등천 따라 대전으로 가던가, 아니면 진잠쪽으로 경유 논산, 부여로 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 산성의 이름이 산성의 이름이 산성배후지 이름이 아닌 공격하고 진격해 나가야할 쪽의 마을 이름을 산성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사현성은 백제가 축성한 성임에도 옥천쪽에서 독골재 정상으로 올라오는 것이 대전쪽 독골로 올라오는 것보다 쉽습니다. 즉 처음 산성 축성 시 적은 산성 접근이 힘들게 하고, 아군은 산성 접근이 편하게 축성하므로 산성의 배후지가 옥천쪽으로, 사현성에 있어서 대전쪽이 적 방향입니다. 옥천쪽이 산성의 배후지이면 보통 배후지 지명으로 산성의 이름을 명명하는데 대전쪽인 모래재, 사현성이라고 명명한 것은 고구려에 점령당한 대전쪽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산성 경우 이산성의 주소는 대전시 동구 이사동 산18번지 주42) 이고, 이사동, 소호동, 대별동 경계에 있는 산성임에도 현재 대전에서 소호동산성이나 비파산성으로 불리는데, 이는 소호동이나 비파재쪽에서 산성의 접근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산성을 중심으로 방향으로 말하자면 이사리는 대전쪽이고, 소호동쪽은 옥천쪽입니다.
사현성과 마찬가지로 옥천쪽이 산성의 배후지로, 보통은 배후지 지명을 산성 이름으로 명명하는데 대전쪽인 이사리, 이산성이라고 명명한 것은 사현성의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번째, 공격 방향인 대전쪽으로 후속 산성 축성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산성은 사정성, 보문산성으로 사현성은 우술성(계족산성)으로 후속 산성이 축성 축성되었습니다.
(마) 이산성, 사현성의 후속 산성 축성
① 사정성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 498년 가을 7월에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주43) 기록과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에서 沙井城은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오고, 成周鐸 교수의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논문을 인용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沙井洞으로 비정 되고 있다. 고 언급하였습니다. 주44)
沙井城은 지도0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沙井里에 있는 산성으로 성주탁교수는 1972년 조사할 때 백제시대의 2종류의 명문이 새겨진 평와편을 수습한 바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498)조에는 “사정성(沙井城)을 축조하고 비타(毗陀) 한솔(杆率)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고 하며, 성왕(聖王) 4년(526)조에는 “사정성에 목책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당기(唐紀) 16 「고종 용삭2년」조에는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책(沙井柵)등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 기술된 사정성(沙井城)에 관련된 기록은 모두 현재의 사정성과 관련된 기록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주45)
고구려 남진 시 사정성은 보문산성과 이산성과 관련 대전지역의 탈환과 백제의 사신이 신라와 교통하는 길목으로 공주, 말재(마티), 동월계곡, 자티고개, 성북동산성, 흑성리산성, 사정성, 이산성, 계현성(닭재), 옥천으로 이어지는 신라와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한 성으로 추정이 되고, 백제가 사비(부여)도 천도 후에도 신라와 연결 교통로 및 관산성 전투 시 성왕이 구천으로 갈 시 경유한 성으로 추정이 됩니다.
② 보문산성
보문산성, 대전광역시의 복원, 정비 계획에 따라 1990년 3월 12일부터 4월 20일까지 윤무병 교수를 비롯한 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이를 토대로 정비가 이루어졌고, 성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 및 기와편과 고려시대 어골문 기와편등이 확인되었고, 산성의 정상부에 자리한 장대지에서의 조망은 남쪽 일대만 산으로 막혀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시계가 좋아 대전시내가 한눈에 조망되고,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계룡산일대와 금강일대까지 조망이 되어 금산 추부면에서 대전시내를 들어오는 교통로 감시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46)
대전의 산성 분포조사 99쪽의 보문산성의 현황을 참조하면 북쪽 장대지(표고 404m)와 남서쪽 산성끝(표고 389m)과는 표고차가 15m로, 이는 남쪽에 위치한 이산성에서 보문산성의 내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의 내부를 보이게 하는 것은 아군에게만 가능하고, 보문산성이 대전지역의 경계가 이산성보다 좋으므로 대전지역을 탈환하려는 백제에게 있어서 필요한 산성으로 추정이 되며, 학계는 보문산성을 백제 말기 축성으로 추정하는데, 그것보다는 고구려의 남진 시기의 490년에서 498년 사이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우술성(계족산성)
우술성(계족산성), 현재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의 계족산성으로 비정되는데, 계족산성발굴조사에서 ‘雨述’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술성임을 알게 되었다 (충남대박물관·대전광역시 1998, 『계족산성 발굴조사약보고』, 8~9쪽.)
계족산성은 표고 399m의 산정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1,037m.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2~6m,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9.9m 정도이다. 성의 동·서· 남쪽에 나비 4m의 門址가 있고 길이 110㎝, 너비75㎝, 높이63㎝의 직사각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m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문의-청주를 거쳐 북상하는 진로를 감시할 수 있으며 보은-옥천-회덕-유성-공주로 이르는 웅진도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산성 안에서는 단각고배를 비롯하여 장경호 · 단경소호·완·인화문토기등이 출토되었는데 대체적으로 6세기 중반에서 8세기대에 이르는 것으로 편년된다. 주47)
우술성(계족산성)은 백제영역 내 위치해 있고, 1993년 대전공업대 향토문화 연구소가 계족산성 서문터를 조사하면서 사비시기 백제 양식의 연화문 와당 2점을 수습, 백제시대 산성으로 거의 확정되어, 산성 소개 및 산성표문에 백제부흥운동기의 웅장성으로 소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1997~98년 산성을 발굴조사한 충남대 박물관은 계족산성이 얇은 판상석을 이용해 협축법으로 쌓고 외벽 하단부는 기단보축(기단보축)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과 산성 내부에서 출토된 단각고배와 대부장경호 등을 바탕으로 6세기 중·후반 신라에 의해 축조됐다고 결론지었다.
충남대는 98년 이후 2002년까지 계족산성 발굴을 계속하면서 산성내 저수지에서 발굴된 철촉, 세선조문 기와 등이 신라 유물임을 강조하며 계족산성 백제 축조설을 부인했다.
충남대 백제연구소(책임조사원 박순발 교수)가 발간한 대전 계족산성 발굴보고서는 “5세기말~6세기초 금강 상류의 북안을 따라 남하하고 동시에 일부 서진(西進)하던 신라가 6세기 중엽에 미호천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계족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며 “백제로의 진출보다는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반면, 심정보 한밭대 교수는 ▲기단보축은 신라의 전유물이 아니라 고구려 산성에서도 나타나 신라뿐 아니라 백제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북벽 내부에서 채집한 목탄시료의 연대 측정결과 415년쯤이므로 계족산성의 축조 시점이 5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저수지 출토 유물의 중심연대가 7세기 후반이라며 백제산성임을 주장해 왔다.
논란 속에 2006년 대전시가 계족산성의 유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산성내 저수지 바닥에서 수조의 크기는 길이 11.6m(추정길이 17.4m), 너비 5.2m로 2006년까지 발굴된 목곽 수조시설 중 삼국시대 수조 가운데 최대다.
심정보 교수는 “지금까지 삼국시대 목곽수조는 공주 공산성, 대전 월평동유적, 순천 검단산성, 금산 백령산성, 부여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서 발굴됐으며 모두 백제시대의 것”이라면서 “수조가 나왔다는 것은 계족산성이 백제 산성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주48)
산성의 배치 면에서 보면 동문지 옆 집수지인 연지의 표고 367m이고, 남문지 봉수대지 옆 언덕은 430m, 북쪽과 북서 건물지의 표고가 432m로 산성의 배치 상 동쪽으로 산성이 내부가 보이는 배치입니다. 주49)
산성의 내부는 적군에게 보여주면 전술 상 불리하므로 산성의 내부를 볼 수 있는 동쪽은 우술성(계족산성) 처음 축성 시 아군 지역일 것입니다. 동쪽은 신라 옥천쪽이고, 서쪽은 대전, 공주쪽입니다. 따라서 산성의 배치 상 우술성(계족산성)은 신라성입니다.
그러나 475년 이후 고구려의 남진을 고려하고, 고구려가 점령한 대전지구의 탈환을 하기 위한 백제의 490년 사현성과 이산성의 축성과 498년 사정성 축성 및 이산성쪽으로 기울어진 보문산성을 감안하면 우술성(계족산성)은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가 고구려가 점령한 대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백제가 처음 축성한 산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28) 三國史記 四十三. 列傳第三. 金庾信 下 文武大王旣與英公 ---- 百濟 明襛王 在 古利山 謀侵我國 ----
주29) 三國史記卷第三十四 雜志第三 地理一 管城郡 本 古尸山郡 景德王 改名 今因之
주30) 옥천군 농산물집산단지 예정부지내 문화유적 연장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자료- 2008. 12. 4. 중원문화재연구원 5쪽 주석 3
주31) 서길수, 2007년 5월, ‘高句麗’ ‘高麗’ 국호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 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고구려연구회ㆍ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주32)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 - 한국편 Ⅰ- , 2008, 충청남도역사문화 연구회, 164-165쪽
주33)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 - 한국편 Ⅰ- , 2008, 충청남도역사문화 연구회, 164-165쪽
주34) 양기석, 『5~6세기 百濟의北界 - 475~551년百濟의漢江流域 領有問題를중심으로-』, 博物館紀要20 2005. 12. 檀國大學校 石宙善紀念博物館, 30-31쪽
주35) 증평 이성산성Ⅰ-남성남수문지-, 박중균 백영종, 2011, 중원문화재연구원 증평군, 16쪽
주36) 증평이성산성Ⅱ -남성북동문지-, 백영종 이상섭, 2012, 중원문화재연구원 증평군, 18쪽
주37) 증평 이성산성Ⅲ -남성1,2,3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13, 증평군 중원문화재연구원 23-25쪽
주38)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49쪽
주39)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386쪽
주40)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79쪽
주41)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245쪽
주42)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80쪽
주43) 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第四 東城王 二十年 秋七月 築 沙井城 以扞率 毗陁 鎭之
주44)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 - 한국편 Ⅰ- , 2008, 충청남도역사문화 연구회, 168쪽
주45) 성주탁, 「대전부근고대성지고」 『백제연구』5,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4
주46) 대전의 산성 분포조사, (재)백제문화재연구원, 2012년 97-99쪽
주47) 백제사자료역주집(百濟史資料譯註集) - 한국편 Ⅰ- , 2008, 충청남도역사문화 연구회, 316 쪽
주48) 문화답사 기획운영 및 답사지 제작, 2006, 경희대학교중앙박물관, 7-8쪽
주49) 대전 계족산성 문화재 정밀실측 및 발굴(시굴)조사 약식보고서 2015 백제문화재연구원 13쪽과 대전의 산성 분포조사, (재)백제문화재연구원, 2012년 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