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별 임한별님의 교우 단상: ‘사랑 때문에’ ◈
“우리는 사랑 때문에 괴롭다. 사랑이 없는 사람도 사랑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사랑 자리에 다른 말을 집어넣어도 괴롭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괴롭다. 우리는 사탕 때문에도 괴롭다. 한낱 사탕 때문에도 괴로울 때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괴롭다. 사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도 우리는 괴롭다. 사람도 사랑도 모조리 괴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말 때문에 다시 괴롭다.
우리는 말하면서 괴롭다. 말한 뒤에도 괴롭고 말하지 못해서도 괴롭다. 말하기 전부 다 괴롭다. 말하려고 괴롭고 괴로우려고 다시 말한다. … 나는 나 때문에 그곳이 괴롭다. 내가 있었던 장소, 네가 머물렀던 장소. 사람이든 사랑이든 할 것 없이 사탕처럼 녹아내리던 장소. 그 장소가 괴롭다. 그 장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 거기가 어딜까? 나는 모른다. 너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그 장소를 괴롭다고만 말한다. 괴롭지 않으면 장소가 아니니까. 장소라서 괴롭고 장소가 아니라서 더 괴로운 곳에 내가 있다. 누가 더 있을까? 괴로운 자가 있다.” (괴로운 자-김언)
추천 도서로 교회에 냈던 시집,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에 나오는, 김언 시인의 <괴로운 자>라는 산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죠. 그러나 가끔 우리는 사랑 때문에 괴롭고, 사랑 때문에 슬프며, 사랑 때문에 서로 상처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참고 넘어갑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기억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더 잘 인식하고 더 오래 기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성취해낸 일보다는 실패의 경험들에 관해서, 또 우리에게 잘해준 사람에 대해서보다 우리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오래 간직하죠.
왜일까요? 우리 삶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이 일어나서일까요? 이와 관련된 한 심리학자의 실험이 있습니다. 특별한 감정이 있을 때마다 일기를 쓰게 시킨 거죠. 그랬더니 긍정적인 감정에 비해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으로 많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험방식을 바꾸어서 무선 호출기를 통해 해당 시점의 감정을 조사했더니, 행복한 순간이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두 배나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이 일어나서라는 가설은 땡-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더 잘 간직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제게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뜬금없이 위에서는 사랑에 대해 말해놓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자,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다시 위로 돌아가서, 사랑은 긍정적인 감정이죠.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기쁘고, 감사하고, 서로 나누고…. 사랑은 여러 가지 다양한 긍정적 감정들을 파생시킵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쉽게 말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며, 상처를 주고받는 등, 다양한 이면을 보이게 되죠. 그렇다면, 똑같은 확률로 긍정적 사건과 부정적 사건이 둘 다 발생했을 때에, 우리는 부정적 사건에 대해서 더 오래 간직하게 되겠죠?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더 잘 가지고 가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감정을, 더 행복한 기억을, 뭐가 되었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것들을 심어주고 싶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해주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그나 그녀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용서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해받을 수는 없죠. 그가 참고 넘어가주는 이유는 당신보다 마음이 더 넓다거나, 더 수련이 되었다거나, 더 이해심이 깊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해서죠. 그러니까 당신도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랑하기 위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배려를 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서로를 위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는 사랑을 해서 기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어떤 기억을 간직하게 할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 의신 이의신님의 교우 단상: ‘딸아이의 반바지’ ◈
원주에 사는 딸이 엄마의 이사 소식을 듣고는 손주 녀석과 왔다.
손목에 염증이 생겨서 한 달 동안이나 깁스를 했다가 어제 풀었는데, 한 손으로 운전을 하고 왔더니 팔이 아프다는 소리에 반가움은 뒤로 숨고 미안함이 앞섰다.
늘 가슴 속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멍울 같은 귀한 딸인데...
두 밤쯤은 자고 가기를 바랬건만, 하룻밤만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딸이 왠지 밉다.
“나도 엄마랑 더 있고 싶지. 그런데 이놈 바이올린 발표회가 있어서 그래...!”
이튿날, 아침 설거지도 거른 채 애미 있는 곳 어딘 가라도 보여 주고 싶어서 서둘러 순창 강천사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손주 녀석은 입은 채로 계곡물로 뛰어들고는 춥다고 한다.
무덥던 여름이 한 발짝 물러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천사로 오르는 길, 기왓장에 소원을 적고 시주를 하는 불전함 앞에서 손주 녀석은 시주도 하지 않고는, “우리 아빠 사업 잘 되게, 우리 엄마 아프니 빨리 났게 해주세요, 누나 공부 잘 하게 해주시고, 우리 햄스터 서로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소원문을 썼다.
현금이 하나도 없었던 나와 딸아이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손주 녀석의 소원문에 할머니를 위한 내용이 없었다는 것의 서운함과 하나님이 아닌 부처님께 기도를 하는 손주를 보면서 느끼는 만감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들의 머리에 군밤을 주는 딸아이는 아들의 행동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엉뚱하면 머리가 좋다는 속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돌아오면서 모악산 농가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딸이 오면 주려고 했던 것들을 꼼꼼히 챙겨 바라바리 챙겨 주었다.
주어 보내는 애미의 마음은 주어도 늘 부족한데, 딸자식은 애미 같지 않은 것 같아 그것도 섭섭한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는 딸의 자동차인 것 같아 힘이 팔린다.
하지만 자동차 안의 딸은 천천히 가려고 애쓸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한 없이 한 곳 만을 바라보는 내 자신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가고나니 냉장고 안에 주고자 했던 물건들이 서너 개 남아 있고, 딸은 자신의 반바지도 놓고 갔다. “딸이 일부러 놓고 갔을거야!” 하며 난 눈에 잘 띠는 곳에 딸의 반바지를 걸어놓았다.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씽크대의 물을 강하게 틀었다. 물소리에 내 울음소리가 묻히기를 바라면서... 자식이 왠수라더니, 왠수의 반바지가 나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한 동안 전화기에 집중했다.
“엄마, 내 반바지 거기 있죠? 반바지 가지러 곧 다시 갈게요!” 라는 딸아이의 전화가 금방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아이는 자신의 반바지가 필요 없는지, 또 사면된다고 생각하는지, 내 전화기는 그렇게 한 동안 벙어리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