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년에 생겼다. 전라도는 천년을 넘긴 가장 오랜 지명이다. 고려왕조 현종이 강남도의 대표 전주와 해양도의 대표인 나주를 묶어서 전라도로 행정개편을 하였다. 송강 정철은 조선 시대의 원흉 전두환이고 역사와 문화를 왜곡시킨 허문도였다.
정철과 선조는 또한 임진왜란을 만들은 내부적인 원흉으로 반만년 역사에 가장 큰 민족의 비극을 만들은 자들이다. 정철에 대하여 우리는 그 존재만 확인하면 될 인물정도인데 교과서에 수록되고 또 시험에 나와 학생들이 지금도 공부하는 것이 참 거시기하다.
왜?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일까?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는 조선 4대 사화다. 이 때 희생자가 오백 명인데 송강 정철과 선조는 기축옥사를 조작해서 호남인 천명을 죽였다. 그리고 정철과 선조는 전라도인물들전라도인물들은 중앙 관료로 등원을 시키지 않았다. 정철의 문학이 문서로 이어진 것은 인정하지만 그의 문학은 왕에게 아부하는 것, 음탕한 것, 민중에 삶에 관심이 없는 이탈적 삶을 미화시킨 것들이다. 주관적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여립과 마틴 루터의 평행이론
마틴 루터 당시 성서 한 권의 가격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5억 원이었다. 중세시대 말은 기독교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성서는 비싸서 읽을 수 없었고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읽을 수 없었고 교황세력들이 평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해서 읽지 못했다. 루터는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인쇄기술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교황무오설>을 비판하고 독점사제설이 아닌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는데 아주 의미 있는 저항이었다.
루터가 죽은 1546년에 조선에 루터와 같은 인물이 태어난다. 정여립(1546~1589)이다. 정여립은 조선왕조가 하지 못했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민중들의 상생과 부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대동계를 만들어서 마을의 공동재산을 형성했고 그 재산으로 지주들의 땅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이 농사를 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운동을 진안에서 성공시키며 황해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확대를 한 선비이며 헌신적인 혁명가였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알려진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정여립은 50년 앞선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맹자의 사상을 더 진보시켜서 세상의 모든 자연과 곡물 인적 자원은 왕이나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고 공공의 것이기에 소유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민중은 왕을 언제나 선택하는 것이고 이웃이 임금이란 생각을 깊게 하였다. 이런 생각을 그는 글로 전하고 사람들과 만나서 뜻을 나누었다. 대동 공동체는 노비를 비롯해 사회의 약자들이 차별되지 않았고 중심 리더십에 신분의 제한을 두지 않은 차별금지법을 실행한 인물이다.
송강 정철의 계략
정철은 순수하고 이상적인 선비 정여립을 역으로 은밀하게 이용했고 치밀하게 음모를 꾸몄다. 정여립은 20대 급제하여 수많은 독서를 하고 그 논리가 탁월하여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추천을 한 인물이다. 정여립은 당시의 서인들이 명나라에 의존해서 민중의 삶이 더 고난에 처하는 것에 대하여 선조 앞에 당당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선조는 경청한 것이 아니라 꾸짖었다. 정여립은 스스로 관료를 그만두고 고향 진안에 내려가서 대동계라는 의미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대동계는 한 달에 한 번 마을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하고 화살을 쏘는 대회를 하며 체력훈련을 했는데 송강 정철은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과장 조작하고 한준을 통해서 선조에게 정여립을 비롯한 대동계 핵심이 역모를 꾸몄다고 말한다.
동인의 류성룡 등은 명나라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외교를 하고 남도 사람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주장하지만 이러 생각을 받아서 민중의 삶을 살펴야 하는데 선조는 보수적인 태도로 왕권을 유지하려고만했다. 선조는 정철을 내세워 옥사를 치른다. 정철은 호남인 천여명을 죽이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는 권모술수를 부려 결국 임진왜란을 자초했고 조선민중은 명나라 군인들의 생활을 책임지느라 파탄의 삶을 산다.
홍도야 울지 말고 배 띄어라.
경기민요 <배 띄어라>를 부르는 가수 홍지윤의 노래를 듣는데 가사가 깊게 온다. “배 띄어라 아이야 벗님네야 어서가자 동서남북 바람불제 술 일고 달이 뜨니 이때가 아니 드냐 서럽다고 울지를 마라 바람이 없으며 노를 젓고 바람이 불면 돗을 올려라”
두려움을 갖지 않고 서해바다와 강에서 민중의 삶을 사는 도전과 응전의 노래다. 창작 뮤지컬 <홍도 1589>를 보면 정여립의 누이의 손녀인 홍도와 이름 없는 자치기(자치기를 잘 쳐서 붙여진 이름)의 사랑 이야기가 애잔하다.
정여립에 대하여 검색을 해도 좋고 정여립의 대동계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란 영화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세상은 바꾸는 것이 아니리 뒤집는 것이란 말이 찐하니 남는다. 민중들의 해방 경제투쟁은 민란이고 권력자의 정치투쟁은 변란인데 조선의 역사는 해석하는 지식인들이 민란을 가볍게 보고 결국 실패한 시행착오의 역사로 보는 것이 틀렸다.
씨앗을 결코 죽지 않는다.
조선시대 논어 등 책 한 권을 사려면 쌀 두 가마였다. 돈 없으면 공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충무로에 주자서를 세워 금속활자로 대중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충무로가 지금 인쇄의 펙토리가 된 것이 이유가 있있던 것이다.
류성룡이나 정여립을 존경하며 친명 친청정책을 쓴 광해왕의 동생인 인성군(인현동의 뜻은 인성군이 살았던 높은 지대)이 살았던 인현동이 인쇄골목의 중심인 것도 역사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