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어질지 않다(김형태)
옛날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큰길 가에 근로자 합숙소 ‘양지회관’이 새로 생겼습니다. 대통령 부인 ‘육 여사’가 근로자들에게 하사한 거라든가 뭐 그랬죠. 회관이 문을 열던 날 나는 정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맨 앞에 있었습니다. 건물 2층에 조그만 도서실도 같이 문을 여는 거였거든요. 긴 기다림 끝에 첫 번째로 도서실에 들어서는 순간 확 풍겨 오는 책 냄새며 쭉 늘어선 서가에 가득 꽂혀있는 반짝이는 표지의 새 책들. 마구 가슴이 뛰고 너무 기분이 좋았더랬지요. 사는 동안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그때입니다. 이 세상을 다 알고 싶은 호기심? 욕심?
이제 세월이 흘러 삶의 쓴맛을 이리저리 겪어 보니 이 세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착한 사람이 꼭 복 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 잘못도 없는 백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길을 걷다가 영문도 모른 채 눌려 죽기도 하고, 엊그제 백두산에 올라 두 손 맞잡고 만세 부르던 남과 북이 서로 핵무기 공격을 장담하는 일까지 벌이니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께 따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 세상을 이렇게 돌아가게 내버려 두시는 거냐고요. 왜 우리는 이리도 어리석고 욕심과 미움에 가득 차서 서로 괴롭히는 것이며 왜 제일 힘 센 나라가 여기저기서 자꾸만 전쟁을 벌이고 남의 나라들을 이래라저래라 괴롭히는 걸까요. 하긴 우리도 탱크며 대포, 전투기를 많이 팔아 돈 많이 벌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남 탓할 것도 없지요.
“하느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오래전 개신교 선배한테 배운 노래의 성경 구절이 참으로 무색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고 계시기는 한 건가?
노자(老子)는 이런 나에게 넌지시 이렇게 타이릅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하여 이만물(以萬物) 위추구(爲芻狗)니라.”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 강아지로 여긴다는 겁니다. 풀 강아지는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가 끝나면 버린답니다. 하늘은 어질지 않아 이 세상 만물을 제사에 쓰고 버리는 풀 강아지로 여긴다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위나라 왕필은 이렇게 새겼습니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니 인위나 조작이 없으며 만물이 스스로 서로 다스리므로 천지는 어질지 않다. 어질다는 것은 반드시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교화하는 것이므로 은혜와 작위가 있게 되고 사물이 그 참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명나라 스님 감산은 “하늘은 생명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어질지 않다고 말한 것은 하늘이 비록 만물을 생육하지만 분별로 그런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여기서 분별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함은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남을 도우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뜻이요 금강경 식으로 하면 ‘무주상 보시 (無住相 布施)’라, 내가 남을 돕는다는 생각 없이 베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두고 굳이 어질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거지요.
하늘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 강아지로 여긴다는 구절을 나는 이리 새겨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하고 지켜주는 부족 신으로 받들었지요. 그래서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집트 사람들 손에서 구해주려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간에 이집트의 맏이들을 죄다 죽이기도 하고, 여호수와가 기도하자 해는 온종일 하늘 가운데에 멈추어서고 그동안 아모리 사람들을 모조리 쳐 죽였다는 거지요. 오랜 세월 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고루 비를 내려 주신다고 가르치심으로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뜻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거죠.
그래도 아직 모자랍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현 속에 ‘나’ 중심 생각이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사심(私心), 이기심에서 못 벗어난 것이죠. “나, 나, 나.”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하느님을 받들어 모신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으니 예수님을 믿겠다는 건 하느님과 거래하자는 불손 아니겠나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기보다는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옵니다’라 고백하는 게 도리겠지요. 하늘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 강아지로 여긴다는 노자의 말씀은 전체이신 하늘이 개체에 불과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양 여기는 나 중심의 생각을 깨우치려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나는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참 열심히 “나” 이야기를 하신단 생각이 문득 듭니다. “뉘 있어 나를 당신 안에 쉬게 해 주리까? 그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안에 오시게 해주리까? 내 마음 흠뻑 취하게 만드시면 내 죄악 모두 잊고, 오직 하나인 나의 행복 당신을 얼싸안으오리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내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날 같은 것이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면 진노하시며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으르시니까?.. 내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라고(고백록 제5장).” 이 몇 줄 안되는 문장 안에 성인은 “나”라는 표현을 아홉 번이나 쓰더이다. 바다에서 잠시 위로 솟구쳐 일렁이다 사라지는 물결이 무얼 그리도 바다를 향해 “나”라고 애닯게 외치시는지.
14세기 독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최선의 기도를 바랄진댄 우리는 ‘덕을 주시옵소서, 도를 주시옵소서. 당신 자신이나 영생을 주시옵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다만 우리는‘주여, 당신이 뜻하시는 것과 당신이 행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마옵소서.’라고 할 일이다.”
아,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어질지 않으신’ 하느님께 바친 기도에서 몇 가지 구하신 게 있네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 달라고,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고, 죄를 용서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그런데 이 모든 걸 ‘나’에게 주십사 한 게 아니고 ‘우리’에게 주소서 하셨지요. 나가 아닌 우리. 개체인 내가 아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 그래서 당신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나’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질지 않습니다. 어질지 않은 이 세상에 예수님 따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면 ‘나’라는 이기심을 버리라 하십니다. 그렇게 ‘나’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나면 개체인 나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터이니, 하물며 전체이신 하느님께서 어질다느니 어질지 않다느니 하는 분별의 말도 더이상 필요가 없겠지요?
글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간하는 격월간 <공동선>고 함께합니다.
첫댓글 무주상 보시 ;
相을 만들지 말고
돕는다는 생각도 기억도 하지마라,
///ᆞ
밥을 7번 사면 흔적없고 ^^
밥을 9번 사면 비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