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관산성전투의 시작과 음력 7월과의 관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공격 경로를 차용걸 교수는 왕도 부여를 출발하여 옥천지역인 관산성에 당도하였다. 승세를 굳힌 후 여세를 몰아 보은·영동·상주·안동 등을 거쳐 경주까지 쳐들어 갈 계획이었다고 하였고, 주90) 양기석 교수도 백제의 신라 공격로는 지금의 부여(사비도성)→ 황산벌→ 진산→ 마전→ 옥천(관산성)→ 보은(삼년산성)→ 상주→ 경주(금성)로 이어지는 루트로 보고 있습니다. 주91)
일본서기에는 ”12월 9일에 사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의 領인 물부(物部) 막기무연(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竹斯) 물부(物部) 막기위사기(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주92) 라고 하였다.
몇 만의 군사가 동원된 전쟁에서 약 1,000명 정도의 왜군이 일본에서 온지 한 달만에 비록 백제 5방 중의 하나인 東方에 배속되어 동방령(東方領) 물부(物部) 막기무연(莫奇武連)에 지휘를 받았다 .주93) 고는 하나 외국군이 첫 공격의 선봉이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의 시점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및 신라본기에는 554년 7월이 시점인데, 일본서기에는 554년 12월 9일 시점입니다. 양기석교수는 일본서기 유지신이 왜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도착한 시점이 6월로 이유없이 왜군을 12월까지 장기 주둔시킬 이유가 없는 점을 감안 시 전쟁시점을 554년 7월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94)
전쟁 시점이 음력 7월입니다. 백제는 가장 유리한 시점에서 전쟁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음력 7월 15일이 백중으로 백중은 머슴들의 휴일로 세벌김매기가 끝난 후 여름철 휴한기에 휴식을 취하는 날, 즉 들에는 곡식 익기 시작하는 시기로 이 시기에 육로를 통한 전쟁의 시도는 농민들의 반발이 심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반면에 장마가 끝나는 시기로 강에는 물이 많이 흐르는 시기로 백제는 많은 물이 흐르는 시기에 금강을 이용하여 공격을 했을 것입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물관장 오석민 교수의 ’금강뱃길과 포구의 사회사‘ 논문을 보면 ’일본 외무성 통상국에서 발간한 1894년의 보고서를 보면, 1890년대까지는 부강포구 상류에도 100석 이하의 선박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885년 1월부터 약 4년에 걸쳐 철도부설을 위하여 사전에 지형을 탐사하였던 일본인 기사(技師) 송전행장(松田行藏)의 탐사기록에 따르면, 1880년대 이전에는 물이 많을 때에는 금강 본류를 따라 대청댐보다 상류에 위치한 옥천과 영동까지도 50석을 실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으며, 합강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직선거리 약 25㎞ 지점에 위치한 오근장(충북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까지 선박이 왕래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주95) 라고 언급을 하였습니다.
쌀 1석이 144kg으로 50석의 배는 7,200kg을 실을 수 있는 배입니다, 일본서기 관산성 전투 시 지원 된 왜군은 1,000명, 말 100필, 40척의 배인데, 왜군의 평균 무게를 아주 여유있게 72kg 1,000명, 말 무게도 아주 여유있게 평균 500kg로 100필을 40척에 배에 실으면 1척당 3,050kg가 됩니다. 주96) 50석의 배가 옥천과 영동까지 갈 수 있다고 하니, 바다 배와 강 배는 배의 선형이나 구조가 다르겠지만 강의 폭만 된다면 일본에서 온 왜군의 배가 옥천까지 갈 수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 시점인 음력 7월은 백제가 금강을 이용 관산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강을 이용 관산성 공격 시, 백제군은 관산성 보다 옥천에서 상주를 갈 때 경유하는 화인진에 먼저 닿게 됩니다. 화인진은 지금은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으로 옥천 향수30리길 시작점인 장계리에서 금강 건너편 인포리 지역입니다.
화인진은 관산성(옥천)에서 삼년산성(보은)거쳐 상주를 가거나 굴산성을 거쳐 상주를 갈 때 거쳐야 할 길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역과 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주97) 따라서 백제가 화인진를 점령한다면 관산성(옥천)은 삼년산성(보은)과 굴산성(청성,청산면)으로의 교통이 끊어져 고립상태가 됩니다. 지도06 참조
지도 06 화인진 중심 1919년 오만분에1 지도 옥천근교 산성
따라서 관산성 전투의 배경이 백제가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 관산성이 목표가 아닌 신라 경주가 목표이면 굳이 주력부대를 관산성으로 투입시킬 필요 없이 화인진에 상륙하여 바로 삼년산성과 굴산성으로 공격하고 속전속결로 상주로 진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립 된 관산성은 예비병력 수준의 병력으로 잔당 처리 수준으로 처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또 백제가 금강으로 공격 시 수백척의 배가 좁은 강물을 타고 올라갔을 것인데, 더 멀리 가는 배를 먼저 보내야 배끼리 충돌하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으므로 관산성을 공격하는 백제 5방 중의 하나인 東方에 배속된 왜군이 백제의 주공보다 먼저 배를 타고 금강 따라 올라가 화인진(노란점)을 지나 수북리 금강변(노란점)에 상륙하여 관산성을 공격하고 하루 만에 점령을 하였습니다.
백제가 관산성 공격 시 금강을 이용했고, 금강을 기준 시 부여에서 관산성이 화인진보다 더 멀리 있으므로 백제의 주력군 보다 먼저 배를 타고 출발을 한 것으로 일본서기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기노(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餘昌)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 羅)에 보루를 쌓았다. ‘ 주98) 로, 여창이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 羅)에 성채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창이 들어 간 신라에 왜군이 같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함산성(관산성) 공격 시 기술 내용이 구체적인 반면에 구타모라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여창이 중심이 된 백제 주력군사가 신라과의 싸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東方에 배속되어 동방령(東方領) 물부(物部) 막기무연(莫奇武連)에 지휘를 받은 병력으로 처음부터 고립된 관산성을 점령하고, 상대적으로 후방에 주둔하면서 발생된 일을 왜군을 중심으로 한 기록으로 관산성 전투의 일부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7월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 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사 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주99)
백제 여창이 신라에 들어가 싸운 대상은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인데, 각간과 이찬은 진골들만 받을 수 있는 직책으로, 양기석교수는 각간(角干) 우덕(于德)은 상주 군주이고, 이찬(伊湌) 탐지(耽知)는 경주에서 급히 파견된 중앙군의 대장 주100) 으로, 상주의 주군과 경주에서 파견된 중앙군인 이들이 백제 여창과 싸워 방어를 했으나, 불리하여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같이 방어를 한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싸운 지역은 화인진에서 상주사이로 보여 집니다.
주90)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56쪽
주91) 양기석, 「管山城 戰鬪의 양상과 영향」, 관산성전투의 재조명 학술대회 발표 논문, 2008, 30쪽.
주92)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天皇 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以十二月九日遣攻斯羅 臣先遣東方領物部莫哥武連 領其方軍士攻函山城 有至臣所將來民竹斯物部莫奇委沙奇能射火箭 蒙天皇威靈 以月九日西時焚城拔之 故遣單使馳船奏聞
주93) 양기석, 「管山城 戰鬪의 양상과 영향」, 관산성전투의 재조명 학술대회 발표 논문, 2008, 30쪽.
주94) 양기석, 「管山城 戰鬪의 양상과 영향」, 관산성전투의 재조명 학술대회 발표 논문, 2008, 28-29쪽.
주95) 오석민, 금강뱃길과 포구의 사회사, 2010, 12쪽
주96) ‘토크멘터리 전쟁사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 전쟁’에서 전국시대 일본 사무라이 평균키가 150cm가 안되고, 말은 기소지방의 말이 유명한데 기소지방 말이 우리 조량말보다 작다고 함, 10분30초 - 13분사이
주97)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182-186쪽
주98)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天皇 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餘昌謀伐新羅 耆老諌曰 天未與 懼禍及 餘昌曰 老矣何怯也 我事大國 有何懼也 遂入新羅國築久陀牟羅塞
주99) 三國史記 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眞興王 十五年, 秋七月 百濟王 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 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 高于都刀{高干都刀} 急擊殺 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주100) 양기석, 「管山城 戰鬪의 양상과 영향」, 관산성전투의 재조명 학술대회 발표 논문, 2008,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