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여세주
essaytown@daum.net
1.
수필 작품을 읽을 때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이 없을까. 작품을 읽는 데도 수준이 있다. 개별 작품에 대한 이해는 수필비평에서 가장 우선적인 작업이다. 작품을 읽는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비평이 불가능하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비평(작가 작품론)이나 어느 한 시기나 특정 매체의 작품군이 지닌 특성을 파악하는 비평(월평이나 계간평 등)에서도 개별 작품부터 분석해야 한다. 작품들이 드러내는 공통된 특징들을 찾아내는 일은 개별 작품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 수필가들이 많이 참여하곤 하는 공모전 심사에서는 개별 작품의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심사하는 이의 작품 해석 능력은 필수적이다. 작품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어떤 수월성이 주목받았으며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를 지적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을 따라가며 요약하거나 하나 마나 한 추상적인 말들을 늘어놓는 글은 제대로 된 심사평이라 할 수 없다. 작가의 시각이나 의도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수필창작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수필창작론이나 수필론, 나아가서 문학 이론, 예술론, 철학 등의 공부도 하지만 개별 작품에 대한 합평을 빠뜨리지 않는다. 개별 작품을 합평할 때 대부분 비문법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지적은 합평이라 할 수 없다.
한 작가의 작품집을 읽고 해설하거나 작품세계 전반을 평가할 때, 제재나 주제에 따라 몇 개의 항목으로 분류해 놓고 이에 맞추어 해당 작품들의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에 머무는 비평문을 종종 본다. 제재의 분류에 머물지 않고 작가가 특정의 경험세계를 주로 다루는 이유나 의의를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비평은 단편적인 이해를 넘어 종합적인 해석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필 작품의 무엇을 어떻게 읽고 비평해야 하는가?
2.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모형의 세 측면을 ‘사물·기표·기의’라고 하였다. 이후로도 이와 유사한 3분법 모델을 언어이론의 기초로 삼았다. 이러한 기호 삼각형은 수필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소중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
여기서 기표는 언어기호이고 기의는 의미이며 지시대상은 사물을 말한다. 소쉬르는 지시대상을 언어모형에서 배제해 버리는데, 기호에 상응하는 실제 대상을 갖는가 여부는 기호의 기능방식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어는 실제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기호에 관심을 집중함에 따라 지시대상은 소쉬르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지시대상을 갖지 않은 소쉬르의 기호들은 구체적인 언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언어학에서의 논의가 어떻든, 기호 삼각형은 수필의 기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으로 매우 적합하다. 수필에 원용하여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수필에서는 시나 희곡이나 소설과 달리 작가의 경험 세계가 중요한 요소다. 시나 희곡과 소설에서는 작가의 경험이 작품 창작의 밑거름, 즉 근원적인 토대가 될 뿐인데, 수필에서는 작가의 경험 세계가 여타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굴절 또는 전환되지 않고 작품 속에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에서 작가의 경험 세계는 작품 외적 요소이면서 작품 내적 요소다. 구성과 서술 형태(진술 방식, 시제, 시점 등)와 문체 등은 모두 ‘언어형식’에 포괄된다. 의미는 경험세계에 관한 해석의 결과이거나 언어형식을 통해 표상되는 그 무엇이다.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주제·구성·문체를 3요소라고 규정하는 여타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의미·언어형식·경험세계가 수필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라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가’(경험 세계), ‘어떻게 말하는가’(언어형식), ‘무엇을 말하는가’(의미)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해가 더 수월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필은 ‘경험세계를 특정한 언어형식으로 형상화하여 어떤 의미를 표상하는 글’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필비평에서 작품의 소재가 된 경험세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수필이 다루는 영역이 확장되지 못하고 신변의 문제에 갇혀 있기에 이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소재를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는 텍스트에서 작가를 역추적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인의 일상을 다루는가/사회적 문제를 다루는가, 사람을 다루는가/사물을 다루는가, 동물을 다루는가/식물을 다루는가, 나무를 다루는가/꽃을 다루는가 등등의 문제는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로 무엇에 대하여 어떤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 경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등의 문제는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의식작용(사고력, 상상력, 구상력, 지식이나 지성 등)에 의해 삶의 체험은 재가공되어 의미를 갖는데, 이때의 삶의 경험은 ‘의미화된 경험세계’인 것이다. 작품을 해석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작가가 삶의 체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1차 관찰)를 다시 바라보는 행위(2차 관찰)이다.
3.
수필의 3요소 가운데 어느 부분에 초점을 두고 읽을 것인가? 이론적 입장에 따라 세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특별히 강조해서 읽을 수 있다. 해석학은 ‘의미(기의)’를 중심으로 다루고,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언어형식(기표)’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어느 쪽이든 반대편을 완전히 간과하지는 않는다. 해석학은 언제나 언어형식에 대한 분석으로 다시 돌아오고, 구조주의는 언어형식이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는가를 추론한다. 그러나 해석학과 구조주의는 지시대상 즉, 경험 세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폴 드 만에 따르면 기호가 지시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호에 대한 경계 설정과 기호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그는 기호가 지시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기호의 의미를 해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미셀 푸코의 담론분석 등은 지시대상에 관심을 둔다. 이들은 텍스트의 해석학적 의미를 분석하는 데 국한되지 않고, 언표된 것을 넘어서며, 텍스트 바깥(지시대상)의 기능을 새롭게 설정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쪽에서도 언어형식의 분석이나 의미 해석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4.
수필 작품을 비평할 때도 세 측면을 모두 살펴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세 측면 모두가 특별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럴 경우, 특별함을 지닌 어느 한 측면만의 해석에 집중해도 무방하다.
간략한 예시로 김수봉의 <그날의 기적소리>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언어형식에서 특별함을 보여준다. 쌀자루를 둘러맨 중년의 아버지와 새끼줄로 동여맨 김치 항아리에 책가방까지 든 중학생 아들의 숨 가쁜 달음박질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달려가 간신히 기차에 오르는 전반부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러한 전반부는 3인칭 전지적 시점에 의해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 경험의 서사적 형상화에 초점을 둔다. 그럼으로써 경험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노린다. 이와는 달리, 후반부에서는 1인칭 작가 시점으로 옮겨 그런 일이 벌어진 자초지종을 말하기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주관적인 견해가 가미된 후반부가 곁들여짐으로써 이 작품이 비로소 수필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보여주기와 말하기, 장면 제시와 설명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서술 방식은 상당히 특별하다. 남성적 문체가 다소 거친 느낌을 주지만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상황의 긴박감 표현이 경험 진술의 사사적 효과를 북돋운다. 쌀자루와 작가를 기차에 던지다시피 태워주고 힘겨워 철길에 주저앉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심리 표현도 돋보인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것을 통한 자기 성찰이라는 주제보다 긴장감 넘치는 서술이나 심리 표현, 그리고 창의적 구성 방식이 이 작품을 감동적인 수필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작품을 비평할 때 분석하고 해석하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도구적 언어는 수필창작이론과 수필이론, 문학이론, 예술이론, 나아가서는 철학 개념에서 얻어진다. 이는 작품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이면서 통찰력으로 작용한다.
수필비평이 더 나은 수필창작에 피드백이 되어야 한다고 볼 때, 수필비평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창작 방법 내지 원리를 찾아내는 데 골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