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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는 ‘몸살림 교실’ 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있다. 모두가 아는 언어로 말 하자면 밥 먹는 곳, 즉 급식실 또는 식당과 같다. 보통 학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네모난 본관에 앞에는 넓은 운동장이 있어야 하고, 수업을 듣는 교실이라면 칠판 앞에는 선생님이 있고 학생들은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있는 교과서를 봐야 한다. 공부라고 하면 국 영 수 이런 것을 생각하며, 또 학생이라고 말 하면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을 말 한다. 학교를 다녀야 학생인가? 대학교 까지 졸업 하면 그때부터는 학생이 아닌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배운다. 사람은 배우기 때문에 사람이고,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학교를 다녀서 학생이 아니다. 배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학생이고, 그 곳이 어디든 학교가 되고 수업을 듣는 교실이 된다. 그렇기에 밥 먹는 것 마저 수업의 연장선이다. 맛있는 밥을 만들어주는 여공을 통해 배울 수 있고, 밥을 먹다가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는 이곳을 ‘몸살림 교실’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몸 살림 교실에는 큰 스승인 ‘여공’이 계신다. 그리고 여공과 함께 살림준비를 하는 친구들을 ‘살림팀’ 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번에도 살림팀을 하기로 선택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여공과 6년을 같이 살고, 살림팀도 몇번이나 했지만 아직도 여공이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살림팀은 나와 현이라는 친구가 하기로 했다. 그래도 내가 살림팀을 경험해 봤으니 처음하는 친구를 잘 알려줘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말 한마디로 멘붕 이었다. 살림팀을 처음 하는 현이는 당연히 어리숙하고 허둥지둥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도 같이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거나, 이미 한번 해봤던 것을 까먹어서 실수를 하는 일이 태반이었다.또 여공이 시키시는 것만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할 일을 찾아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나이가 몇개인데 시계보는 법도 까먹어서 혼이 났고, 제대로 보지 않아서 제대로 듣지 않아서 혼이 났다. 주어진 역할도 잘 하지 못하니 내가 할 일을 여공께서 대신 하고 있었다. 내가 이 만큼 밖에 못하나 싶어 정말 속상했다. 내가 하는 것 마다 실수이고 엉터리 였다. 내가 봐도 내 자신이 너무나 답답했다. 그런데 그 답답함과 미움의 감정이 현이에게 갔다. “왜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냐” “이 식기도구 하루 이틀 보냐 왜 여기다 놔” 등 꼰대가 되어 잔소리를 했다. 물론 가끔은 정말 현이에게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도 살림팀을 몇번이나 했는데도 이렇게 혼이 나는데, 처음 할 땐 이게 당연한거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건 나였다. 나 스스로의 대한 짜증남, 답답함을, 노력하고 있는 현이 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그 선택들은 나의 힘을 뺏는 선택이다. 나는 알면서도 선택을 했고 알기에 내가 더 미웠다. 나는 점점 나의 대한 믿음이 무너져갔고, 내 선택의 대한 의심과 망설임은 더욱 심해졌다. ‘괜히 살림팀을 한다고 했나,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같은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하루가 지날 수록 점점 주눅 들고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어느때 처럼 11시가 되면 점심 준비를 하러 살림 교실에 들어 갔다. 살림 교실에 들어가면 여공께서 먼저 준비 하신 음식을 빠르게 둘러 본다. 미리 만들어 놓으신 어묵국과 콩나물 무침이 보였다. 나는 혹시 다른 반찬도 있을까 해서 여공께 물어봤다. “여공 어묵국이랑 콩나물 무침 말고 또 다른 것도 먹나요?” 여공은 얼굴을 굳히시고는 말씀하셨다. “여기 어묵국이 어딨어?” 나는 당황했다. “분명 여기 어묵국이..” 라고 말을 하며 국에 뚜껑을 열어봤다. 어이 없게도 소고기무국 이었다. 냄비 뚜껑이 노란 유리 여서 소고기 무국의 무와 국에 색이 어묵국 처럼 노랗게 보였던 거다. 여공은 내가 소고기 무국인 것을 확인하자 “눈 안뜨고 다닐래?” 라고 말하셨다. 너무 창피했다. 내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또 아는 척을 했구나 싶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여공은 오징어더덕 무침을 양푼에 버무리고 계셨고, 나는 옆에서 접시를 꺼내고 있었다. 여공은 내가 꺼내 놓은 접시에 방금 버무린 반찬을 옮겨 담았고, 남은 건 내일 현곡이 송이를 따러 산에 들어가시니 산에서 드실 도시락에 담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에게 윗 선반에서 작은 반찬 용기를 꺼내라고 하셨다. 나는 선반을 열고 “이거요? 이거요? 아 이거? 아아아 이거?” 를 반복했고 뒤에서 여공은 그 반찬 용기를 손으로 가르키시며 “아니 저거 말고 옆에! 그 옆에! 바로 앞에 있잖아!” 나는 겨우 찾아서 드렸다. 여공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내가 가리키고 있었는데 왜 나를 한번 안 보니”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고집스럽게도 한번도 뒤 돌아 보지 않았다 는게 느껴졌다. 또 제대로 보지 않고 내 멋대로 본 것 이다.
또 어느날, 저녁 준비가 다 되어 밥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다. 살림 교실에는 큰 밥통과 작은 밥통이 있다. 점심에 큰 밥통에 밥을 짓고, 친구들이 다 먹으면 작은 밥통에 옮겨 담고 보온을 한다. 그리고 다시 저녁에 큰 밥통에 밥을 짓고, 작은 밥통에 있는 밥을 먼저 먹게 한 다음 다 먹으면 큰 밥통에 새밥을 먹는다. 보통 이런 식이다. 여공께서는 오늘도 작은 밥통 먼저 열어놓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깜빡하고 큰 밥통을 열어두고 작은 밥통은 닫아논 것이다. 여공은 “내가 말하면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 왜 들은 대로 하지 않아?” 라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위에 말한 세 사건 모두 제대로 듣지 않았고,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냄비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않는 이상,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게 아니라 뒤를 돌아 여공을 보지 않는 이상, 전부 아는게 아니라 아는 척 일 뿐이다. 노란 유리 뚜껑이라는 색안경이며, 내 멋대로의 고집이고, 틀에 박힌 판단이다. 그리고 오만이며 게으름이다. 여공께 내가 시계를 보는 법을 까먹었다고 하니 여공은 그렇게 말씀 하셨었다. “까먹는거? 그럴 수 있지, 시간을 핸드폰으로 보는 세상 이니까. 하지만 모르면 배워야지. 까먹었다고 모른다고 안배우는 건 그냥 게으름일 뿐이고 그게 쪽팔린거야.”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한 것은 오만이며, 모르는 것을 그냥 방치 한 것은 게으름이다.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왜 이번에 현이와 같이 살림팀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모른다고 멈춰있었다. 현이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말 이였다. 사람들이 살림팀에 들어올때 여공께서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일단 봐. 보는게 반이야, 잘 보는게 중요해” 이 말씀은 현이에게 하셨지만, 여공을 통해서 스승님이 나에게도 하시는 말씀이었다. 전에 살림팀을 하던 너와 지금의 내가 같은가? 그때의 나는 없다. 그러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가? 다르다. 이렇게 혼나면서도 분명한건 내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는 것 이다. 나의 속도로 말이다. 스승님의 말 처럼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했을 때 처럼 더 자세히 제대로 바라보며, 더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처음 하는 것이니 오만 할 것도, 게으를 수 도 없다.
'몸 살팀 교실’ 이라는 이름은 참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사람의 형상을 이루는 전체를 ‘몸’ 이라고 한다면, 그 중에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손도 있고 머리도 있고 많은 기능들이 있다. 살림팀을 하면 몸속에 많은 기능들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눈을 가지고 있는데 보지 않으면 눈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 이며, 귀를 가지고 있는데 듣지 않으면 귀가 죽은 거나 다름 없다. 하지만 몸 살림 교실에서는 내 몸에 집중 할 수 밖에 없다. 눈으로는 보이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보이지 않은 것을 보게 하고, 귀로는 정확한 소통을 하기 위해 귀 기울이게 되며, 팔과 다리, 몸을 계속 움직여 의식을 고요하게 한다. 그렇게 지금을 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한 번에 바로 되면 연습은 왜 하고, 왜 교실인가? 한 번에 되지 않아서 그렇다. 오래된 기억으로 묵혀있는 몸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몸으로 살아가는 수업이다. 나는 가끔씩 내 몸들이 ‘지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죽어있던 내 몸을 살리는 수업이다.
두번째 해석은 나를 학생으로서 살게끔 한다. 사람은 배우기 때문에 사람이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을 일컬어 학생이라고 한다. 짐승도 사람도 몸이 있다. 하지만 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을 사용하는 법이다. 짐승은 습관과 버릇으로 몸을 사용한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싸우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기분 좋으면 좋다고 실실댄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오래된 습관과 버릇을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도 있다. 그런데 사람도 습관과 버릇으로 내 몸을 쓸 때가 더 많다. 나도 그렇다. 현이가 살림팀 한지 얼마 안된 날이다. 처음 살림팀을 하며 여공께 하도 혼나다 보니 현곡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것 같다. 상담이 끝난 후 현곡은 살림교실에 와서 여공께 “현이는 혼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고 했어” 라고 말하셨다. 얘기를 들은 여공은 현이와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살림준비를 하며 둘의 대화를 같이 듣고있었다. 여공과 현이에 대화 중에 제일 와 닿았던게 있다. “혼내는게 아니야. 가르침이야.” 이 말이 내 속 깊이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 느낌이었다. 여기는 몸살림’교실’ 이며, 여공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배우는 ‘학생'이라고 말은 하면서. 왜 스승의 말을 나를 혼내고, 꾸짖고, 잔소리 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스승은 가르치기에 스승이 아니다. 스승은 배우려는 학생의 마음에만 존재 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스승이 될 수 있는 것 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여공의 말과 말투를 보고 ‘혼을 내신다’ 라고만 생각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공이 나를 알려주려고 하는 그것 마저도 ‘나를 혼내시는 구나’ 라고 받아드렸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더라. 스승은 나를 깨우치게 하고 배우게 하는 존재인데, 왜 여공을 마냥 ‘혼을 내는 무섭고 어려운 존재’ 라고만 생각을 했을까, 내 ‘생각’과 ‘판단’일 뿐 이였는데. 그리고 그 판단으로 인해 여공이 말씀 하실 때 마다 습관 처럼 기가 죽고, 움추러들고, 상처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말씀을 듣고 나니 그때 부터는 ‘혼났구나’ 하는 생각이 사라졌다. 학생의 마음이라면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가르침이다. 이현주 선생님 께서는 그러셨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라고. 혼났다고 받아드리면 나는 여공은 나를 혼내는 존재가 되고, 나는 혼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학생의 마음으로 받아드리면 여공은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나는 배우는 학생이 된다. 여공이 어떤 사람이든 그건 나와 상관 없는 것이다. 중요한건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그것이었다. 위에 업급했던 ‘혼냈다’ 라는 모든 표현을 ‘가르침’이라고 다시 정정한다. 나는 여공을 통해서 나의 습관과 버릇으로 부터 내 몸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고, 다시 선택하는 학생의 몸으로 말이다.
세번째 해석은 이현주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올해 5월 이현주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였다. 정말 감사하게도 성인식반 친구들과 함께 이현주 선생님과의 아침 다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여공이 싸주신 떡과 과일, 차를 마시며 선생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지혜가 사과를 한 입 먹었는데, 그 순간 이현주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너가 먹은 게 뭐냐?”
“사과요”
“그건 나도 알아, 그래 사과지. 근데 그거 말고.”
우리는 모두 벙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머리로는 답이 안나와 다 같이 “모르겠습니다” 말했다.
선생님은 다시 물으셨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
“농부가요”
“그래 농부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사랑으로..?”
“그래, 사랑! 그럼 우리가 뭘 먹었어?”
“사랑이요”
너무 충격이었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거 였다. 너무나 충격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그 말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생명이라는 위대한 힘을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몸 살림 교실도 그렇지 않은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내 몸의 영양분이 채워지지 않아 죽는다. 결국 먹지 않으면 죽기에, 밥을 먹는 것은 나를 그리고 내 몸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럼 우리가 먹는 여공의 밥은? 여공이 만드는 밥 한 끼에도 많은 사랑이 담겨있는 것 이다. 여공의 손이 닿기 전까지는 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땀이 담겨져 있다. 그럼 여공은 어떠한가, 학기 중에는 친구들의 모든 살림과, 매끼 마다 몇십명의 밥을 책임지며, 방학동안에도 쉬지 않고 캠프에 온 어린이들의 밥을 책임지셨다. 15년 동안 말이다. 여공 옆에서 살림팀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한 순간이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들, 그리고 하늘이 주신 사랑이 흘러 흘러 결국 내 입까지 와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현주 선생님께서 이번에 하셨던 말씀 중에 가장 기억 남는 말은 단연코 이것이다.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이 쓰는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 아니야. 나를 여기 이렇게 있게 한 그 무엇, 나의 주인. 이 몸이 내게 아니란 말이야. 내 몸의 주인이 있잖아, 그걸 하느님 이라고 해. 예를 들어, 이 마이크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은 누굴까? 이 마이크를 만든 사람이겠지? 그 사람이 이 물건이 왜 있는 줄 안단 말이야. 그렇다면 나의 몸도 그분이 쓰시게 하자, 그게 나로 제일 잘 사는 방법 이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표다’ 라고 말 했어.” 하느님, 신, 사랑, 다 같은 말 이기에 우리가 먹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몸 살림 교실에서 하는 수업은 여공과 함께, 그리고 여공을 통해서 사랑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다. 이제야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라는 물음이 풀린다. 몸 살림 교실에서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이번 방학에 나를 비롯해 여럿친구들이 학교에 남아있었다. 방학 때 여공과 효연이가 학교에 남은 친구들의 밥을 챙길 때, 나는 솔직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귀찮다는 습관의 선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양심에 찔리고 내 몸에 힘이 쭉쭉 빠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에서 하는 마을 행사 때문에 여공 께서 주말에도 살림준비를 하신다고 들었다. 따로 도와 달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같이 하고 싶었다. 그냥 그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마음이 불편하고 몸에 힘이 쭉쭉 빠지는 경험을 했으니 나를 위해서 내 몸을 위해서 마음이 편한 선택을 하고 싶었기에, 나는 마음을 내서 여공께 주말에 살림일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렇게 아침 일찍 부터 한 마을 행사를 끝내고 보니, 내 몸과 마음이 활기차고 편안함으로 꽉 차 있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현주 선생님의 말씀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몸을 축 처지게하고 힘이 빠지는 것은 내 마음을 내가 욕심내서, 습관으로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몸을 살아있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기꺼이 마음을 내는 것’ 그건 내 마음을, 내 몸을 나의 주인이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주인이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게 나를 행복하게 했고, 살아있게 했으며, 사랑을 하게 해주었다. 결국 ‘나’로 제일 잘 사는 법을 배웠다. 사랑과 창조가 넘치는 이 곳이야 말로, 내 몸의 주인이 나를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는 곳이 였다. 그렇게 이곳, 몸살림 교실은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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