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끝은 내년의 시작, 밤에 이미 낮은 시작돼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생각하는 끝맺음의 의미란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끝맺음에 관한 것이다. 마무리를 잘할 것과 뒤를 잘 정리할 것을 배웠다.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면 끝을 기다리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오신 나의 아버지는 그 끝의 맺음을 느슨하게 하지 않으셨다. 과일이나 푸성귀의 끝물도 빠짐없이 거두셨고,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일로써 추수는 끝이 났다. 끝일을 정성스레 한다고 해서 비록 큰 이익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것을 버려두지는 않으셨다.
매일의 일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쇠죽을 끓이고, 군불을 땔 때에는 아궁이 앞을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쓸고 정리하셨다. 겨울밤 추위에 외양간의 소가 떨지 않을까 염려해서 소의 등에 덕석을 덮어주시는 일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겨우내 눈이 쌓이고 쌓여도 잔설을 틈이 나는 대로 치우셨다. 어머니께서는 주무시기 전에 식구들의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돈하셨다. 하루를 보내거나, 계절을 보내거나, 농번기와 농한기를 보내거나, 한 해를 보낼 때에 당신들이 하실 수 있는 일만큼은 힘껏 하셨다. 그 결과가 넘치거나 모자라거나를 상관하지 않고서. 그냥 그 일을 할 뿐이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태어남과 죽음을 노래한 시 ‘탄생’을 썼다. 한 생애의 시작과 끝 사이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을 “보고, 눈을 갖고,/ 먹고, 울고, 넘쳐흐르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괴롭고 괴로운 것으로,/ 그 전이(轉移), 그 전격적인 현존의/ 진동”이라고 표현했다. 네루다의 시구처럼 일의 경과에는 파동이 있다. 때로는 우연의 계기가 개입해 극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큰 파도일 때도 있다. 물론 평온하고 기쁜 시간도 있다. 시간의 강은 여러 굽이를 만들면서 흘러간다. 여럿의 굽이를 만나 전환하면서.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역동적인 전환을 보여주면서.
다만 나는 이 12월에 나를 돌아보고, 나를 도와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할까 한다. 나를 돌아보는 일은 나의 허물을 보는 일이다. 허물을 보아서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비유의 문장 가운데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법구경’에 있다. 자신이 어떤 부정하고 그릇된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나 구름 속에서 나온 달처럼 세상을 다시 능히 비출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를 바로 볼 때 본래면목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도와준 사람들의 마음도 잊지 않으려 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시 ‘끝과 시작’을 썼다. 그는 하나의 시간과 역사가 끝나고 다른 하나의 시간과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전쟁이 끝난 후 벌어지는 일들에 빗대어 표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피 묻은 넝마가 널린 길을 청소하고, 잔해들을 치우고, 다시 대들보를 옮기고, 유리를 끼우고, 문을 달고, 다리를 놓고, 역을 세우는 일들에 비유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조금 밖에 모르는 혹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고 말했다. 동시에 쉼보르스카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풀밭 위”라고 썼다. 세상의 일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이다. 시간의 변화를 바라보는 좋은 안목이 아닐까 한다.
들에는 가을걷이가 끝났고, 밭에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적막한 풍경을 바라보면 박목월 시인이 쓴 시 ‘내년의 뿌리’도 생각난다. 마지막 연을 이렇게 썼다. “마른 대궁이는/ 금년의 화초(花草)./ 땅 속에는 내년의 뿌리.” 올해의 끝은 내년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밤의 시간에 낮은 이미 시작된다. 그러므로 끝은 곧 시작이다.
문태준 시인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해질 무렵
붉은 석양에 걸려 있는
그리움입니다
빛과 모양 그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름입니다.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그대여
그대의 생명 속에는
나의 꿈이 살아 있습니다
그대를 향한
변치 않는 꿈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사랑에 물든
내 영혼의 빛은
그대의 발 밑을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입니다
오, 내 황혼의 노래를 거두는 사람이여
내 외로운 꿈속 깊이 사무쳐 있는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석양이 지는 저녁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나는 소리 높여 노래하며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내 영혼은
그대의 슬픈 눈가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대의 슬픈 눈빛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슾른 시를 쓸 수 있네.
예를 들면 밤하늘을 가득 채운
파랗고 멀리서 반짝이는 별들에 대하여
하늘을 휘감고 노래하는 밤바람에 대해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 때 있었네.
이런 밤에, 나는 그녀를 내 팔에 안았네.
무한한 밤하늘 아래 그녀에게 무수히 키스했었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사랑한 때 있었네.
그녀의 크고 조용한 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더이상 그녀가 곁에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내가 그녀를 잃은 것을 느끼며
거대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거대한
그리고 시는 풀잎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영혼으로 떨어지네.
내 사랑을 지키지 못했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찼어도
그녀는 나와 함께 있지 못한데.
그게 다야.
멀리 누군가 노래하는
멀리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없어.
그녀를 내 곁에 데리고 올 것처럼
내 눈은 그녀를 찾아 헤매지.
내 심장도 그녀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는 내 곁에 없지.
똑같은 나무를 더욱 희게 만드는 그날 같은 밤
우리
예전의 우리
우리는 더이상 같지 않지.
나 역시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예전에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바람 속을 헤매다가
그녀의 귀를 매만질 수 있겠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사랑이겠지.
예전에 그녀가 나의 사랑이였던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가벼운 육체
그녀의 무한한 눈동자
나는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해.
사랑은 짧게 지속되고
망각은 먼 것이니.
이런 밤에 내가 그녀를 내 팔에 안았던 것처럼.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더 이상 없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내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녀를 위해 쓰는 마지막 시일지라도...
충만한 힘
나는 쓴다 밝은 햇빛 속에서, 사람들 넘치는 거리에서,
만조 때,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곳에서;
제멋대로인 밤만이 나를 억누르지만,
허나 그것의 방해로 나는 공간을 되찾고,
오래가는 그늘들을 모은다
밤의 검은 작물은 자란다
내 눈이 평야를 측량하는 동안.
그리하여, 태양으로만, 나는 열쇠들을 버린다.
불충분한 빛 속에서는 자물쇠를 찾으며
바다로 가는 부서진 문들을 열어놓는다
찬장을 거품으로 채울 때까지,
나는 가고 돌아오는 데 지치는 법이 없고,
돌 모양의 죽음은 나를 막지 못하며,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싫증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내 모든 광물성의 의무를 어디에서 물려받았을까
아버지나 어머니일까 아니면 산들일까,
생명줄들이 불타는 바다로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계속 가니까 나는 가고 또 간다는 것
또 내가 노래를 하고 또 하니까 나는 노래한다는 걸.
두 개의 수로 사이에서 그러듯
내가 눈을 감고 비틀거릴 때
일어난 일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쪽은 죽음으로 향하는 그 지맥속에서 나를 들어올리고
다른 쪽은 내가 노래하게 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존재로부터 만들어지고,
바다가 짜고 흰 물마루의 파도로
암초를 연타하고
썰물 때 돌들을 다시 끌고 가듯이
나를 둘러싼 죽음으로 된 것이
내 속에서 삶을 향한 창을 열며,
그리고, 존재의 경련 속에서, 나는 잠든다.
낮의 환한 빛 속에서, 나는 그늘 속을 걷는다.
건축가
나는 나 자신의 환상을 선택했고,
얼어붙은 소금에서 그것과 닮은 걸 만들었다
나는 큰비에다 내 시간의 기초를 만들었고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 오랜 숙련이
꿈들을 분할한 게 사실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채
벽들, 분리된 장소들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나서 나는 바닷가로 갔다.
나는 조선의 처음을 보았고,
신성한 물고기처럼 매끄러운 그걸 만져보았다-
그건 천상의 하프처럼 떨었고,
목공작업은 깨끗했으며,
꿀 향기를 갖고 있었다.
그 향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는
그 배가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눈물 속에 익사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별처럼 벌거벗은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돌아갔고.
내 믿음은 그 배들 속에 있다.
나는 사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
작별들
안녕, 안녕, 한 곳에게 또는 다른 곳에게,
모든 입에게, 모든 슬픔에게,
무례한 달에게, 날들로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주週들에게,
이 목소리와 적자색으로 물든
저 목소리에 안녕, 늘 쓰는
침대와 접시에게 안녕,
모든 작별들의 어슴푸레한 무대에게,
그 희미함의 일부인 의자에게,
내 구두가 만든 길에게.
나는 나를 펼친다, 의문의 여지 없이;
나는 전 생애를 숙고한다,
달라진 피부, 램프들, 그리고 증오들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규칙이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일련의 반작용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행은 매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장소를, 모든 장소들을 즐겼다.
그리고, 도착하자 또 즉시
새로 생긴 다감함으로 작별을 고했다
마치 빵이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달아나듯이.
그리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을 뒤에 남겼고,
오래된 문처럼 작별을 되풀이했으며,
영화관과 이유들과 무덤들을 바꾸었고,
어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모든 곳을 떠났다;
나는 존재하기를 계속했고, 그리고 항상
기쁨으로 반쯤 황폐해 있었다,
슬픔들 속의 신랑,
어떻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가지 않은.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밟고 되밟았으며,
옷과 행성을 바꾸고,
점점 동행에 익숙해지고,
유배의 큰 회오리바람에,
종소리의 크나큰 고독에 익숙해졌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음이 똑같았다,
주교에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나무랄 데 없이 죽었다, 우리의 가나한 사람,
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뿌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는 항상 그걸 했다; 잔혹하게
그는 미개지와 싸웠다,
그리고 이제 하늘이 그가 일구도록 완만히 놓여 있다,
나중에, 하늘의 수확 중에
그는 자기 몫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높은 데서
그의 식탁에는, 하늘에서 배부르기 위해
모든 게 차려진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은, 아래 세상에서의
운명으로, 약 60년의 굶주림을 갖고 왔다,
마침내, 당연하게도,
삶으로부터 더 이상 두들겨맞지 않고
먹기 위해 제물이 되지 않은 채 만족스럽기 위하여,
땅 밑 상자 속에서 집처럼 안전해
이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 투쟁을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정의를 바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그들은 그의 컵을 채워주었고 그게 그는 좋았다;
이제 그는 행복에 겨워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그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는 뼈 자루였다, 검은 눈을 가진,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다, 그의 무게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걸 갖지 못했었다는 걸,
만일 이 힘이 계속 쓰여서
미개지를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밀을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
유황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땔나무를 운반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람이 구두가 없었다면,
아, 비참하다, 이 힘줄과 근육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사는 동안 정의를
누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때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그런데도
노동을 계속했고, 이제, 관에 든 그를
우리 어깨로 들어올리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지를,
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은 모든 걸
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
그는 우리한테 무게를 달고, 우리는 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무게를 달까?
그는 이 세상이 하는 만큼 많이 무게를 단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이 죽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간다. 분명히
하늘은 빵을 풍부하게 구우시리라.
물
지상의 모든 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가시나무는
찔렀고 초록 줄기는
갉아먹혔으며, 잎은 떨어졌다,
낙하 자체가 유일한 꽃일 때까지,
물은 또다른 일이다,
그건 그 자신의 빛나는 아름다움 외에 방향이 없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 속을 흐르며,
돌에서 명쾌한 교훈을 얻고,
그런 노릇들 속에서
거품의 실현되지 않은 야망을 이루어낸다.
그건 태어난다
여기 바로 끝에 나는 왔다
그 무엇도 도대체 말할 필요가 없는 곳,
모든 게 날씨와 바다를 익혔고
달은 다시 돌아왔으며,
그 빛은 온통 은빛,
그리고 어둠은 부서지는 파도에
되풀이하여 부서지고,
바다의 발코니의 나날,
날개는 열리고, 불은 태어나고,
그리고 모든 게 아침처럼 또 푸르르다.
탑에서
이 장엄한 탑에는
투쟁이 없다.
안개, 공기, 날이
그걸 둘러쌌고 떠났으며
나는 하늘과 종이와 더불어 머물렀다,
고독한 기쁨과 부채와 함께.
증오가 있는 지상의 투명한 탑 그리고
하늘의 파동으로
움직이는
먼 바다.
그 구절에는 얼마나 많은 음절이 있는가,
그 단어에는? 내가 말했던가?
이슬의 불안은 아름다워라-
그건 아침에 떨어진다
새벽에서 밤을
분리하며
그리고 그 차가운 선물은
불확실하게 매달려 있다
강렬한 태양이
그걸 죽게 하기를 기다리며,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눈을 감는 건지 아니면 밤이
우리 속에서 별 박힌 눈을 뜨는 건지,
어떤 문이 열릴 때까지
그게 우리 꿈의 벽에 구멍을 파는 건지.
그러나 꿈은
한순간의 휙 지나가는 의복일 뿐,
어둠의
한 번의 고동 속에 소모되고,
우리 발 앞에 떨어져, 벗어던진다
날이 움직여 우리와 함께 출범할 때.
이게 거기서 내가 내려다보는 탑이다,
빛과 말수가 적은 물 사이,
칼을 지닌 시간,
그러고 나서 나는 살기 위해 서두른다,
나는 온 공기를 마시고
도시에 들어찬 불모의
빌딩들에 간담이 서늘하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혼잣말을 한다,
높은 곳들의
침묵에서 한 잎씩 떼어내며.
시인의 의무
이 금요일 아침, 바다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집이나 사무실에 갇혀 있거나
공장이나 여자, 거리나 광산 또는 메마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나는
그에게 왔다, 그리고 말하거나 보지 않고
도착해서 그의 감옥문을 연다,
희미하나 뚜렷한 동요가 시작되고,
천둥의 긴 우르릉 소리가 이 행성의 무게와
거품에 스스로를 더하며,
바다의 신음하는 물흐름은 물결을 일으키고,
별은 그 광관光冠 속에서 급속히 진동하며,
바다는 파도치고, 꺼지고 또 파도치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내 운명에 이끌려,
나는 바다의 비탄을 듣고 그걸
내 의식에 간직해야 하며,
거친 물의 굉음을 느끼고
그걸 영원한 잔에 모아,
그들이 수감되어 있는 데가 어디이든,
그들이 가을의 선고로 고통받는 데가 어디이든
나는 유랑하는 파도와 함께 있고,
창문으로 드나들며,
내가 "어떻게 그 바다에 닿을 수 있지?" 하고
두 눈은 치켜뜬 채, 묻는 소리를 스스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없이,
파도의 별빛 밝은 메아리를 건넬 것이다,
거품과 유사의 부서짐을,
움츠러드는 소금의 바삭거림,
해변 바닷새들의 음울한 울음을,
그리하여, 나를 통해, 자유와 바다는
어두운 가슴에 대답해줄 것이다.
말
말은
피 속에서 태어났고,
어두운 몸속에서 자랐으며, 날개 치면서,
입술과 입을 통해 비상했다.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여전히, 여전히 그건 왔다
죽은 아버지들과 유랑하는 종족들에서,
돌이 된 땅들에서,
그 가난한 부족들로 지친 땅,
슬픔이 길이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떠나서 새로운
땅과 물에 도착하고 결혼하여
그들의 말을 다시 키웠느니.
그리하여 이것이 유산이다;
이것이 우리를 죽은 사람과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들을
연결하는 대기大氣
대기는 아직
공포와 한숨을
차려입은
처음 말해진 말로 떨린다.
그건 어둠에서 솟아났고
지금까지 어떤 천둥도
그 말,
처음 말해진
그 말의 철鐵 같은 목소리
와 함께 우르렁거리지 못했다-
그건 다만 하나의 잔물결, 한 방울의 물이었을지 모르나
그 큰 폭포는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그러다가, 말은 의미로 채워진다.
언제나 아이와 함께, 그건 생명으로 채워진다.
모든 게 탄생이고 소리이다-
긍정, 명확성, 힘,
부정, 파괴, 죽음-
동사는 모든 힘을 얻어
그 우아함의 강렬한 긴장 속에서
실존을 본질과 혼합한다.
인간의 말, 음절, 퍼지는
빛의 측면과 순은세공,
피의 전언을 받아들이는
물려받은 술잔-
여기서 침묵은 인간의 말의
온전함과 함께한다,
인간에게, 말하지 않는 건 죽는 것이니-
언어는 머리카락에까지 미치며,
입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고,
문득, 눈은 말이다.
나는 말을 취해서 그걸 내 감각들을 통해 보낸다
마치 그게 인간의 형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것의 배열은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나는
말해진 말의 울림을 통해 나의 길을 찾는다-
나는 말하고 그리고 나는 존재하며 또한, 말없이,
말들의 침묵 자체의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며 접근한다.
나는 한마디 말이나 빛나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과 건배한다;
나는 거기 들어 있는
언어의 순수한 포도주나
마르지 않는 물을 마신다,
말의 모성적 원천을,
그리고 컵과 물과 와인은
내 노래를 솟아오르게 한다
왜냐하면 동사는 원천이며
생생한 생명이므로-그건 피이다
그 참뜻을 표현하는 피,
그리하여 스스로 뻗어나가는.
말은 잔에 잔다움을, 피에 피다움을,
그리고 생명에 생명다움을 준다.
파블로 네루다/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과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인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쉼보르스카의 시세계 / 이해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구절이 어느 영화의 제목인지 책 제목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대가 인간적인 사람 한 명을 만나기 힘든 때이다 보니
그만큼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요즘 아이들은 내신인지 하는 것 때문에
시 한 편을 읽을 시간도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내 기억에는 여고시절 의미를 모르면서도 시를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시인의 시세계나
시에 대한 해설을 써달라고 했을 때 처음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란 자신이 감수성으로 읽어내야 한다고 믿기에.
그리고 내가 시인에 대해
무엇을 쓸만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인이 너무 낯설고 혹시나 시라는 것은 어렵고 난해해서 내가 읽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니 많이 있을 것 같아 학문적으로 시를 분석하기 보다는 내가 느낀 것을 씀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돕기로 했다. 틀림없이 있을, 시 읽기를 좋아하는 어린 사람들을 위해.
내가 처음 쉼보르스카 여사의 시를 읽었을 때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것 같은 감동을 받은 것은 시인의 관점이나 사고가 너무나 우리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 시인은 동양의 종교나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렵고 난해한 어휘를 쓸 필요없이
한마디로 시인의 시세계는 " 관조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흥분하지도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따뜻한 사랑을 일지 않고 있다. 못생긴 것, 가치 없는 것이 더 가치있을 수도있고, 좋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연과 나는 둘이 아니고 인간이 미물보다 반드시 위대한 것도 아니다. 오리려 문명이란 인간의 본성을 잃게 만들고 문명으로 인해 우리가 불행해 졌다고 믿으며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은 무위자연을 더 존중하는 시인의 사고는 노장사상과 닿아있다. 돌멩이에게도 의식이 있고 들풀이나 물과도 대화할 수 있다. 만물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래서 물고기나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위해 목어를 두르리고 풍경을 달고 종을 치며 인간만이 아닌 만물이 모두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불교의 자비심도 시인의 마음과 닿아 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시인은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썼는데 <트로이에서의 한 순간> <베트남> <끝과 시작><어떤 사람들> 등이 시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은 일 때문에 언제나 누군가가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제물이 됨을 비판한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여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트로이 전쟁은 아름다운 헬레나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시인은 헬레나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만 슬프다고 함으로써 명분 없는 전쟁을 비웃는다. 하기야 명분있는 전쟁은 없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히틀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상을 저리는 장본인이지만 시인은 태몽에 비둘기를 잡았다고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히틀러의 탄생을 비꼰다. 베트남의 여인에겐 전쟁이나 어느 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과 아이들의 생존만이 중요할 뿐, 죽이는 사람도 선택의 여지만 주어진다면 상대방과 적이 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고 살려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과 시작>에서는 전쟁의 아픔을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자아비판에 대한 칭찬> <희희 낙락>에서는 인간의 파렴치함과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고문> <증오>에서는 끝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잔인성과 미움을 보여준다.
<미소들> <시대의 아이들>은 한국의 상황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말 한국 사람들은 로마에서도 아니 달나라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할 거다. 거물 정치인들이 미소에 속지 말자. 그들이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도록 그렇게 놔두자. 그들의 미소에 감탄만 하지 말고 그 이면의 속임수를 깨닫도록 애써보자
(고인들의 편지> <습득물 보관소에서의 연설>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신은 죽었다는 실존주의의 경향을 보이며 <이력서 쓰기> <선택의 가능성> <구름>등에서는 형식에 사로잡히기를 싫어하며 형식보다는 자유를 존중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아직은>에서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으 아집을 경계하고 있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그리고 <과장없이 죽음에 대해> <경치와의 이별> <하늘> 등에서는 선과 악, 좋고 싫음 같은 구별이 결국 인간의 것일 뿐 자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하늘과 땅으로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전체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사고방식이 아니며, 자연에서 한 발 물러나 자연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두 번 일어나는 것은 없으므로 순간 순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며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수상 이유로 밝힌 것은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단편을 아이러니컬하게 그렸다는 점과 어떤 경우에도 인간적인 사랑을 간직하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자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절제된 시어 속에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문학사가들이 왜 고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위라고 할 수도 없고 고전주의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다. 아마 시인은 무슨 주의니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시는 그냥 시일 뿐이며 이런 사조 저런 사조로 나누는 것 자체가 할 일 없는 인간들의 관념의 유희인지도 모르니까. 시인이 시를 쓸 때 어느 주의에 들 것이냐를 생각하며 쓰지는 않는다, 단지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일념만 있을 뿐. 나 역시 시인을 어떤 주의로 묶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의 어떤 교수가 구미의 언론이 시인을 시의 모짜르트라고 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고 하면서 모짜르트 보다는 살리에르에 가깝다고 쓴 것을 읽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시인은 결코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다른 기사 역시 나를 놀라게 했다. 시인은 지나친 말의 유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지만 시인의 언어감각은 가히 천재적이다. 특별하고 현학적인 시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새로운 낱말을 창조하기도 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란 수사적이고 어려운 말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람보다 쉬운 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어려운 말로 설교하지 않았고, 석가모니도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느라 수만 가지 설법을 했다.
여려운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아는 것이 적은 법이다. 스화시키지도 못한 채 남에게 보이려니 자연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쉬운 말로 썼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시인은 살리에르의 진지함과 에디슨의 노력을 겸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렇게 조금밖에 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쓴 것을 바로 출판하지 않습니다. 많은 시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갑니다. 고르고 고른 시들만 출판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는 한 편 한 편이 모두 주옥같다.
노벨상 수상식장에서는 가장 겸손한 수상자라는 평을 받았다. 언론에 나서거나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행복이나 무슨 위대한 업적보다는 작은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더 존중한다. 훌륭한 인품과 따뜻한 마음 아래서 위대한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다.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는 시인나 폴란드의 영광일 뿐 아니라 조용히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 모든 휴머니스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독자들이 부족한 번역을 통해서라도 시인의 사상과 마음과 인품을 읽어내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