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류 문화에서 집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집은 비바람, 더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공간이자,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통적인 의미에서 집은 삶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최근의 미디어 전경에서 접하는 집은 삶의 장소라기보다 죽음의 장소인 듯하다. 일례로 최근 방영한 드라마 <마스크걸> <힙하게>에서 집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곳이거나,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된다. 이제 집은 더 이상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안전한 성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공간으로 상상되는 듯하다.
집의 의미는 대중적인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의에서도 주요한 주제이다. 관련 문헌들은 집이 가지고 있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주택, 거주, 가정성, 사적 영역 등과 결합된 ‘장소’로서 집의 의미를 강조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집을 ‘사회적 경험’으로 이해하며, 물리적인 장소보다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부여하는 감각들로 정의한다. 이들은 안전함, 친숙함, 통제감 등을 집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제시한다. ‘안전함’은 자신이 물질적이고 개인적인 보호를 받고 있으며, 외부 세계가 연속성 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친숙함’은 시간에 걸쳐 반복적이고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된다. ‘통제감’은 자신의 일상 환경과 그 기반이 되는 사회적 환경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사회적 경험’으로서의 집은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과 온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특정 개인이나 사회 집단은 공적 영역의 일부를 선택해 일시적으로 “집 같은”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노숙인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이들이 이전에 거주하였던 집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새로운 집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어떤 이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집 없음’을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집에 있는’ 감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는 집에서 느끼는 ‘집 없음’의 감각을 선명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수년 동안 특수청소업자로 일하며 마주하였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맞이한 숨겨진 죽음의 공간을 보여준다. 대부분 혼자 살던 거주자가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던 장소이다. ‘죽은 자의 집’의 질감은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전달된다. 현관 앞에 쌓여 있는 독촉장, 끊긴 전기, 쓰레기더미, 배설물이 담긴 수백 개의 페트병, 죽은 이의 체액이 스며들어 있는 침구류 등. 또 다른 집은 인간이 아닌 고양이들의 사체가 겹겹이 쌓여 있다. 썩는 냄새를 없애기 위한 냄새 제거제와 쓰레기들, 그 옆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고양이들이 섞여 있다. 이들의 죽음은 수개월이 넘도록 발견되지 못하다, 이웃들에게 견디기 힘든 냄새로 지각된다. 발견된 이후에도 이들의 죽음은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처리되어 감추어진다.
김완이 보여주는 죽은 자의 집 전경은 돌보지 않은 삶을 드러낸다. 사회, 친구, 가족과 떨어져 전기와 난방도 끊긴 채 쓰레기로 덮인 공간. 이 공간은 이들에게 죽음 외에는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공간으로 보인다. 김완의 청소는 혼자 죽음을 맞은 이들을 애도하는 작업이자, 이들과 함께 버려져 죽어가던 집을 다시 산 자를 위한 집으로 바꾸는 작업으로 보인다.
오늘도 미디어는 수많은 죽음을 자극적인 볼거리로 쏟아낸다. 버려지는 신생아, 성폭행당한 후 죽은 여성, 공장 기계에 끼여 사망한 노동자, 고층 아파트에서 던져져 죽은 고양이, 생매장당한 개들 등.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위한 집을 만들 수 있을까?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20230902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