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의 흔해 빠진 풀, 어릴적 돌 위에 놓고 짓찧어 물고기를 잡는다고 장난했던 독풀, 쓰임새라고는 없어 버려지는 여뀌. 그 여뀌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그것을 작품으로 선택했다는 발상에도 탄성이 절로 났다. 키 낮고 넓은 질그릇에 흙을 채우고, 단 한 포기의 여뀌를 심어 기른 것이었다.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흙 표면엔 푸른 이끼가 덮여 있었다. 그 덕인지 일부러 심은 것 같지는 않은데 고란초 같은 푸른 홑잎 식물들이 한쪽을 차지하여 신비감을 더했다. 여뀌는 햇볕을 골고루 받도록 전지를 해가며 균형 있게 기른 과일나무처럼 자랐고, 줄기와 잎 전체에 붉게 단풍이 들어있었다.
얼마 전 KBS대구방송국 전시실에서 열린 남양학교 장애학생들의 ‘도자기와 야생화의 만남’ 전을 관람했다. 2년이란 준비과정이 있었다고 했다. 우선 학생들이 점토를 재료로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질그릇을 만들어 구워낸 다음, 그것을 화분으로 삼아 선택한 식물을 심고 길러 작품들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정신지체인 학생들이 만들고 기른 것들이라 별로일 것이란 선입관을 갖고 갔었다. 참 부끄러웠다. 선입관을 가진 상태에서 보는 세상은 마음 바탕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같다. 물론 나는 색안경을 낀 것조차도 모르면서 말이다. 가치판단의 기준도 개인으로 봐서는 결국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여뀌를 선택한 학생은 내가 볼 수 없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작품을 만들고 심고 길러 출품한다면 여뀌를 선택하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마다 다른 종류의 식물들을 심어 오랜 관리와 정성을 들인 결과였다. 그야말로 사람과 식물이 함께하며 살아 숨 쉬는 생동감으로 흘렀다. 생명의 귀함을 말없이 말하고 있었다.
여뀌도 특별한 곳에 심고 정성들여 길러지니 반듯하게 자라고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물론 그 작품이 출품되기까지는 학생과 지도 선생, 학부모 등의 끊임없는 관심과 협력과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학생은 도기를 만들고 여뀌를 심어 길렀지만, 그런 중에 자기 자신도 만들어지고 길러졌을 것이다. 어떤 유실수나 관상수도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하여 오랜 시간과 많은 성장과정을 거친다. 옮겨 심으면 지짓대도 해 줘야 한다. 종래는 학생들도 그렇게 자라 제각기 훌륭한 작품으로, 아름다운 사회인으로 거듭 날 것이다.
마음이라는 게 참 요상하다. 항상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 때문에 삶이 오히려 살만한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맛있는 식사도 두 번 이상 연속해서 먹으면 질리듯이 말이다. 그런데 마음 상태에 따라 같은 현상도 달리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기쁘고 즐거운 날은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며 풀 하나도 사랑스럽다. 우울하고 가라앉은 마음일 때는 신경질적이고 짜증스러우며, 세상도 회색이 덧칠해져 보인다.
초급장교 시절 최전방지역에 근무하면서 일요일엔 병사들을 인솔하고 부대 밖의 성당과 절에 다녔다. 항상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는 마리아와 부처가 엷은 미소를 머금을 때도 있고, 무표정한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 그리 보였으리라.
여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전시회를 관람한 후, 내 눈과 마음이 더 맑아졌는지 모르겠다. 요즘 나무는 색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낙엽은 지고……. 이 가을, 언제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응달진 보도블록 사이의 이끼도, 반쯤 시든 괭이밥풀이 아직 피우고 있는 노란 꽃도 그저 아름답다. 갑자기 경제적으로 대박이 난 것도 아니고, 세상이 확 달라진 것도 아닌데.
첫댓글 대구 남양학교 교지에 실은 내용입니다.
대구 남양학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공립 정신지체장애 학교로
학교 내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여뀌를 길러 낸 아이의 마음이 순수하지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ㅎ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아름다움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렇군요. 또 배웁니다 ㅎ
건강 챙기세요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