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집에서 6월 9일에 중동선교사 김동문 목사님을 초청하여 「오감으로 성경읽기와 이슬람 포비아 새로보기」란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이날 김동문 선교사님이 3200년 정도 된(?) 등잔을 가지고 오셨다. 성경의 믾은 부분에서 말하는 빛이 바로 이 작은 등잔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일어나 불을 켜라!’는 말씀이란다.
우리는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세상을 비추고 우리의 미래의 비전을 밝히라는 말씀으로 확대 해석한다. 그러나 등잔 위의 불은 등잔 주위를 밝히는 빛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고 충분하다. 내 안에만 감추어 두지 않고 '다른 이를 비추어 주는 빛'의 의미가 이 말씀안에 있지만 의미 실종이다.
우리는 빛을 발하는 말씀에 내가 얼마나 들어나려 애쓰는가? 큰 인물, 쓰임 받는 인물,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무던히 애쓰면 사는가? 그때 인용하는 말씀이 '일어나 빛을 발하라' 아니던가.
성경은 ‘아’ 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 ’하며 적용하고 은혜 받기를 좋아한다.
성경을 오감으로 읽어야 하고 Fact에 근거해 말씀을 확인하고 은혜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우리의 무지다.
성경은 중동을 거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이란, 이라크, 이집트, 아프리카... 중동을 모르면 거의 성경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중동에 관심은 없으면서 성경은 관심 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말, 과연 그런가?
중동은 현재, 이슬람의 땅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세 가지 혐오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슬람, 동성애, 종북 포비아... 펙트 체크가 없다. ‘카톡’교에 빠져 너도 나도 퍼 나르기 바쁘다. 사실을 체크하지 않고 그것을 진리로 믿는다. 정의로운 사회는 배제당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다. ‘배제’가 아닌 ‘배려’가 필요한데 우리에게 그런 여유가 없다.
우리는 혐오에 익숙하다. 깔아 뭉게고... 따돌리고...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할 수 없이 그 사회에서 태어난 것에 차별하고 무시한다. 내 몰기도 좋아라 한다. 성경의 원어로 볼 때 ‘부족’은 ‘채움’이 필요한 상태다. ‘어둠’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빛이 필요한 상태다. 그래서 다가가야 할 존재다.
성경의 ‘알다’는 몸으로 아는 반응을 말한다. '지식' 정도가 아니다. 상대가 사람이다. 우리가 익숙한 것에 오답이 많더라... 어제 김동문 선교사님과 밤 늦은 대화속에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진정성이 없는지...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들어보고 공감하려는 노력없이 쉽게 적을 만들어 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정보, Fact check 직접 하라!
★이글은 이 모임에 참석한 이기척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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