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체제가 진행되면서, 빈부의 격차에 따른 ‘불평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경제적 평등주의는 진정한 도덕적 이상으로 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단언하며, 책의 부제처럼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견 저자의 논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으나, 과연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가 분리되어 논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았다. ‘경제적 불평등 자체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마치 엄연히 존재하는 빈부의 격차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저자는 ‘국민들의 소득이 지나치게 불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중에 빈곤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경제적 평등’이라는 1장의 내용에서는, 그야말로 ‘경제적 평등’은 이상주의에 기반한 주장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과연 빈곤의 문제가 경제적 불평등의 사회 구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라는 반론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소득을 똑같이 빈곤선 이하로 맞추는’ 방식의 극단적인 설정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불평등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주장에도 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에는 ‘(아마도) 이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조안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헌사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저자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단적인 표지라 하겠다. 또한 저자는 경제적 평등보다는 ‘충분한 소유’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동일한 몫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덕의 관점에서는 각자가 충분한 몫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충분한 몫’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욕구와 결합될 때, ‘충분함’이라는 개념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충분한 몫’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나, 사람들이 목표로 한 재화를 축적시켰다면 그것을 과연 ‘충분하다’고 생각할 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저자 역시 ‘경제적 평등은 그 자체로 선은 아니지만, 본래적 가치를 지닌 재화들을 획득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삶의 조건을 위협받는 ‘절대적 빈곤’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빈부 격차에 따른 상대적 빈곤의 문제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빈곤하다고 여기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때로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빈곤’을 확인하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 경제학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다른 이른바 ‘문턱 효과’를 통해, 재화에 대한 효용을 설명한 부분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최대의 효용을 이루기 직전의 마지막 재화가 지닌 효용의 측면을 설명한 이른바 ‘문턱 효과’라는 것도, 실상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때문에 ‘경제적 평등’의 대안으로서 ‘충분한 몫’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이 지닌 허점으로도 생각되기도 한다.
즉 ‘경제적 평등’을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논리로 재화의 ‘충분한 몫’을 따져 논하는 것이 ‘빈곤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2장의 제목을 ‘평등과 존중’으로 정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충분한 몫’만큼이나 ‘존중’이라는 개념이 자의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재벌 2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빈부의 격차는, 그저 부모님이 누구냐 하는 것과 같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과연 사회에서 개인들이 ‘합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정당하게 실현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존중이라는 개념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로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답변들이 회의적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저작이지만,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경제적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한 인식과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자못 관념적으로 흐른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평등’은 경제적으로 분명한 수치로 환원시켜 논할 수 있는 개념인 반면, 저자의 대안으로 제시한 ‘충분한 몫’과 ‘존중’이라는 개념은 막연하고 개인마다의 인식 편차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논리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대안으로 자리를 잡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만족할 만한 ‘충분한 몫’을 진지하게 따져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는 무한정한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전제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