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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한국인의 사고방식
융통성(融通性, flexibility)이란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하는 재주나 능력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유도리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일본어에서 온 말이지요. 한 가지 사고나 가치 그대로가 아니고 이것을 변용해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지 같은 걸 의미할 때 융통성, 유도리 이와 같은 말을 한국인들은 즐겨 씁니다.
서양 식탁엔 고기 자르는 칼이 놓입니다. 고기를 포크로 누르고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는 것이 서양의 식탁 문화입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방법보다 손쉬운 방법을 고안해 낸 것 아닙니까. 포크 대신 집게를 잡고 가위로 고기를 잘라 먹는 우리를 보고 서양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가위는 천을 자를 데 쓰는 도구로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가위를 이쪽저쪽 다 유용하게 씁니다. 갈치 같은 생선을 자를 데는 가위가 딱 맞지요. 한 손에 갈치를 잡고 다른 손엔 가위를 이용하여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머리 부분을 잘라내고 몸통을 쓸모 있게 멋지게 자르는 것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칼질하기보다 훨씬 수월하지요.
두루마리 휴지는 식탁 위에 놓일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인들 사고지요.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라는 고정된 생각을 부수고 우린 이걸 식탁 위에 얹어놓고 양념 묻은 입을 닦는 데도, 물 묻은 손을 닦는 데도, 바닥의 물을 훔치는 데도 휴지를 유용하게 씁니다. 서양인들이 이걸 보고 기절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들지만 그건 그들 생각이고 우린 이쪽저쪽 두루 다 씁니다. 나무랄 일이 못 되는 일이지요. 옛날 노인들은 삿갓을 따가운 볕을 가리는 데도, 비 올 땐 비 막음을 하는 데도 두루 쓰고 살았습니다. 솥뚜껑을 뒤집으면 적이나 고기 굽는 프라이팬이 되지요.
서울에 잠수교가 있습니다. 물이 넘치면 강이 되고 넘치지 않으면 차가 다니는 다리로써 훌륭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한쪽만으로 생각하지 않은 입체적 사고, 융통성 있는 활용이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습니다. 근사하지 않습니까.
하나에 여러 개를 병합해서 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복합성 이것 또 한 한국인의 장점입니다. 문화체육부는 문화분야와 체육분야를 병합해서 행정하는 관청 이름입니다. 번다하게 두 장관 둘 것 없이 한 장관 밑에 함께 일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인이 잘 먹는 비빔밥 역시 밥과 나물을 따로 담아 놓고 밥 먹고 나물 먹고 할 것 없이 이걸 한 그릇에 넣어 슥슥 비벼 먹는 비빔밥 참 근사한 음식입니다. 서양 음식에는 우리와 같은 비빔밥은 없지요. 국 따로 밥 따로 할 것 있나요. 국에 밥을 말아 국밥으로 훌훌 마시면 좋은 것 아닌가요.
요즘 이상한 음식이 새로 등장하였습니다.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섞어 만든 짜파게티가 인기를 끌더니 이번에는 짜파게티에다 너구리 라면을 섞어 만든 짜파구리가 인기를 끌고 있지요. 이 음식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등장하면서 한국인 별미음식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회를 간장에 고추냉이(일본어는 와사비)를 섞어 여기에 적셔 먹습니다. 우린 회를 채소로 쌈 싸서 먹을 때 아니면 회만 먹을 때 된장에다 고추장을 섞어 만든 쌈장이 등장합니다. 된장맛과 고추장 맛을 같이 즐기게 하는 쌈장, 멋집니다.
한국인은 입체적 사고를 즐깁니다. 한쪽으로만 사물을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서랍은 빼었다 끼웠다 하게 되어 있는 뚜껑 없는 상자인데 주로 책상, 문갑, 장롱, 경대 따위에 달려 있습니다. 이걸 방언으로는 빼닫이라 하지요. 빼어 상자로 쓰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닫아놓는 걸 의미하지요. 이걸 영어로는 drawer라 합니다. draw는 끌어당긴다는 말이니 끌어당기어 쓰는 물건이 정도 말뜻이겠지요. 미닫이는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는 문이나 창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여닫이라고도 합니다. 밀어서 닫고 열고 하는 문이나 창, 아니면 열기도 닫기도 한꺼번에 하는 문이나 창이란 뜻이라 생각 듭니다. 영어는 sliding door입니다. 이건 미끄러지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사랑을 할 때도 거래를 할 때도 줄다리기에 비유되는 한국말이 있습니다. 밀당이란 말입니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미묘한 심리 싸움을 밀당이라 하지요 세상살이는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접점을 찾는 것 아닌가요. 흥정을 하는 데도 밀당, 사랑을 확인하는 데도 밀당은 필요하지요.
한국인들은 사물을 즉물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계가 있었지요. 이 시계추를 시계불알이라 했습니다. 태엽을 감는 걸 시계 밥 준다고 했고요. 느낌 그대로 모양 그대로 표현한 말 아닙니까. 경주시 건천읍 신평2리에서 산속 오솔길에 들어서면 신라 선덕여왕 5년(서기 636년)에 매복한 백제군을 섬멸시켰다는 여근곡(女根谷)이란 골짜기가 있고 여근곡의 중심부엔 옥문지(玉門池)란 약수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곳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보지골이라 했다고 하잖아요. 꽃 모양새가 개불알 같다고 해서 개불알꽃, 새 모양이 볼품없다고 해서 개똥지빠귀, 가꾸지 않았어도 저절로 나서 열린 보잘것없는 참외를 개똥참외. 쇠똥을 잘 뭉치는 풍뎅잇과 곤충 쇠똥구리, 말똥가리라는 겨울철새도 있습니다. 왜 말똥가리라 이름 붙였는지는 모르겠네요. 이와 같이 한국인들은 본 대로 느낀 대로 솔직한 데가 있어 재미있다 생각 듭니다.
서양식 사고와 달리 우리식 사고로 서양 것을 인식하는 것도 많습니다. cellular phone을 우리 식으로 고치어 휴대전화라 합니다. 영어 cellular는 작은 방 또는 세포라는 뜻인데 혼자 비밀스럽게 하는 전화기를 말하지만 우린 들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쓰는 전화기라 해서 휴대전화라 하고 아예 한국식 영어로 hand phone이라는 새로운 영어를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쉽게 알아듣지 못할지 모르지만 영어로 buy one get one(free)은 하나 사면 하나 공짜로 얹어주는 걸 말합니다만, 우린 간단히 one plus one 이런 말을 만들어 쓰고 있지요. 인식을 단순화하는 한국인이 놀랍지 않는가요. 자랑스럽지 않는가요.
- 임종찬 산문집 『대양을 항해하자』 2023. 3. 31. 세종출판사
첫댓글 임종찬 선생님 산문집 『대양을 항해하자』 출간하심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