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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 태어나셔서 2010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우리 시어머님은
함경도 함흥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나셨는데
시외할아버지께서는 함흥에서 큰 부자로 소작인들도 많고
또 소, 양등 키우는 농장도 있었다는데...
농장이 너무 넓어서 말을 타고 다녀야 했다 한다
가끔 어머님이 옛이야기를 하셨는데
함흥보석상에 좋은 보석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시어머님댁에 연락하곤 해서
집에 좋은 보석도 많았다 한다
시어머니께서는 키크고 날씬하시고 인물도 예쁘셨고
젊쟎고 얌전하고 음식솜씨도 좋으시고
손재주도 좋으셔서 일본에서 털실을 주문해다 동생들 옷을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한다.
그리고는 함경도 일대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일본유학을 하신 우리 시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한다.
815해방이 되고, 한국이 남북으로 갈려, 이북에 공산당이 들어온 후에는
지주들이 다 뺏기고 죽음을 당할때 시외할아버지께서 소작인 들에게 후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식구들이 목숨은 건지고 야밤에 이남으로 도주하실 수 있으셨다 한다
그때 3살이었던 우리 남편은 외할아버지 등에 업혀서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들, 외삼촌들과
이남으로 넘어 왔다 한다.
외갓집에서는 보석들만 챙겨갖고 이남으로 도망나왔는데
일부는 이모들(8살, 10살, 12살?) 옷에 매달아 주었지만
피난민 행렬에 치이다 보니 보석들 다 잃어버리셨다고 한다.
이모들 옷에 달아준 보석들은 자는동안에 그랬는지? 누군가 다 떼어갔다고 한다.
호강만 하시던 시어머님은 그때부터 고생을 하신것 같다.
우리는 미국에 유학와서 공부도 끝나고 직장을 가졌을때
시어머니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모셔왔다.
그때 시어머님께서 60대 초반이셨는데
똑똑하시고 자존심이 강하셨고 어디서나 당당하시고
말이 없으셨던 젊쟎은 분이셨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하셔서 무엇을 입으셔도 옷의 맵시가 나고 멋지셔서
교회에 어머니와 같이 가면
모두 "권사님 정말 고우셔요"하고 감탄들을 했었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옷을 시어머니 사다드렸냐, 좋은 며느리"라고
덩달아 나도 칭찬을 들었었다
나는 멋쟁이 시어머니와 외출하는게 너무 신나서
좋은 옷을 보면 시어머니것 먼저 사고
나는 뒤에 50% 세일할때 내 사이즈가 있으면 사곤했다.
그런데 어머니와 같이 일요일 교회에 갈때는 실갱이가 벌어지곤 했다
나는
"어머니 새로 사드린 그 옷을 입으세요" 하는데
어머니는 교회에서 되도록 눈에 띠지 않는 옷을 수수하게 입으시길 원하셨고
오히려 나한테 "좋은 옷도 많은데 하필 그런 옷을 입었니"
내가 멋을 내는걸 좋아 하셨다
어머님은 교회사람들과 친교를 하실때도
대통령 부인이 사람들 접대하듯 악수를 하시고
적재 적소에 현명한 덕담을 하셔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셨다.
또 앉으실때, 서실때, 참 품위 있으셨고
걸음걸이도 연속극에 왕비감 걸음걸이 같으셨다
교회에서 어떤분은 "시어머니께서 어쩜 저렇게 사뿐 사뿐 멋지게 걸으시지" 했고
우리집에 놀러왔던 어릴때 부터 같은 교회에 다니던 아는 언니(유명 목사님 사모님)은
위엄있으신 어머님에 "네 시어머님 참 어렵겠다" 말하셨다

친정엄마는 "너희 시어머님은 참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다"라고
말하곤 하셨다



시어머님께서는 남에게 속을 보이시지 않고 차거운 성격이시기도 했는지
수다를 떨고 연락하는 친구는 없으셨다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신 분인지
어머니께서 한때는 노인들 모여사는 아파트 단지에 사셨었는데
꼭 한번 노인회 회장이 매사에 반장같이 나서시는 시어머님께
"좀 가만히 계시라"볼멘소리를 했었다는데
그후 시어머님이 얼음짱 같이 쌀쌀해 지시니
그 부부가 그 노인 아파트 단지에 살기가 너무 힘들어
부부가 잘못했다고 몇번이나 빌었는데도 그집이 이사 떠날때 까지
마음을 열지 않으셨다고 한다
뒤에 어머님께서는 그집에서 이사가기 직전에 남편 7순잔치를 했었는데
생일 축하금만은 넉넉히 보내셨다고 하셨지만
그집에서는 축하금보다 어머니의 마음여심을 더 원했을것 같다
누구든지 한번 관계가 어긋나면
어머님은 얼마나 차겁고 쌀쌀하신지
상대편은 힘들어 죽겠는데
어머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우리 시어머님 참 강한분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오랜세월 겪어보니
꺽어지더라도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어머니 성격에
내색을 하시지 않는 어머니도 속으로 많이 곯으시고
그 성격때문에 외로우셨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어머님께서 시대를 잘 타고 나셨다면...
815 해방후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부잣집 딸로서.. 사회지위가 높은 분 부인으로서
누구보다 역할을 잘 해내셨을텐데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우리집에 계시면서 어머니는 나한테는 많은 사랑을 주시고 참 잘해주셨다
직장도 다니는 나를 대신해서
살림살이도 해 주시고... 텃밭도 해 주시고...
나는 집에 손님들을 초대하는걸 좋아했는데
내가 음식을 잘 못하니
시어머님께서 음식을 만드는걸 도와주셨는데
아니 음식 못하는 내가 답답해서 차라리 본인이 만드시고
나한테는 거들라고 하셨는데...
오는 손님들마다 기가막힌 음식솜씨에 감탄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께서 사람들 초대하기 좋아하는 나땜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너무 고맙고 죄송하다.
어머님께서는 가끔 나한테 아들(내 남편)에 대한 불평을 하시곤 했는데
그런땐 맞장구를 치며 어머님 편을 들었어야 했는데...
요즈음 생각하니
어머님께서 나한테 불만을 아들에 대한 불평으로 말씀하신것 같은데
눈치없고 미련한 며느리인 나는
남편편을 들곤했다
이제서야 뒤늦게 어머니께 너무 죄송하다
시간이 갈 수록 어머님 생각이 많이난다
남편도 어머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옛날 어머님 메주만들실때 찐콩도 얻어먹고
콩을 절구에 찧고 메주 만드는건 자기 몫이였다고
찰떡을 만들때는 절구에 찰떡을 찧는것도 자기 몫이였고
자기가 어머님 한테는 딸노릇을 했다고 한다
내가 눈치없고 어릿어릿해 주위사람들에게
제대로 내 의사도 잘 말을 못하고는
뒤돌아 꿍꿍 속상해 하는걸 보면서
남편은
"우리 엄마를 닮아봐라
얼마나 당당하고, 씩씩하게 사셨는지" 하는데...
나는 시어머니 발꿈치도 못 따라가는 사람이다
시어머님께서는 10년전 92세에 세상 떠나셨다
그때 시어머님께서 잡수시지도 않고
자꾸 잠만 주무셔서
앰뷰런스 불러 병원 응급실에 모시고 갔었다
시어머님께서는 심한 탈수증이셔
4일간 병원에 입원하셔서 아이비(링게르?)로 혈관을 통해 수분과 영양제를 4일간 맞으셨다
암등 여러가지 검사도 하고..
4일째 되던날 저녁 5시에 담당의사가
암도 아니고 괜챦다고 다음날은 퇴원해도 좋다고 해서
남편과 나는 그날 밤 병원에서 시어머니 병실을 지킬꺼니까
저녁먹으로 나갔었다.
7시에 병실에 돌아오니
의사, 간호원 죽~ 시어머니를 둘러싸고는
시어머니가 몇시간 안에 돌아가신다고...
한 간호원말에 의하면 대번 마렵다 하실때
화장실 모시고 가니 피만조금 나왔다 하니
아마도 장출혈이 있었던것 같다
의사들은 수술을 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한 한국사람 레지던트가
수술을 받으시면 살아나실 가능성이 있다고
수술을 하겠다고 해서
밤중에 수술을 받으셨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는데
의사가 수술 끝내고 나오더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을 다 끝내지 못해 다음날 더 해야 되기에
배를 꼬매 봉하지 않고
그냥 임시로 덮어만 두었다고
우리는 수술실에 계신 시어머님을 뵐 수가 없어서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한밤중에 병원에서
kidney failure(신장장애)가 생겼다고 dialysis(투석)을
해도 되냐고 전화가 왔었다
물로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새벽같이
병원에 갔었는데
시어머님께서는 life support에 매달려 혼수상태이신 채로
한 병동에 계셨다. 수술을 한 의사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도 우리에게 무어라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혼수상태로 기계에 매달려 연명하시고 있는
시어머님 병실에 며칠 있다가
선배 의사와 의논을 하고는
시어머님의 life support를 떼게 했다
시어머님께서 90이 넘으신 분이라 그랬는지
병원에서 dialysis투석을 하지 않은것 같았다
시어머니께서는 병원에서 기계에 매달려 혼수상태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께서는 평소에
blood thinner(혈액희석제)를 드셨는데 병원에서 INR 값을 체크하지 않은 것일까?
병원에 입원중에 갑자기 장출혈이 오다니..
병원실수가 아닐까?
잘 따져봐야 했었는데.. 그때 우리는 너무나 몰랐었다
시어머니를 모셨고
또 친정엄마를 모시고 살면서 인생여정의 마지막 길을 가시는 노인들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요즈음은 옛날 할머니들이
"나는 고통없이 잠자다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 하신것에 공감을 한다.

첫댓글 이글을 읽는 내내 청이님
시어머니께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옳고 그름이 명확하셨던 분이시기에
경우에 어긋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시고
사셨던 분이셨나 봅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면 그럴 경우 대부부
자기의 옳음을 명확하게 하기위해서 대부분 목소리를 내는데
그러시지 않으신고 다만 거리를 두시고 사셨던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요.
누구와 변론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마주치면 그냥 인사만하고 지나치며 지냈지요.
미국에서 사람들 만나는곳이 교회이다 보니
그런 경우가 교회안에서 있었지요.
이제 저도 74살인데,나이들고 지금 생각해보니
인간관계에 적이 없는사람으로 산다는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어떤분들은 합당한 말을 잘해서 자기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도
사람들과 잘지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제속으로 저사람은 대화가 안되는 사람이라 생각될때 거리를 두었으니까요.
청이님 시어머님께서 늘 당당하셨다는 점이 참 존경스럽네요.
성경속에서는 믿는자들은 늘 당당해야 하거든요.
부귀영화속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안에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청이님 시어머니처럼 자손에게 힘들지않게 편안하게 잠들수 있기를 기도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