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간. ‘거지공주’를 낭독하고 이은홍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야기 나누었다. “해”는 무엇일까. 아이들이 왜 해를 삼켰다고 했을까. 아이들은 해를 삼켰고 해가 되었다. “해”는 역사이고 아이들은 역사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나라를 잃은 민중의 삶은 거지공주와 같은 모습이어서 밥을 굶고 옷은 다 떨어지고 꼴은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 사이 이 땅에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는데”라는 말이 나온다. 힘없고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자유로우며 미래의 역사가 될 어떤 희망을 보여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역사를 소재로 하여 소설을 썼다. 거지공주의 입을 빌어서 고종의 삶을 서술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과 거리가 있는 허구성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나라를 잃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던 많은 아이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1905년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으로 을사늑약, 1907년 고종 퇴위, 1910년까지 일본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하나 날름날름 빼앗아 갔다. 서울역의 노숙자 초기가 바로 1910년부터라고 한다. 농촌에서 땅을 뺏기고 소작농은 줄고 이농하여 도시로 몰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조선을 통치한 시기였다.
우리 각자는 이런 의문이나 의견을 발표했다. 작가는 왜 “거지 공주”를 제목으로 썼을까. 아이들의 특성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미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 희망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라를 제 맘대로 팔아먹고 대대손손 해 먹고 배 뚜드리는 사대부를 우리 민중이 뒤집어 엎지 못했다는 점. 지주의 횡포나 사대부의 횡포에 시달린 민중들의 삶은 고통이었다는 점. 우리가 부르짖던 ‘혁명’이라는 것은 전쟁이거나 혐오, 야만, 폭력성을 띠고 있으며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 의견을 나누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였다.
두 번째 이야기도 톡톡 알맹이 가득 찬 열매와도 같은 것이었고 똑똑 두들겨보고 싶은 요술주머니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해를 삼킨 아이들》은 즐거움과 기대감으로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 시간을 오붓하게 누리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같이 꿀꺽 해를 삼키고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