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마감 뉴스를 전해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 퀴즈영웅 도전 과정을 정리해봅니다. 지나고나니 밀린 숙제를 뒤늦게 한 듯도 하고, 옛 친구를 오랜만에 후다닥 만난 듯도 합니다. 처음에 예심 통과하고서는 바로 출연할 거라 믿고 준비를 했습니다만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게 되자 게으른 일상으로 돌아갔고 해마저 넘기고 나니 아예 마음에서 지운 상태였습니다. 그랬는데 1월 18일 저녁 무렵 갑작스레 연락이 와서 일주일 정도 준비를 했지만, 벼락 치듯 서둘러 읽은 책에선 한 문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새삼 세상은 넓은데 배움은 짧다는 걸 실감합니다.
우선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도서관에서 브리태니커 축약판 비슷한 백과사전을 두 권 대출받았습니다. 또 녹화날짜가 설 명절 바로 전이라 망설이다가 결국 만정선생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응원의 댓글이 올랐기에 말도 없이 다녀오는 건 결례다 싶어 알리기는 했지만 때가 때인지라 적잖이 미안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척 고맙고 힘이 되었지만, 바쁜 시간에 하루를 허락한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8시 반 제주항공 첫 비행기를 타려고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변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미리 처리를 하고 떠나야 두루 편할 텐데 일부러 물도 마시고 요구르트도 먹었는데 영 소식이 오질 않습니다. 결국 임무완수를 못한 채 집을 나섰습니다. 비행시간 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다시 훑어보았는데, 나이 들면서 분석력이나 기획력은 별 지장이 없는데 기억력이나 암기력은 떨어지는 게 확실합니다. ‘엘 시스테마’를 기획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박사나 칠레 매몰 광산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 우르수아라든지, 프랑스 최초의 택시 이름은 ‘카브리올레’라든지 하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늘을 날았습니다. 창밖은 모처럼 환한데 올처럼 한 달 내내 추우면서 눈 많이 오는 날씨도 참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노숙자나 혼자 사는 노인 분들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빈번하게 보았습니다. 어쨌거나 멀쩡한 목숨이 얼어 죽는 일은 없도록 대책을 세워야 국격이 제대로 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교도소가 낫다고 부러 편의점을 털면서 잡혀가는 사람이 나온다면 안타깝지만 깊은 병이 든 사회 아닌가요? 하긴 저 자신도 지금 컴퓨터 앞에서 손이 차갑고 발이 시리긴 합니다. 방송 사전 인터뷰에서 상금타면 1/3은 기부할 거라 했는데 그렇게라도 미리 떠들어놔야 혹시 행운이 닥쳤을 때 아까운 기분이 덜 들 것 같았습니다.
방송국 입장 시간이 10시 반인데, 9시 50분 경 공항을 빠져나오니 아무래도 늦지 않나 싶어 택시를 탔는데 이게 착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철보다 돈은 훨씬 더 들고 시간도 늦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담당 작가에게 양해 문자를 보내고 20분가량 늦게 KBS 문을 들어섰습니다. 대기실에서 녹화유의사항을 듣고, 리허설하고 연하게 분장도 하고 출연료 3만원을 미리 받았다고 서명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23년 전에 방송 출연할 때 출연료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물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금액이더군요. 이미 교통비로만 30만원이 넘었는데 탈락하면 막대한(?) 적자를 보게 생겼습니다. 담당자도 쑥스러운 듯 미안하다고 하며 대신에 협찬으로 백화점 상품권 30만 원짜리를 드린다고 서둘러 말을 돌립니다. 그러면서 시청률에 옭죄어 사는 자신들의 신세를 은근히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니 퀴즈대한민국도 외주 프로그램인데 두 회사가 격주로 제작해서 내보내고 매주 시청률 비교를 하고 6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 구조라고 합니다. 편집하고 방송 나가는 일요일만 되면 자기들은 오늘도 날씨가 나빠야 시청률이 오를 텐데 하면서 하늘을 본다고 합니다. 한창 때는 10%를 넘기도 했는데 요즘은 주로 7~8%에서 머문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나 특수한 다큐멘터리만 외주 제작을 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외주의 범위가 상당히 넓군요. 따지고 보면 외주라는 것도 하청이나 비정규직 개념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앞으로 TV 볼 때 그런 쪽으로도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평소 퀴즈프로를 즐겨보기는 했습니다. 예심 통과 후 대략 5개월간 2/3 정도 시청을 했는데 예선 통과 가능성은 대략 70~80%, 영웅 문제를 맞힐 확률은 15%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운 좋게도 확실하게 1차 예선 1위를 하고, 2차 예선도 상금 4천5백만 원에 영웅 예비 문제도 3개를 맞히는 쾌조의 컨디션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즘 말로 ‘근자감’이라고 한다는데, 준비는 대충 해 놓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갖는, 어쩌다 복권 한 장 사놓고 일주일 내내 뻥 치는 그런 허풍에 제법 능숙한 편입니다. 과연 이번에도 운발이 통할런지요.
녹화가 늦게 끝나니 점심을 먹으라기에 고민 끝에 아침도 굶은 터라 먹는 쪽으로 했습니다. 방송국 구내식당에서 간략하게 3,500원 짜리 백반을 거의 비우고 화장실에서 십여 분 앉아 처리는 했지만, 녹화 중에 돌발사태가 발생할까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재작년 수술 받고 난 후부터 팔자에 없는 향수를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일로 퍼지는 냄새에 맞불작전을 쓰는 거지요.
1시가 되니 여기저기 분주하게 점검을 마치고 조우종 아나운서가 출연자들과 돌아가며 안면을 익힌 후에 드디어 퀴즈 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차 예선은 선택형으로 총 21문제인데 보통 17문제 이상 맞히면 거의 통과이고 16문제는 반반이고 15문제는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1라운드 7문제가 끝났을 때 하나만 틀린 것 같아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에는 5점으로 표시되었습니다. 어째 이런 일이 하는데, 바로 옆 출연자가 자신도 6점 같은데 5점이라 항의를 하는군요. 사회자는 확인해 드리겠다고 했지만 이내 제작진 쪽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미심쩍긴 하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침묵을 지켰습니다. 7점 한명에 6점이 셋, 5점이 둘, 공동 5위였습니다. 2라운드에서도 5문제를 맞히고 순위는 공동 4위, 3라운드에 무조건 6점 이상을 받아야 가능성이 보일 듯합니다. 그런데 3라운드 초반 4문제중에 2개를 틀리고 나니 ‘물 건너갔구나’ 하는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끄트머리 3문제를 모두 따서 15점으로 끝나고나니 ‘하나 더 맞았어야 하는데..... 맨 처음 한 문제가 아깝네.’ 하는 아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1등이 전광판에 제일 먼저 뜨고, 이어서 4,5,6등 탈락자가 올랐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이름이 없군요. 그런데 이게 원 일 2등자리에 떡하니 제 이름이 보이는 겁니다. 세상에. 그러나 기쁨의 시간은 아주 잠깐. 바로 옆 자리 친구하고 공동 2위라서 순위결정 문제를 주겠다고 사회자가 발표합니다. 컴퓨터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 순간, 어렵겠구나하는데 바로 벨이 울리더니 답을 말합니다. 저는 모르는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끝났습니다. 제작진과 다른 출연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하는데, 다른 아나운서가 오더니 감동적으로 보았다며 짤막한 인터뷰를 하자고 합니다.
글쎄요. 옛날 쌍팔년도에 나갔을 때는 압도적으로 3주 우승을 했었는데, 나이는 먹으면서 공부는 안 한 것이 확실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못 따라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잘 해준 게 별로 없어서 모처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는군요. 이번 일요일(2월 13일) 오전 10시에 방송 나갑니다. 작은 도전이 끝났으니 이제 새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어머니까지 출연했던 쌍팔년도 때의 기억이 새로워. '모처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은 게 아니라 도전도 못하는 우리에 비하면 '뚜벅이'는 영웅이야.
실력도 실력이자만 운도 꽤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순위결정전을 통과 했다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무튼 그 날 충분히 멋있었습니다.
그랬구나 ... 비껴가고 싶은 시간도 ... 버거운 도전의 시간도 ... 온 몸으로 부딪치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본다.
격려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뚜벅이님 궁금해서 일요일 10시에 TV봐야겠네요!
티비를 못 봤습니다. 목구멍에 풀칠하는 일에 몇 일 집중하고 동네 보름잔치에서 하루 종일 술 먹다 까먹었습니다. 저는 사실 결과보다는 그 긴 시간 동안 돌발사태에 어찌 대처하실까에 걱정이 더 많았습니다. 양계장을 못 짓게 돼서 약간 서운하기도 했지만...... 언제 인터넷으로 재방송 봐야겠네요. 선생님의 새 길에 꽃 잎을 뿌립니다.
한 번 보십시오. 아마 감동의 물결이 자욱하게 밀려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