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미학 24년 봄호 신인상 심사평
세계 이해, 자기 이해, 인간 이해
수필을 쓴다는 것은 세계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이해의 과정이다. 세계는 또 하나의 ‘나’일 경우도 있고, ‘타인’이나 ‘사물’ 또는 ‘현실’일 경우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므로, 작가 자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는 자신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마련된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삶이 지닌 의미의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수필 창작의 절차이면서 방법이다. 이번에 신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신홍락과 정종수는 이와 같은 수필 창작의 기본 이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이미 숙련된 자질을 갖추고 있다.
신홍락의 <오만과 방관>은 현실적 문제를 자기 이해의 단서로 삼는다. 작가의 궁극적인 의도는 원자력 정책의 오만과 이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방관자적 태도를 성찰하는 데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창작 의도에 따라 원자력 발전의 확대나 축소에 대한 논란만으로 내용을 이끌어갔더라면, 정치 칼럼에 가까운 글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알았기에, 원자력 발전에 관한 논란을 작품의 서두와 결미에만 배치하고 그 중간에는 지난날에 겪었던 세 가지의 경험적 사실을 불러와 배치한다. 첫 번째는 전원을 차단하지 않고 전기 콘센트를 수리하다가 불을 낼 뻔한 오만함에 관한 서술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방관자적 태도에 관한 서술이다. 양수장 관리자로 근무할 때 지역 유지들이 찾아와 전기 충격으로 물고기를 잡자는 제안을 만류하지 못한 것, 전기 배선 작업을 마친 기계의 시험 운전을 전기공에게만 맡긴 것을 자신의 방관자적 태도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작품의 목표 지향은 정치적 문제에 있다. 원자력 발전의 확대를 유보한 정부의 정책을 오만으로 이해하는 서두의 서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를 우려하고 태도 전환을 다짐하는 결미의 서술이 그것이다. 현실에 대한 이해를 자기 이해로 이어가는 구성력과 해석력이 작품의 구조를 탄탄하게 해 준다. 오만과 방관은 개인이나 정치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되돌아봐야 할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작품의 틀을 설계하는 구성 전략이 돋보인다. 그러나 과거에 겪었던 사건 중에서 세 번째 사건을 날리면 ‘오만-방관-방관’이 아니라 ‘오만-방관’이라는 대칭적 병렬이 이루어지므로 구조적으로 더 완벽했을 것이다. 또한 원자력 발전의 확대와 축소에 관한 문제를 사실의 진위 판단, 가치 판단, 정책 판단으로 따지지 않고 이념적 판단으로 이해한 것은 작품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원자력 정책을 이념적 판단이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다시 이념적 판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종수의 <옷걸이>에서 작가 자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 것은 ‘옷걸이’다. 이 작품에서는 옷걸이가 삶의 궤적을 떠올리는 단서로 작용한다. 특이한 발상이다. 옷걸이에는 아직도 걸려있는 옷들도 있고, 걸려있다가 이제는 사라진 옷들도 있다. 거기에는 추억도 어려있고 팍팍했거나 보람찼던 삶의 흔적도 걸려있으며, 이별의 아픔이나 만남의 사랑도 묻어있다. 살아온 삶이 옹색하고 구차했을지라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고, 그러한 삶에 겸손한 자세로 감사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이해에 이른다. 삶은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흐르는 것, 묵묵히 세월을 걸고 있는 옷걸이처럼 이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이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작품은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 옷걸이에서 작가 자신의 인생살이를 끌어내어 성찰하고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서툰 부분들도 적지 않다. 구성의 틀을 미리 세운다거나 감정선의 흐름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문장 표현의 정제성을 갖추는 능력은 작가로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과제이므로 명심해 두길 바란다.
이제 공식적으로 인정된 작가로서 흠결 없는 작품,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쓰리라 믿는다. 문학의 길에 더욱 아름다운 족적들을 남겨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