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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서재 어딘가에 놓여있는 상자가 떠올랐다. 오래되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그득한 보관함이다. 대학시절부터 끼적거렸던 일기나 노트에서부터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 뭉치, 여행하면서 사 모았던 엽서나 각종 팸플릿 뭉치들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다가, 지금처럼 어떤 계기에 의해 갑자기 생각나곤 한다. 아마 다시 꺼내 읽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 속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추억의 한 자락이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와 편지’라는 제재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과거의 추억으로 젖어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 책에서 다룬 영화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좋아해서, 2000년대 초반 문을 닫는 비디오대여점에서 구입한 영화 테이프가 1천여점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계기로 모은 DVD나 영화 파일들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영화 몇 편 정도 볼 수 있는 형편이다. 정말 바쁘던 시기에는 주말마다 영화 테이프를 쌓아놓고 보던 시절도 있었건만....
편지가 등장하는 영화.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의 영화 감상. 독자들에게는 익명으로 등장하지만, 적어도 저자는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 상대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비록 그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고, 이렇게 책으로 출간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게 되었을 것이다. 우선 편지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편지 형식으로 감상문을 쓴다는 이 책의 형식이 흥미롭게 여겨졌다. 19편을 대상으로 했지만, 언뜻 생각하기에도 박신양과 최진실이 출연하는 영화 <편지>도 떠올랐다. 죽음을 앞두고 배우자에게 영상편지를 남기는 박신양의 모습, 그리고 그 영상을 나중에 확인하는 최진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이 영화에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등장한다.)
이미 고백했듯이 이 책에서 다룬 영화의 상당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저자는 아마도 이 글들을 쓰면서 행복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마도 영화를 보면서도, 이번에는 누구에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을까? 편지를 쓸 상대를 떠올리며, 저자가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전해줄 말과 영화를 함께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글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서도, 저자의 글 속에 빠져들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영화 속의 편지 이야기’라는 기획으로 연재를 시작했고, 저자는 그 글들을 묶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저자는 편지를 받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그의 성격에 맞게 내용을 구성하고 영화의 내용과 감상을 적절히 곁들여 글을 썼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문득 독자들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쓸 때도 차용할 수도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되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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