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ching Controversial Issues:
The Case for Critical Thinking and Moral Commitment in the Classroom
종교, 젠더와 더불어 자본주의도 엄청난 주제이다. 학생들이 다루어야 할 기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 불평등 문제이다. 10%의 사람이 90%의 자산을 소유하게 되는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원래 자본주의의 위대한 약속은 자본주의가 모든 개인을 경제적으로 잘살게 할 것이며, 자본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국가가 전 세계를 부유해지도록 이끌 것이라는 예측은 지켜진 것일까? 시티븐 핑커와 <펙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둘째, 자연법칙처럼 여겨지는 능력주의(Meritocacy)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방식이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연법칙 Laws of Nature'과 같은 확실성으로 기술된다는 점이다. (p239)
'개인'은 경쟁에서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지성, 근면, 검소함, 선견지명과 같은 '자본주의의 미덕'을 가치 있게 여기고 길러야 했다. '모든 사람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실패는 인격의 모자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논의: 위 주장에 동의할 수 있나?)
- 막스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20년 독일에서 간행)
- 사회적 성공은 순수한 개인의 노력의 결과일까 아니면 사회 시스템의 조력에 의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참고해볼 만하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조한혜정 외 [노오력의 배신], 장은주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존 듀이의 개인에 대한 관점
그는 개인의 성장, 즐거움, 사상의 자유, 자기 계발을 믿었다. 그리고 개인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존재이며 삶의 질은 자신의 관계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질에 달려 있다고 봤다. 우리는 개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이 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미덕에 대해 엄청나게 강조 하지만 효율적인 조립라인에서 개성을 상실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된 바가 없다. 1920년대 이미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신화를 강화시켜 왔다.
이에 대해 평생 사회주의자였던 스콧 니어링은 20세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p241)
"세기의 전환기에 미국은 야심적이고 탐욕스럽고 권력에 굶주린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사냥터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미 대중문화는 경제적 생산성과 과학기술의 양적인 발전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다. … 나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엄청나게 부유한 이 나라에 살면서 권력에 취한 과두 정부의 지휘 아래 휘둘렸다. 과두 정부는 그들의 얼간이들과 희생자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막다른 골목에는 그들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아마도 헐벗고 생명을 잃은 행성 지구가 남을 것이다."
(논의주제) 위 글은 꼭 '오징어 게임'의 의미를 풀어놓은 글 같다.
(논의 주제) 그리고 니어링은 '땅으로 돌아가기'운동의 주창자이다. 문명의 이기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 전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덜 소비적인 삶, 자연의 순환 원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보편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현대가 들에 게 지속 가능한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 오늘날 학교에서 자본주의 유산은 교육의 경제적 이득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이다. 그런데 교육의 목적이 단순히 좋은 직장에서 높은 수준의 연봉을 얻는 것에 머물러야 할까? 그 외에 추구해야 할 교육의 목적은 없을까?
- 더불어 자본주의는 교육에 있어 경쟁과 수월성, 효과성, 선발의 기능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이러한 강조는 수업이 좋은 일자리를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과 배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잊게 만들었고, 모든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p245) 이러한 현상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능력주의 신화(메리토크라시)에 근거해 있고, 이러한 능력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공정한 정의의 원칙이라는 신념이 우리 사회의 시민들을 자본의 신민으로 손발을 묶어 놓은 쇠사슬을 자랑처럼 여기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 그리고 아무리 인구 감소로 대학이 구조조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정리될 것이고, 서울의 상위 대학의 좋은 과를 위한 경쟁은 여전히 당분간은 입시구조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 경쟁에서의 정의는 기회의 균등과 출발선의 공정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시경쟁은 기회의 균등과 출발선의 공정함을 보장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부모 소득이 상위 10%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지방에 살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완전 베틀 로열 아닌가? (스카이 캐슬)
- 직업계, 전문계 교육에 대한 단상
듀이는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의 분리에 격렬한 반대 하였다. 직업교육자는 민주시민교육보다는 '산업 체제'의 발전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다고 주장했다.(p246) 직업계 고등학교들은 현재 신입생 유치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적은 수에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직업계 고교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사회주의
-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 '오전에는 공동생산 작업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음악과 시 창작 등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증진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사회주의에서 강조하는 '공동체'는 무엇을 의미할까? 공화주의에서 강조하는 공동체는 무엇을 의미할까?
-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개인? 국가? 공동체? 가난의 책임을 공동체에 묻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의미를 묻는 것은 비판적 사고의 출발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자선행위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자선행위가 아닐 수 있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즉, 지역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식량, 주거지, 의복, 안전, 의료와 같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요소들에 걱정이 없도록 보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계유지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에게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선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나의 아이디어로서, 민주주의는 다른 연관된 삶의 원칙들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다. .... 참여 구성원 모두가 결과를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대가 있는 곳,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유지하기 위한 열정적인 노력과 열망을 통해 선이 실재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지, 거기에는 공동체가 있다. (Dewey, J. (1927) The Public and its Ploblems. New York: Holt, p. 149.) p260 재인용. |
-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한 재원의 조달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무엇이며 이에 대해 어떤 논의가 가능할까?
- 노동자는 누구일까? 교사는 노동자일까?
-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심화가 개인으로 하여금 노동소외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조합의 활동을 강조한다. 노동조합은 자신이 일하는 기업이 어떤 구조를 지녀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제품을 생산할지, 구성원을 어떻게 대우할지, 다른 세계와 어떻게 접촉할지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긍정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왜 일까?
- 젊은 교사들은 전교조에 대해 왜 긍정적이지 않을까? 전교조는 시대의 요그를 담아낼 수 없는 구시대 산물일까?
- 실천교사모임과 전국 교사노조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 사회주의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강조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강조한다. (p251)
-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가? 제한하는가?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가? 제한하는가? 자유란 무엇일까?
-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평등을 침해하는가? 그 역은 어떠한가? 이 둘이 함께 갈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노동에 대한 경시
우리는 직접적인 직업 훈련 이외의 교육을 등한시하는 직업교육에 대한 클리바드의 강한 비판에 주목해야 한다. 왜 직업 교육은 노동에 관한 문학, 가정, 조합의 역사, 노동과 관련한 미술과 음악, 발명가의 전기들, 공동체에서의 노동 장소, 시민적 참여, 행복, 좋은 삶의 의미와 같은 인본주의적인 주제를 풍부하게 다루면 안 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 (Grubb, 1995; Kliebard, 1999; Nearing, 2000). 최선의 직업교육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에 있다. (p255)
'우리가 우수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은 육체노동에 대한 존중심 결여, 이와 관련된 낮은 보수, 학업적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열등하다는 인식, 기계의 대체로 인한 일자리 박탈의 증가다. 그러나 우리를 공동체 차원에서 부끄럽게 만드는 또 다른 위선적 이유가 있다. 우수한 직업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냥 입시위주의 교육만을 강조하면 양질의 직업교육에 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비평가들은 미국이 사회 계급을 가로질러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 두려움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는 부의 격차와 동등하게 의사소통의 격차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p257)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는 사회와 정치 및 직업 집단 모두에게 개인의 참여를 요구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 주제와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 더 많이 제공함으로써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참여적 조절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p257)
우리가 여기서 제시한 대부분의 제안은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관심, 즉 모든 인간 능력에 대한 존중, 자신이 속한 기업에서의 개인의 참여, 공통 관심 안에서의 집단 상호작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본주의적 방향을 특징짓는 발명, 산업, 에너지의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이념 모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9장, 돈, 계층, 빈곤) 미국 사회는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아무리 자동화되고 혁신을 거듭하더라도 우리는 성공의 부산물인 쓰레기와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필요할 것이다. 또 집을 청소하고 칠하고 유지하는 사람들, 세탁하는 사람들, 정원사와 조경사들, 어린이와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 자동화에 관계 없이 제조 공정의 남은 부분을 가동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필요할 거시다. 이러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은 그들이 받는 보수에 대한 고려로 이어져야 한다.
(p247)
자산어보에서 창대가 하는 하찮아 보이는 일들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았던 정약전의 실학정신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이 유교 엘리트에서 이루어지고 창대는 동료이기 보다는 가르침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