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요 무기체계 / 신재호 Defence Korea 전쟁이론분야 자문위원
이 페이지는 절판된 <격류> 부록 일부이며 현재 출간중인 <임진왜란> 부록은 조만간 증보할 예정입니다. 1) 조선군의 신호용 깃발 조선 전기의 표준교범은 '진법(陳法)'이고, 조선 후기의 표준교범은 '병학지남(兵學指南)'이다. 진법도 기본적으로 중국 병법에 기초한 교범이나 그 정확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며, 어느 정도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된 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반해 병학지남은 중국 명나라의 명장인 척계광의 병법을 직접 계승한 것이다. 사실 병학지남은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해설서에 불과하다. 당연히 진법과 병학지남에 나오는 진형, 편제, 전술 등은 서로 차이점이 많다. 깃발이나 북, 나팔소리 등 신호체계도 기본적으로 병법의 일부이므로, 당연히 조선 전기의 신호체계와 조선 후기의 신호체계는 많이 다르다. 조선이 고유의 진법을 버리고, 척계광류의 병법으로 전환한 시점은 임진왜란(1592~1598년) 무렵이다. 그렇다면 1597년의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사용한 신호체계는 어떤 병법에 기초한 것일까?
위 기록은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려 부하장수들을 부르는 명량해전 중의 유명한 한 장면이다. 위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사용한 신호체계는 '진법(陳法)'에 기초한 신호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량해전에 등장하는 '초요기'는 원래 진법에서 사용하는 깃발이며, '기효신서'나 '병학지남'에는 '초요기'란 이름의 깃발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실제 전투시에 위장(衛將) - 부장(部將) - 영장(領將) - 통장(統將) - 여수(旅帥) 등 전투편성직책을 부여했다. 이런 각 전투편제 단위의 지휘관 별로 각각 OO기(旗)와 OO영하기 (令下旗)가 있다. 이때 OO기(旗)는 명령에 응하는 깃발이며, OO영하기(令下旗)는 명령을 내리는 깃발이다. 즉, 부장이 '부장영하기'를 드는 것은, 부장의 부하인 영장에게 명령하는 것이며, 부장이 '부장기'를 드는 것은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자인 위장의 명령에 응할 때 사용한다. 같은 방식으로 '영장영하기'를 올리는 것은 영장의 부하인 통장에게 명령하는 것이며, '영장기'를 올리는 것은 영장의 상급자인 부장의 명령에 응할 때 올리는 깃발이다. 유군장은 중국식 병법의 정기(正奇) 중에 기(奇, 유격부대나 복병 혹은 기습부대를 의미) 역할을 수행하는 유군(遊軍)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 병법을 기준으로 유군장은 영장과 동급이었다. 아래 그림에서 통장과 여수의 깃발은 생략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1592년)의 출전표를 보면 이순신의 부하들인 각 첨사나 만호들이 부장으로 임명되고 있다. 이는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이 1592년 기준 전투편성으로는 위장(衛將)급 임을 의미한다. 명량해전(1597년) 당시의 이순신은 수사 보다 상급자인 수군통제사였으므로, 위장급이 아니라 위장보다 한단계 더 높은 대장급(大將)이었던 것 같다. 휘에는 꼬리가 하나인 일류휘(一旒麾)와 꼬리가 세개인 삼류휘(三旒麾)가 있다. 삼류휘는 일명 대휘라고도 하는데, 대장이 위장에게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깃발이다. '초요기'는 각 계급자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인데, 대장급이 가지고 있는 대초요기는 예하 위장들을 소집할 때 사용한다. 대장기 자체는 대장보다 상급자의 명령에 응할때 사용하는 깃발인데, 명량해전에는 이순신 보다 높은 사람이 참전하지 않았으므로 이 깃발을 사용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위 난중일기 기사의 첫구절 中軍令下旗를 해석하면서, 모든 학자들은 "중군에 명령을 내려 기를 내리고"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위 기사는 "호각을 불러 중군영하기를 올리고"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중군영하기는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깃발이지만 中軍令下旗의 한자구성은 아래 깃발이름의 OO令下旗와 동일하므로 깃발 이름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원칙적으로 영하기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깃발이므로 중군영하기는 대장 이순신이 아닌 중군 김응함이 사용해야 정상이다. 중군은 독자적인 지휘관이 아니라 지휘관의 보좌관이므로, 중군영하기는 중군이 아닌 대장이 사용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중군영하기를 올린 것은 당연히 중군인 김응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둑은 군신(軍神) 치우를 상징하는 깃발인데, 한국,중국,몽골 등에서 군기로 흔히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도 출천할 때 이 둑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유럽학자들은 몽골 군기를 몽골 특유의 것으로 생각하나, 몽골 군기는 동북아 공통 군기인 둑의 일종이다.
2) 조선군의 갑옷과 군복 조선시대 갑옷에는 10여종이 있으나 가장 많이 입었던 갑옷은 두정갑과 두석린갑이다.
◆ 두정갑(豆丁甲) 두정갑의 두정이란 쉽게 말해 놋쇠로 된 못머리를 말한다. 겉에서 보면 갑옷에 둥근고 굵은 못이 박혀 있는 모양이기 때문에 두정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두정갑은 내부에 금속이나 가죽제의 편찰이 달려 있는게 원칙이다. 일반적인 갑옷은 바깥에 방호재(防護材)가 붙어있지만, 두정갑은 갑옷의 안쪽에 방호재가 붙어있다. 좀 더 거칠게 설명하면 두석린갑 형태의 갑옷을 안밖으로 뒤집어 입으면 두정갑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아래 면피갑은 육군박물관에 소장 중인 갑옷으로, 넓은 의미의 두정갑의 일종이다. 사진을 보면 옷 내부에 가죽으로된 갑옷 비늘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갑옷은 거의 대부분 두정갑이다.
◆ 두석린갑 두석린갑이란 두석으로 된 비늘 갑옷을 의미한다.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갑옷 형태이다. 어린갑, 용린갑으로 부르는 갑옷들도 두석린갑과 같은 갑옷이거나 거의 유사한 갑옷들이다. 이순신 장군은 두석린갑을 입었을까? 아니면 두정갑을 입었을까?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고위급 장수는 두석린갑을, 중간 계급 장수들은 두정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흔히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 유물로 본다면 고위급 장수들도 두정갑을 흔히 입었던 것 같다. 이순신은 두석린갑이 아닌 두정갑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 일반 병사들의 복장과 흉갑 아래 사진은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일반 병사들의 군복이다. 사극에 나오는 조선시대 병사들의 모습은 대체로 아래 사진과 같이 머리에는 벙거지를 착용하고, 무병 바지와 무명 저고리를 입은 모양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시대별로 조금식 복장에 차이가 있을 뿐더러, 중앙군의 경우에 따라서는 부대를 표시하기 위한 5색 색깔표지를 가슴과 등에 붙이기도 하고, 혹은 조끼 모양으로된 5색 옷을 겉옷 위에 덧입기도 했다고하므로, 아래 차림새가 그렇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의 여진족 정벌 기사를 보면, 조선 전기에는 일반 병사들도 원칙적으로 갑옷을 입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랬을까? 일본 야스꾸니 신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입었던 흉갑 1점이 남아있다. 이 흉갑은 일반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일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기록한 스페인 종군 신부가 "코레아인들이 모두 검은색 흉갑을 착용했다"고 기록한 것도 참고가 될 것이다. 내부에 금속판이 들어있다. 여러가지로 요즘의 방탄조끼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갑옷이다. 사진의 흉갑은 육군 박물관 소장품으로 겉감은 무명이고 안에는 두터운 무쇠 통판이 들어있다. 고려대 박물관에도 비슷한 흉갑을 1벌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반 병사들이 모두 이런 흉갑을 착용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일반 병졸들이 모두 갑옷 없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분명 아니다.
3) 조선군의 화약무기
◆ 조선식 대형총통류 제일 위의 천자총통 2세대형(보물 657호)은 1555년에 제작된 것으로, 손잡이가 파손된 상태이다.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겉모습으로는 약실이 구분되지 않고, 약실 위에도 마디가 있다. 1세대형 총통이나 3세대형 총통과는 다른 2세대형 총통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자총통 3세대형은 현충사에 소장중인 것인데, 1609년 혹은 166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자총통 2세대형(보물 863호)은 1557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현자총통 2세대 절충형(보물 885호)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 7월 제작된 것으로 현재 해군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총통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것이므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실제 사용한 총통일 가능성이 있다. 마디의 숫자와 형태는 2세대형과 유사하나, 외관상 약실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3세대형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 황자총통 2세대 절충형은 1587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같은 종류의 총통이라도 손잡이의 갯수나 위치는 조금식 다르다. 이런 여러 대형총통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수군이 주로 사용한 총통은 어떤 총통일까? 일부 연구가들은 천자총통의 경우 무게가 296kg이고 지자총통은 무게가 73kg이므로, 천자총통 1자루를 만드는데 드는 재료가 지자총통의 4배라는 점을 이유로, 천자총통이 경제적으로 비요율적인 무기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서 1593년 부터는 천자총통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자총통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황자총통의 경우에도 바다에서 인양된 경우가 거의 없고, 크기가 소형총통에 가까운만큼 성능이 떨어져서 수군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수군의 주력무기라는 것이다. 현재 바다에서 인양된 주요 총통은 현자총통 4문, 별승자총통 3자루 뿐이다. 지자총통의 경우에도 바다에서 인양된 예가 단 한 차례도 없으므로, 그런 논리라면 지자총통도 수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 1593년 이후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서 천자총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1593년 이후에는 수년간 전투기록이 거의 없어 다른 총통들도 기록에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부족한 자료를 토대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다만, 천자총통의 경우 제작상의 경제적 부담, 무거운 무게, 2m가 넘는 초대형 발사체를 수용할 공간 확보의 어려움, 엄청난 반동을 제어할 장치 등 배 위에서 대량으로 운용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숫자로만 본다면 오히려 소형총통인 승자총통이 더 많았을 것이고, 지현황자 총통이 그 다음이 되고, 천자총통은 판옥선이라 할지라도 2문 이상 탑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 조선 중기 대형 총통의 특징 - 총통의 대형화와 발사체의 다양화 조선 전기와 중기의 화약무기는 이름이 비슷하여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시대 각종 화약무기의 크기나 구경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예를들어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의 각종 대형 화약무기는 세종시대의 화약무기와는 규격이 전혀 다르다. 명량해전(1597년)에 사용된 총통들은 주로 제2세대형 총통들과 제3세대형 총통들이다.
고려말에 최무선이 최초로 화약무기를 개발했을 당시의 대형 총통으로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등이 있었다. 태종~세종26년경의 화약무기는 천자,지자,현자,황자 화포(天,地,玄,黃字 火砲)라고 불렀다. 세종27~30년 (1446~1448년) 사이에 기존의 화약무기를 개량했다. 이때 개량된 천지현황 화포를 장군화통,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 등으로 고쳐 불렀다. 학계에서는 이처럼 세종시대에 개량되고 완성된 조선 전기의 총통들을 제1세대형 총통으로 분류하고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늦어도 명종 10년(1555년)을 기점으로 조선시대 대형 총통의 규격이 크게 바뀐다. 이때의 대형 총통은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天,地,玄,黃字 銃筒)이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때의 총통들을 제2세대형 총통으로 분류한다. 조선 초기의 천자,지자,현자,황자 화포와 조선 중기의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실상 규격이 전혀 다른 총통들이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중기의 천자총통은 세종~성종시대의 장군화통(천자화포)보다도 길이가 더 길고, 구경도 더 큰 총통이다. 또한, 조선 중기의 지자총통은 조선 전기의 일총통(지자화포)보다는 크고 차라리 장군화통(천자화포)과 유사한 크기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이총통(현자화포)과 삼총통(황자화포)는 손으로 들고 사격하는 총에 가까운 무기이지만, 조선 중기의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은 거치시켜 발사하는 대포에 가까운 무기이다. 당연히 현자총통은 이총통(현자화포)보다 훨씬 크고, 오히려 조선 전기의 일총통(지자화포)와 유사한 크기이다. 황자총통도 삼총통(황자화포)은 물론이고 이총통(현자황포)보다도 대형의 총통이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2세대형 총통은 외관상 약실이 포신과 구별되지 않고, 약실 둘레에도 마디가 있다. 이 점은 1세대형 총통이나 3세대형 총통과 구별되는 2세대형 총통의 특징이다. 발사체의 경우도 조선 전기의 1세대형 대형 총통들은 원칙적으로 대형 화살을 발사했지, 철환 같은 원형발사체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 중기의 2,3세대형 대형 총통들은 필요에 따라 대형 화살 뿐만 아니라 각종 원형발사체도 사용했다. 1550~1596년 사이에 제작된 2세대형 총통 중에는 2세대형과 3세대형의 중간 형태를 가진 총통들도 있다. 이들 총통은 마디가 적다는 점에서는 제2세대형 총통과 유사하나, 약실 둘레에 마디가 없고, 외관상 약실이 구분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떻게 보면 1세대형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2세대 절충형 총통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지자총통과 일본 야스꾸니신사에 소장되었던 지자총통은 같은해(1557년)에 제작된 총통임에도 동아대 지자총통은 전형적인 2세대형 총통이고, 야스꾸니신사의 지자총통은 2세대 절충형 총통이다. 아마도 2세대형 총통과 2세대 절충형 총통은 동시대에 같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대략, 1596년부터 총통의 외형이 다시 바뀐다. 이 1596년부터 제작된 총통을 흔히 제3세대형 총통이라고 부른다. 제2세대형 총통과 제3세대형 총통의 크기와 내부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3세대형 총통은 약실의 지름이 다소 크고, 마디 숫자가 많고, 마디 위에 다시 마디를 나누어 놓은 점이 특징이다. 아래 그림은 1,2,3세대형 총통의 변천도이다. 그림에서 손잡이의 숫자와 위치, 마디의 숫자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상대적인 특징을 보여줄 뿐이다.
조선 초기의 총통을 개량하여 제1세대 총통을 완성한 인물은 다름아닌 세종대왕이다. 이에반해 제2세대 총통의 개량작업을 주도한 인물과 그 개량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미 조선 전기의 삼총통(三銃筒) 실물 유물 중에 황자(黃字: 黃자는 천자문 순서상 4번째)가 아닌 주자(宙字: 宙자는 천자문 순서상 천지현황우 다음의 6번째임) 명문이 새겨진 예가 많다. 삼총통은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1474년)의 화약무기 중 크기 순서로 네번째이므로, 황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함에도, 여섯번째인 주자를 새긴 것은, 1474년 이후 어느 시점에 신형 대형 총통이 추가로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빠르면 성종시대로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제2세대형 총통 실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1555년(가정 을묘년)에 만든 것들이다. 실록을 보면 명종 10년대(1555년)를 전후하여 대규모 총통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대략 1555년을 전후하여 제2세대형 총통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2세대형 총통이 최초로 제작된 것이 언제인지, 그 최초 개량과 제작을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여하간 임진왜란 직전인 1555~1557년경 기존의 총통보다 훨씬 큰 대형총통들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미 일본이 조총을 생산한 상태에서, 이총통이나 삼총통 기타 이보다 크기가 더 작은 소형 총통들은 큰 가치를 가질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수군을 화력과 사거리로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대형의 천,지,현,황자 총통 덕택이었다. 그러한, 대형 총통들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40여년전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선 수군의 공이 제일 컸다. 그 조선 수군을 이끈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판옥선과 대형 총통들이다. 그 판옥선과 대형 총통들이 모두 명종 10년(1555년)을 전후하여 개량, 개발, 제작된 것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임진왜란의 승패는 전쟁이 발발하기 40여년전에 이미 결정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조선왕조가 임진왜란 전 200여년 동안 전쟁을 잊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외침을 걱정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고, 그러한 애국자들이 부족하나마 국방의 주춧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 중국식 대형총통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병 파견을 계기로, 다양한 중국식 화포가 도입되었다. 불랑기, 백자총통, 호준포, 위원포, 장군포 등이 그 예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이들 중국식 화포를 자체 생산하여 조선식 화포와 같이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도 당총통, 목가포, 홍이포 등 각종 중국식 화포가 추가로 도입되었다. 불랑기(佛狼機)는 16세기 초에 중국에 도입된 유럽식 대포이다. 불랑기는 모포(母砲)와 자포(子砲)가 분리되어 있다. 불랑기는 자포 안에 포탄을 장전한 상태로, 자포를 모포에 결합시키는 독특한 장전방식을 사용한다. 이때문에 장전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나, 자포와 모포의 규격이 정밀하지 않으면 폭발할 위험성도 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때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된 무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목동 지하철 공사장에서 1563년에 제작된 국산 불랑기의 자포(보물 제861호)가 발견되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30여년전에 불랑기를 자체 생산한 것이다. 불랑기는 크기에 따라 불랑기 1~5호로 나뉜다. 현재 남아있는 실물 유물은 주로 불랑기 4호와 불랑기 5호이다. 불랑기 4호의 경우 전체 길이가 100cm 내외이고, 구경은 40mm 정도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에서 불랑기를 사용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1994년 여천시 백도 앞바다에서 불랑기(5호로 추정) 자포 1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수군에서도 불랑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총통의 경우 구경에 비해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호준포는 포구에 양각대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대장군포의 경우 우리나라 지자총통보다 조금 크고, 천자총통보다는 작다.
◆ 완구류 완구(碗口)는 구경이 매우 크고, 발사탄도가 곡선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대형 총통류들은 기본적으로 평사포에 가까우나, 이 완구는 곡사포 내지 박격포에 가까운 탄도를 가진다. 구경이 이렇게 크기 때문에 단석(團石:둥근 돌)이나 비격진천뢰(비진천뢰)를 발사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완구에는 총통완구가 있었으며, 조선 중기에는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소소완구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별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등이 있었다. 조선 중기의 대완구는 정확한 규격이 남아있지 않지만, 발사체의 무게로 추정해보면 대략 조선 전기의 총통완구와 비슷한 크기(구경 117.8mm)였던 것 같다. 조선 중기 중완구의 크기도 기록이 없으나, 발사체의 무게로 추정하면 구경이 대략 23~26mm 정도되었던 것 같다. 아래 그림의 완구는 1590년에 제작된 것으로, 중완구(보물 858호)로 추정되고 있으며, 구경이 23.5mm이다. 이순신의 장계인 '토적장'을 보면 1593년 4월 웅포해전 당시 이순신이 진천뢰를 사용한 기록이 나와있다. 진천뢰(비격진천뢰)는 일반적인 총통으로는 발사할 수 없고 완구로만 발사할 수 있다. 1978년 통영 앞바다에서 비슷한 크기의 중완구가 인양된 적이 있다. 이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서도 완구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 소형총통류 세종~성종대를 거치면서 이총통(宇字총통), 삼총통(宙字총통), 팔전총통 (洪字총통), 사전총통 (荒字총통), 사전장총통 (日字총통), 세총통 (月字총통), 신제총통 (盈字총통), 측자총통 등 수많은 소형 총통이 개발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구경이 30mm미만이며, 손으로 들고 사격한다는 점에서 대포보다는 총에 가까운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세총통을 제외한 모든 소형 총통은 총통 뒤의 모병부(자루구멍)에 나무자루를 끼워서 든다. 세총통은 철흠자(쇠집개)에 들고 사격하는데, 마치 권총을 연상시키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발행된 화약무기 교범인 신기비결(1603년)에 이들 조선 전기형 소형총통들의 사격 규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 소형총통들은 임진왜란 당시까지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전기형 소형총통류들은 조선 중기에 새롭게 개발된 승자총통에 밀려 명맥만 이어지는 정도였을 것이다.
◆ 승자총통류 - 토격형 총통 선조 초기에 전라좌수사 김지가 승자총통(勝字銃筒)이라는 새로운 소형총통을 개발하였다. 기록상으로는 1583년(선조 16년)에 처음 보이며, 실물 유물 중에서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575년(선조 6년)에 제작된 것이다. 승자총통은 1583년 만주족 니탕개란 토벌과 1588년 만주족 시전부락 정벌 당시 큰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차례 나온다. 소형총통 중에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것은 거의 대부분 승자총통 종류들이다. 승자총통은 다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별승자총통(별양총통) 등으로 나뉜다. 이들 각종 승자총통은 대량으로 사용된 탓인지, 실물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현재 국내에 70여 자루가 남아있고, 일본에 남아있는 것도 14자루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1592년 6월2일의 해전에서 대승자총통과 중승자총통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또한, 전남 여천시 백도 앞바다에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등이 인양되었다. 이런 여러 증거들을 보면 조선 수군들이 임진왜란 당시 승자총통 계열의 총통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승자총통의 장단점은 자세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유성룡은 그의 문집 (서애선생문집)에서 승자총통에 대승자, 중승자, 소승자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했고, 이순신도 난중일기 (1592년)에서 대승자, 중승자총통을 사용했다고 적었다. 이에반해 신기비결 (1603년)에는 대승자, 차승자, 소승자 총통이 나오고, 화포식언해 (1635년)에는 승자, 차승자, 소승자 총통이 나온다. 일단 대승자총통이 승자총통이고, 중승자총통이 차승자총통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응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전혀 별개의 총통일 가능성도 있다. 실물 유물로는 별승자총통이란 것도 있는데 문헌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위 제원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겉모양으로만 보자면 승자총통은 조선 전기의 소형총통 중에 이총통(우자총통,현자화포)이나 사전장총통(일자총통)의 길이를 10cm 정도 늘린 것에 불과하다. 특히 승자총통과 이총통은 전체 길이, 부리 길이, 약통 길이, 자루구멍 길이 등의 상대적 비율도 거의 일치한다. 전체 길이에서 약통 길이 비율이 승자총통은 21.67%이며 이총통은 21.25%이고, 전체 길이에서 자루 구멍 길이의 비율은 승자총통은 16.92%이고, 이총통은 15.50%이다. 즉, 승자총통은 이총통의 전체적인 비례를 유지한체 길이만 10 cm 정도 늘린 것이다. 이렇게 총통의 길이가 길어지면, 사거리가 조금 늘어나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이총통과 승자총통의 사거리를 비교해보면 승자총통의 사거리가 오히려 짧다. 이총통의 사거리는 기록이 없으나, 이총통의 전신(前身)인 개량형 현자화포의 경우 사거리가 700~900보였고, 이총통의 후신(後身)인 우자총통의 사거리는 700보였으므로, 이총통의 사거리도 700보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반해 승자총통의 사거리는 600보에 불과하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승자총통의 화약량이 이총통(우자총통)의 2~3배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총통(우자총통)에서 철환을 발사할때 화약량은 3돈3푼이다. 이에반해 승자총통은 7돈~1냥의 화약을 사용한다. 승자총통은 손으로 들고 사격하는 소형 총통류 중에서는 조선 전~중기를 막론하고 가장 큰 총통이다. 이총통의 전신인 현자화포의 경우 손으로 들고 사격할때 반동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평이 그렇게 좋지 못한 무기였다. 그래서 현자화포의 크기를 조금 줄인 것이 바로 이총통인 것이다. 승자총통의 경우 이총통에서 다시 크기를 키우고 화약량을 늘렸기 때문에, 현자화포처럼 반동이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해군사관학교의 승자총통 발사 시험 당시 반동이 상당히 심해서 사람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이것은 승자총통의 중요한 단점이다. 승자총통에 뒤이어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이 승자총통보다는 구경이 조금식 작아지고 화약량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자총통의 특징과 장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장점이 있길래 승자총통만 있으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는 장담까지 나왔을까? 조선 중기의 승자총통과 조선 전기의 소형총통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겉모양이 아니라 내부구조에 있다. 이총통을 포함한 조선 전기~중기의 소형총통은 기본적으로 격목형 총통이다. 이에 반해, 승자총통은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토격형 총통이다.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소형총통은 화살을 발사할 때는 격목을 사용하고, 철환을 발사할 때는 토격을 사용한다. 이에반해 승자총통은 격목(나무)을 사용하지 않고, 토격(흙)만 사용하도록 특수설계한 순수한 토격형 총통이다. 승자총통은 화살보다는 철환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총통이었고, 그것이 승자총통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이었다. 소형총통의 경우 화살보다는 철환을 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차승자총통이나 소승자총통의 전체 길이는 승자총통과 비슷하다. 다만 구경이 조금 작고 화약량을 줄였을 뿐이다. 차승자총통은 화약량이 5돈이므로, 승자총통 화약량 1량의 절반에 해당한다. 승자총통은 반동이 너무 심했기에, 구경을 조금 줄이고 화약량을 줄인 것이 바로 차승자총통(중승자총통)인 것이다. 차승자총통 실물 유물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은 1582년에 제작된 것이다. 승자총통 실물 유물은 20여 자루가 남아있는데 반하여, 차승자총통은 단 3자루 밖에 없다. 이로보아, 차승자총통은 실제 그렇게 많이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별승자총통은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1591년 10월~1592년 3월 사이에 제작된 별승자총통이 20여 자루가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달전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구경은 평균 16mm 정도이므로, 소승자총통보다 작고, 화약량은 5돈(錢)으로 중승자총통과 비슷하다. 전체 길이는 75.51cm로 승자총통보다 20cm 정도 더 길다. 이런 구조라면 사거리가 상당히 길고, 명중율이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남 여천 앞바다에서 무더기로 별승자총통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서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소승자총통은 화약량이 3돈이므로, 승자총통 화약량의 1/3 정도이다. 이 정도라면 반동이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특히 소승자총통은 근대적인 총과 유사한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소승자총통에는 가늠쇠(전조성)와 가늠자(후조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소형총통들은 총통을 가슴이나 겨드랑이 위치에 두고 지향사격 자세로 사격할 수 밖에 없다. 소형총통 끝에 연결된 긴 나무자루를 잡고 사격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향사격 자세라면 가늠쇠와 가늠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 소승자총통에 가늠쇠와 가늠자가 있다는 것은 지향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총처럼 눈 옆에 총을 붙이고 조준 사격을 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소승자총통에는 손잡이용 나무판(개머리판)이 있다. 승자총통을 포함한 조선의 모든 소형총통들은 대부분 나무자루를 잡고 사격한다. 오직 소승자총통만이 손잡이용 나무판이 있다. 손잡이용 나무판이 있기 때문에 눈 옆에 총통을 붙이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화승총 처럼 정밀한 발사장치가 없어 총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 정도라면 한국 화약무기 역사상의 혁명이라고 할만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승자총통이 개발된 것은 도대체 언제일까? 혹시 소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발발후 조총을 모방하여 제작한 총통이 아닐까? 뜻밖에도 소승자총통이 개발된 것은 임진왜란 이전이다. 현재 남아있는 실물 유물을 보면 1587~1588년 사이에 제작한 소승자총통이 20여자루에 달한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소승자총통이 일반화된 것이다. 이러한 소승자총통을 개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화승총 같은 근대적인 총의 장점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화승총의 장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조선에 있었던 것이다.
◆ 총통의 사격 방식 태종실록을 보면 '현자화포(이총통에 해당)는 힘이 센 사람만 쏠 수 있고, 설사 쏜다해도 2~3발 쏘면 팔이 아파서 더 이상 쏘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처럼 이총통 이하 소형총통들은 땅에 놓고 쏘는 것이 아니라 나무자루를 손으로 잡고 사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나무자루를 이용해 바닥에 고정시키는 방식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배 안이라면 총안구에 총통을 거치시키고 나무자루를 이용해 고정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형총통은 어떤 방식으로 총통을 거치하였을까? 융원필비(1813년)를 보면 동차에 총통을 거치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래 사진은 지자총통을 동차 위에 거치시키고, 장군전을 장전한 모습이다. 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당연히 이런 동차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군에서 복원한 거북선 안에도 황자총통을 동차에 거치시켜 놓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 이런 동차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물 유물도 없을 뿐더러 조선 중기의 문헌상에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래 화포(홍이포로 추정)는 163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화포는 상하 고각을 조절할 수 있는 받침대(기가:機架)에 화포를 거치시켜 놓았다. 중국측 문헌기록을 보면 불랑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받침대를 사용한 사례가 있다. 이런 받침대에는 아무 총통이나 거치시킬 수는 없다. 총통 몸체에 돌기가 있어야 고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랑기에서는 이런 돌기가 흔하게 발견되며, 조선식 총통 중에서도 이런 돌기가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 수군이 이런 식의 받침대를 부분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3세대형 별황자총통이나 불랑기, 백자총통 중에는 정철(正鐵)이 부착된 경우가 많다. 이 정철도 총통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부품으로 짐작되는데,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고정을 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기비결(1603년)에 따르면 천자총통을 사격할 때 앞은 이과정(二瓜釘)으로 고정하고, 뒤를 쌍과(雙瓜)로 뾰족하게 묶었다고 한다. 이과정이나 쌍과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정철(正鐵)과 유사한 걸개를 이용해서 고정시켰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 완구 중에는 특수한 구조의 수레 위에 고정시키는 경우가 있고, 구포(臼砲) 같은 경우는 나무상자 안에 고정시켜 놓고 사격했다. 3연발총이나 5연발총 중에는 양각대(兩脚臺)를 사용한 예가 있으며, 호준포의 경우에도 고정된 철제 양각대를 사용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모든 총통을 동차 위에서 고정시켜 사격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견해이며, 앞으로 좀 더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여하간 현재까지 밝혀진 총통 거치 방식은 기껏해야 상하 고각만 조절할 수 있을 뿐이며, 좌우 선회는 매우 불편하다.
◆ 총통의 사격순서 아래 총통의 사격순서에 대한 설명은 한효순이 쓴 신기비결(神器秘訣, 1603년)을 참고했다. 이 사격 순서는 정확하게는 천자총통에서 중연자(중형 납탄환) 100발을 동시에 사격할 때의 사례이다. ① 세총 (洗銃)- 총통 안을 쓸고 씻는다. ② 입약선 (入藥線) -약선혈(점화구멍) 안으로 점화선을 넣는다. ③ 하화약 (下火藥) -총구로 화약을 넣는다. ④ 하복지 (下覆紙)- 총구로 종이를 넣어 화약을 덮는다. ⑤ 하송자경 (下送子輕) -화약 다지는 나무자루(송자)로 화약과 종이를 가볍게 쳐서 다진다. ⑥ 하목마 (下木馬) - 총구로 격목(목마)을 넣는다. ⑦ 하송자 용력타 지약전 (下送子 用力打 至藥前) -나무자루로 힘껏쳐서 격목을 화약 바로 앞까지 밀어 넣는다. ⑧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下鉛子一層 下土 下送子)- 총구로 납탄환(연자) 30여발을 넣고, 흙을 넣는다. ⑨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반복) ⑩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반복) ⑪ 하합구대연자 일장 하송자 용력타입구평총 (下合口大鉛子 一杖 下送子 用力打入口平銃) - 마지막으로 총구에 맞는 큰 탄환(대연자)을 넣는다. 힘으로 쳐서 총구에 평평하게 넣는다. 이 단계까지가 사격 준비단계이다. 약선(藥線)에 불을 붙이면 약선혈(藥線穴:점화구멍)을 통해 불이 타 들어가 화약이 폭발한다. 약선은 종이를 꼬아 만드는데, 총통에 따라 길이를 28.1~43.7cm 정도로 조절한다. 종이를 넣는 것은 불을 잘붙게 하기 위한 것이고, 격목(목마,나무)을 총통 안으로 넣는 것은 약실을 밀폐시켜 최대한 폭발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천지현황 등 대형총통은 소형총통과는 달리 대형화살을 쏘든 철환을 쏘든 기본적으로 격목을 넣는다. 격목을 넣은 후 한번에 30여발식 납탄환을 넣고 흙을 덮는데, 이걸 세차례 반복하여 100발을 넣는다. 마지막에 총통의 구경과 비슷한 큰 탄환을 넣는 것도 총구를 밀폐시켜 폭발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큰 납탄 대신 쇠철자(쇠로된 탄환)나 대석자(돌로된 탄환)를 넣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제일 안쪽에서 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30여발 + 흙 + 탄환 30여발 + 흙 + 탄환 30여발 + 흙 + 큰 탄환을 차례로 넣어 거의 총통 총구까지 발사체를 가득 체우는 셈이 된다. 마지막에 힘으로 쳐서 총구에 평평하게 넣는다는 것은, 결국 총구 부근까지 발사체를 가득 체운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지자총통의 경우 중연자 60발을 발사하게 되므로, ⑧~⑨ 단계로 60여발을 장전하고, 바로 ⑪로 넘어가게 된다. 총통에서 대형화살 (대장군전 등)을 발사한다면 ⑧ 단계에서 납탄환 대신 대형화살을 총구 안으로 넣으면 사격 준비는 끝이 난다. 승자총통이라면 격목을 넣지 않고 토격(흙)을 넣게되며, 기타 다른 소형총통들도 철환을 발사할 때는 격목을 쓰지 않고 토격만 넣는다.
◆ 주요 총통의 사거리 1보(步)는 일반적으로 주척 6척(주척 1척은 대략 20.7cm)이므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24m가 된다. 따라서, 사정거리 1000보라면 1240m가 된다. 그러나, 최근 관련 기관에서 실제 실험한 결과는 문헌상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들어 별황자총통의 경우 대형 화살을 발사했을때 문헌상 사정거리가 1000보이므로 1240m 정도의 사거리가 나와야 정상이나, 실제 실험결과는 500~600m 정도였다.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관련 전문가들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1보가 주척으로 6척이라는 기존의 사학계의 연구 결과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고, 복원된 총통의 규격이 정밀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로서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조선시대의 실제 사거리는 실험 결과보다는 조금 더 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제2세대 총통의 경우 정확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이 실물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부터 사용된 제3세대 총통의 경우도 총통 명칭과 발사체에 대한 문헌 기록은 남아있으나, 총통의 완전한 규격은 기록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관련기관에서는 현재 남아있는 제2세대 총통 실물 유물을 기준으로 복제품을 제작하여 사거리를 실험하였다. 복제품의 원형인 실물 유물이 정확하게 제작된 표준형이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 경우 사거리가 떨어질 수 있다. 또한, 격목의 재질, 격목의 표면 처리도 사정거리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요소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없는 실정이다. 발사체의 경우도 조선 중기에 사용된 각종 대형 화살의 정확한 규격이 남아있지 않아, 무게를 제외한 기타 제원은 조선 후기의 융원필비(1813년)를 많이 참조하여 발사체를 복원했다. 이 경우 총통은 제2세대형 실물을 기준으로 복원하고, 발사체는 조선 후기형 발사체를 기준으로 복원한 것이 되므로, 실험 결과에 다소의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실제 발사시험시 흑색화약은 기준 사용량의 1/3로 줄여서 발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화약량을 줄여서 사격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화약의 성분 및 화약량의 조절에 따라서도 사거리에 차이가 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세종시대에도 부분적인 개량으로 사거리가 2배 이상 늘어난 사례가 있으므로, 앞으로 총통 복원과 발사법에 대한 노하우가 축적되면, 사거리가 더 늘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총통의 발사체
조선 전기에는 대부분 화살형 발사체를 사용했을 뿐 원형 발사체(탄환)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총통완구에서 돌로 만든 탄환인 포석이나 석환을 사용했을 뿐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 중종 무렵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일반 소~대형 총통에서도 원형 발사체(탄환)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기비결에는 대,중,소 연자가 나오고, 화포식언해에는 연환, 새알 철환, 철환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크기도 다양하고 재질도 철제, 납탄, 청동제 등 여러 종류가 있었던 것 같다. 실제 총통 유물에는 중환(中丸)이나 소환(小丸)이라고 새겨진 경우도 있다. 여러 기록을 대조해보면 조선 중기를 기준으로 크기는 대연자 = 대철자 > 연환> 중연자 > 소연자 > 철환 순서인 것 같고, 새알철환(조란환)은 철환과 비슷한 크기인 것 같다. 일부 연구가들은 소연자가 곧 조란환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장전 사례를 비교해보면 소연자는 조란환보다는 큰 탄환인 것 같다. 돌로된 탄환은 단석, 수마석, 대석자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부르지만 실상 같은 종류들이다. 이런 돌로된 탄환은 주로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완구류에서만 사용했으나, 일반 대형 총통에서도 대연자 대신 대석자(대형 단석)를 발사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중기에 출현한 무기로 조선시대의 총통 발사체중 유일하게 폭발형 무기이다. 비격진천뢰는 일반 총통에선 사용하지 않고 완구류에서만 발사했다. 대나무통 안에는 약선(점화선)을 감아놓았고, 대나무통 밖에는 종이를 넣어 대나무통을 고정시킨다. 나머지 공간에는 화약을 가득 채워 넣는다. 비격진천뢰는 발사된후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에 폭발한다. 이렇게 지연시간이 있는 폭발형 발사체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발상의 신무기였다. 일본군들은 이런 비격진천뢰의 특성을 잘 몰랐던 탓에 임진왜란 경주성 전투시에 큰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왜군들이 성밖에서 날아온 비격진천뢰를 굴려보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비격진천뢰가 폭발한 탓에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웅포해전시에 진천뢰 사용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군들도 비격진천뢰를 사용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는 대형 탄환인 수철연의환, 중형탄환인 연의환, 소형 탄환인 조란환 등을 사용했으나 이름만 다를 뿐 실상 조선 중기의 금속형 탄환과 유사한 종류들이다. 진천뢰나 단석도 완구의 구경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어지지만 본질적으로 조선 중기의 것들과 유사한 것이다.
화살형 발사체의 경우 실물 유물이 거의 없어, 문헌상의 기록을 환산했다. 조선 전기의 경우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의 기록을 토대로 국방군사연구소에서 환산한 수치를 인용했다. 조선 후기의 경우 융원필비의 기록을 토대로 주척 1척 = 20.7cm를 기준으로 필자가 직접 환산한 것이다. (융원필비의 규격은 영조척이 아닌 주척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조선 중기의 화살형 발사체는 문헌에 정확한 규격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대장군전과 장군전의 무게가 남아있는데, 이를 토대로 간접적으로 환산해 보면 조선 중기의 대장군전은 277.36 cm라는 결과가 나온다. (길이와 무게는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므로 단순한 참고 수치이다) 대략, 조선 중기의 화살형 발사체는 조선 전기의 화살형 발사체보다는 전반적으로 컸다는 점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실제 사용된 총통용 대형 화살 2점이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조선시대 총통용 대형 화살중 실물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이 2점 뿐이다. 큰 것은 길이 2m에 지름 150mm이며, 작은 것은 길이가 68.1cm이다. 재질은 참나무로 되어 있고, 날개는 쇠로 되어 있다. 일본의 일부 학자는 길이 2m의 화살(현지에선 이시히야-석화시로 호칭)을 대장군전, 길이 68.1cm의 화살(현지에서 보히야-봉화시로 호칭)을 장군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길이가 2m라면 대장군전일 수도 있고 장군전일 가능성도 있으나, 지름이 150cm인 화살을 발사하려면 총통의 구경이 150mm 이상이 되어야하므로 천자총통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현존 2~3세대 천자총통 중에 구경이 가장 큰 것도 130mm에 불과하므로 지름이 150mm나 되는 화살은 다소 뜻밖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 68.1cm의 화살은 장군전으로 보기엔 너무 짧으며, 철제 날개를 가진 차중전-'은장차중전'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길이 2m 이상에 굵기가 120~150mm에 달하는 화살이라면, 화살이라기보단 나무기둥에 가까운 가공할 존재이다. 1998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천자총통으로 대장군전을 발사했을때, 약 400m를 날아간 대장군전이 화강암 석축을 50cm나 뚫고 박혀 버렸다. 이를 본 천용택 국방장관이 "이 정도라면 돌로된 성곽을 공격해도 유효할 것 같다"고 감탄한 적이 있다. 이 정도 성능이라면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의 주력 군함 세키부네를 뚫고 들어가 단 1발로 격침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소형총통에서 사용했던 대나무화살은 활에서 사용하는 화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이런 소형 화살은 조선 중기부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아래 표는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 중기를 기준으로 수군이 많이 사용한 주요 총통의 발사체 사례이다.
◆ 로켓형 무기와 투척식 무기
신기전은 점화를하면 자체적인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로켓형 무기이다. 이 때문에 특별한 발사기구는 필요하지 않으며 대나무통이나 화살통에 넣어서도 쏠 수 있다. 대형 화살의 앞부분에 약통(추진체)을 매달고 그 앞에 다시 발화통(종이폭탄)을 연결시켜 놓았으므로, 화살이 목표물에 도달할 쯤에는 약통의 불이 발화통에 옮겨 붙어 발화통이 폭발하게 된다. 발화통(發火筒)이 신기전의 핵심적인 폭발체라고 할 수 있는데, 발화통 자체는 일종의 종이폭탄이므로 그렇게 위력이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발화통 안의 화약에 화약 무게의 27% 정도에 해당하는 거친 쇳가루 섞기 때문에, 이 쇳가루가 파편 역할을 해서 살상력을 가지게 된다. 화살 자체가 대형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하므로, 야간전투나 기병에 대항하는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해전에서도 적함에 불을 붙게 만들 수도 있으므로 효과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과 '옥포파왜병장'에 신기전이 등장하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수군들도 신기전을 사용했음이 확실하다. 여러 신기전 중에 실질적인 주력무기는 중신기전나 소신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기전 1발을 발사하는데 필요한 화약량은 무려 2900g인데, 이는 조총의 3g의 966배에 달하고, 소신기전의 12g의 240배이며, 승자총통 27.6g의 105배이고, 천자총통의 830g에 비해도 3.5배에 달한다. 이 정도라면 대신기전은 화약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막대한 화약 소모량에 비해서 실효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은 유사한 형태이나, 폭발체의 구성이 다르다. 산화신기전의 경우 발화통에 지화(地火)를 매달아 놓았다. 지화는 일종의 도약식 지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산화신기전은 목표물에 도달한 후, 지화로 인해 다시 위로 치솟아 오른후 발화통이 폭발하게 된다. 화거(火車: 화포식언해의 한글표기를 보면 화거라고 읽고 있음)에 신기전틀을 장치하면 한꺼번에 100여발의 중신기전이나 소신기전을 발사할 수 있다.
포통(砲筒)은 수류탄처럼 손으로 던지는 투척식 무기이다. 겉모습은 마치 뚜껑이 있는 둥근 그릇 처럼 생겼는데, 재질은 나무로 되어 있다. 안에는 화약과 소발화통, 지화 같은 폭발체를 넣어 두었기 때문에 불을 붙여 던지면 폭발하게 된다. 내부에 들어있는 마름쇠가 일종의 파편(Fragment) 역할을 하게 된다. 원래 마름쇠(질려,능철)는 성문 앞에 뿌려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무기인데, 해전에서도 상대방 갑판 위로 던지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런 질려를 화약무기화하여 더욱 위력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산화포통은 질려포통과 거의 유사한 무기이나 마름쇠가 들어있지 않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을 보면 질려포가 등장하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수군들도 이 질려포통을 사용했음이 확실하다.
4) 조선군의 냉병기
◆ 각궁의 특징과 조선시대 활의 분류 조선시대 전통활은 크게 각궁, 고궁, 정량궁, 예궁, 목궁, 죽궁, 철궁, 철태궁 등으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통 활인 각궁은 현대적인 분류법상 크기로는 단궁(短弓), 재료상으로는 합성궁, 형태상으로는 만궁(彎弓)에 속한다. 고궁, 정량궁, 예궁도 넓게 보면 각궁의 일종이다. 목궁, 죽궁, 철궁, 철태궁 등은 각궁과 전혀 다른 활이며 합성궁이 아니라 복합궁이나 단일궁에 속한다. (활의 분류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일본편 참조)
각궁은 전형적인 합성궁(Composite Bow)에 속하는 활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각궁은 대나무로 활채(활의 기본 몸통)를 만들고, 뽕나무로 활고자(활의 양쪽 끝에 꺽인 부분)를 붙인 다음, 여기에 다시 활채에 물소뿔을 가늘게 덧대고, 다시 참나무로 활채 가운데에 대림목을 만들어 붙이고, 마지막으로 소힘줄을 전체에 얇게 덧댄다. 마지막으로 벗나무 껍질을 붙인다. 이렇게 여러가지 재료를 복잡하게 배치해서, 활의 탄력이 매우 우수하여 크기가 작아도 사정거리가 길어지게 된다. 또한, 각궁은 활의 발사충격을 사람이 아닌 활 자체가 흡수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화살을 발사한 후 시위가 활고자에 부딪히면, 그 충격이 활의 중심인 활 줌통으로 파도치듯 밀려들어가다, 줌통에서 다시 고자쪽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파동이 치는 동안 활 안에서 충격을 모두 흡수한다. 각궁의 주재료인 물소뿔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았다. 당연히 물소뿔을 안정적으로 수입하는 일은 조선 왕조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물소뿔은 주로 동남아시아나 남중국에서 생산되고,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이 물소뿔을 수입했다. 물소뿔은 조선 왕조의 안보를 좌우하는 전략물자였던 셈인데, 이런 전략물자를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각궁의 제조비용도 높을 뿐더러 안정적인 공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국산 황소 뿔을 사용한 각궁도 제작했는데 이런 활은 향각궁(鄕角弓)이라고 부른다. 국산 황소 뿔은 물소뿔에 비해 짧기 때문에 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황소 뿔 세개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삼각궁(三角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황소뿔은 색깔이 희기 때문에 백각궁(白角弓)이라고도 부른다. 이에반해 각궁에서 사용하는 수입 물소뿔은 뿔이 검기 때문에 흑각궁(黑角弓)이라고도 부른다. 향각궁(삼각궁, 백각궁)은 각궁보다는 성능이 조금 떨어졌다고 한다. 일반 병사들의 경우 각궁은 커녕 향각궁도 사용하지 못했고 목궁이나 죽궁 같은 더 간단한 활을 사용했다. 뿔을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서 각궁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후궁 뿔끝까지만 뿔을 대는 각궁은 '휘궁'이라고 부르며, '도고자'까지 길게 뿔을 대는 각궁은 '장궁'이라고 부른다. '장궁'이 뿔을 많이 사용하므로 성능도 더 좋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 국산 소뿔을 쓰는 향각궁도 크게 보면 휘궁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활의 세기는 활을 당길 때 드는 힘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국궁 연구가인 정진명씨 같은 분은 '중힘'이 44~45파운드 활, '강궁'이 50~54파운드 활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실록에는 활의 세기에 따라 천,지,현,황자궁으로 나눈 예도 있는 것으로 보아 군대에서는 이런 분류법을 사용한 것 같다. 시위를 건 상태를 얹은 활이라고 부르고, 시위를 제거한 상태를 부린 활이라고 부른다. 각궁의 경우 부린 활 상태에서는 활이 180도 반대편으로 꺽이게 된다. ① 각궁 -각궁(角弓)은 물소뿔을 재료로 만든 조선의 대표적 주력 활이며, 조선시대 무장들의 기본 무기이다. ②고궁 - 고궁은 기병용 활이다. 별명이 '동개활'이고 고각궁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활 중에 가장 활이다. 기본적으로 각궁과 제조법이 동일하나 크기가 작다는 점이 다르다. 동개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화살은 '동개살'이라고 부른다. ③정량궁 - 정량궁(正兩宮)은 속칭 큰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육량궁(六兩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량궁도 넓게보면 각궁의 일종인데, 과거시험을 위해 특정 규격으로 만든 활이 정량궁이다. 제작방법은 각궁과 동일하나 일반적으로 쓰는 각궁보다는 더 크다. 정량궁은 길이가 5자 5치인데, 일반적인 각궁의 약 2배 길이이다. 과거시험의 무과 초시, 복시에서도 이 활을 사용했다. ④예궁 - 예궁(禮宮)은 이름 그대로 궁중에서 활쏘기 할 때 등 예식에 사용하는 활이다. 유교에서 유일하게 가치를 인정하는 무술이 활쏘기이다. 때문에 궁중에서도 활쏘기를 자주 했다. 그럴 때 쓰는 활이 예궁이다. 정량궁보다 크기가 조금 더 크다. 이 때문에 일명 대궁(大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⑤목궁 - 우리나라 목궁(木弓)에는 복합궁(Laminated Bow, Built Bow)에 속하는 것과, 단일궁(Self Bow, Simple Bow)에 속하는 것이 있다. 활채를 광대싸리로 만들고 활고자를 산뽕나무로 제작하는 활을 호궁(弧弓)이라고 하는데, 그냥 목궁이라고하면 보통 이 호궁을 의미한다. 이외에 떡깔나무로 활채를 만든 '경궁'도 목궁의 일종이다. 호궁이나 경궁은 단일궁이 아니라 복합궁에 속한다. 기타 실물 유물을 보면 여러가지 나무 종류로 만든 목궁이 발견되고 있다. 목궁 종류들은 각궁보다 제조 비용이 싸지만 성능은 떨어진다. 사병용 활로 사용되거나, 여름에 사용하는 보조 활로 활용되었다. ⑥죽궁 - 죽궁(竹弓)도 사병용 보조 활이다. 일명 '벙테기 활'이라고 불렀다. 죽궁은 1516년(중종 11년)에 병조판서 고형산이 만든 활이다.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 이슈였던 '활 재료 국산화'의 일환으로 개발된 활이다. 죽궁에도 복합궁에 속하는 것과 단일궁에 속하는 것이 있다. 단순히 대나무로만 만든 것도 있지만, 대나무에 힘줄을 덧댄 죽궁도 있다. ⑦철궁 -철궁(鐵弓)은 활 몸체 자체가 놋쇠로 된 활이다. ⑧철태궁 = 철태궁(鐵胎弓)은 기본적으로 각궁하고 제조법이 비슷한데 활의 몸체인 궁간을 쇠로 만든 것이다. 전쟁때와 수렵용으로 모두 썼다고 한다.
◆ 각궁의 제작방법과 활 부속 명칭 각궁의 한가운데 손으로 잡는 부분을 '줌통'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줌통은 종이를 감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줌통 위에 다시 씌운 껍데기를 '줌피'라고 하는데, 땀이 나도 미끄러지지 않게 삼베로 만들었다고 한다. 줌통의 내부 활 재질은 참나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참나무 대림목'이라고 부른다. 줌통 아래 위쪽 가장자리는 '아귀'라고 부르는데 줌통의 탄력을 보강하기 위해 벗나무를 대고 그 위를 힘줄로 감는다. 위쪽 아귀는 화살이 지나가는 자리인데, 화살이 지나가면서 활을 파손시키지 않도록 아귀 위에 가죽을 잘라서 입힌다. 이것을 '출전피(出箭皮)'라고 한다. 줌통 아래 위쪽으로 첫번째로 크게 굽는 부분이 '한오금'이고, 그 위가 '밭은오금', 아래가 '먼 오금'이다. 활을 당겼을때 가장 크게 굽는 부분이 바로 이 오금이므로, 이 부분의 탄력이 활의 성능을 상당부분 좌우한다. 오금 아래쪽이 '삼삼이'인데 이 부분에서 대나무와 뽕나무가 연결된다. 활 양쪽 끝의 구부러진 부분을 고자라고 하는데, 고자가 시작되는 부분이 '도고자'이고, 시위가 묶이는 고자의 끝부분이 '양냥고자'이다. 양냥고자 바깥에는 색종이 등을 붙여 장식하는데 이것을 '고자단장'이라고 한다. 시위에 화살을 매길 때는 시위의 중심부에 매는 것이 아니고 시위의 약간 위쪽에 맨다. 그 화살의 오늬를 매기는 부분을 절피라고한다. 삼삼이를 기준으로 활의 중심부는 대나무로 되어 있고, 아래 위 끝은 뽕나무로 되어 있다. 가운데 활채를 구성하는 대나무는 주로 전남 지방-특히 담양의 대나무를 많이 썼다고 한다. 뽕나무로 된 활 고자 부분을 궁간상 (弓幹桑)이라고도 한다. 뽕나무는 주로 자연산 산뽕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나무로 된 부분 반대편에 검은색으로 된 부분이 바로 소뿔이다. 뿔을 그대로 사용하는게 아니라 ?게 펴서 붙인다. 휘궁의 경우 삼삼이 아래쪽 후궁 뿔끝까지만 뿔을 붙이지만, 장궁의 경우 도고자 바로 위까지 뿔을 붙인다. 사진 속의 각궁은 도고자 위에 까지 뿔을 붙인 장궁이다. 대나무 위에는 다시 소힘줄을 얇게 붙인다. 그 위에 전체를 다시 화피(樺皮:벗나무 껍질)로 감싼다. 화피는 습기에 강하기 때문에 활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화피를 물속에서 삶으면 나무색깔(노란색)이 되고, 잿물 속에 삶으면 붉은 색이 되며, 햇볕에 몇달 동안 말리면 흰색이 된다. 각 재료를 붙일 때는 민어부레로 만든 자연산 접착제를 쓴다.
◆ 전통 활의 사격법 평소에는 활에 시위를 걸어놓지 않는다. 또한,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불에 쬐이거나 약간 온도가 높은 곳에 보관하여 활을 잘 말려야 하는데 이를 '점화'라고 환다. 필요할 때만 활에 시위를 거는데, 점화를 한 직후라면 30분 정도 활을 식혀야 한다. 시위를 걸때 활이 잘 펴지지 않으면 부분적으로 다시 약간 불에 쬐이기도 한다. 활을 사격할때는 왼손(쥠손)으로 활의 줌통을 잡는다. 줌통을 잡는 방식은 이른바 '흘려잡는 손'이라고 부르는데, 하삼지(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를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쥐는 방식이다. 줌통을 쥐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이 쥠법에 따라 사거리가 상당히 차이가 날 정도로 미묘한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한다. 오른손(깍지손)으로 화살 끝의 오늬를 잡는다. 오른손으로 쥐는 방법을 쥡법이라고하는데, 한국 전통 쥠법은 이른바 Monglian Release이다. 이 방식은 몽골, 투르크, 한국, 중국 등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손가락으로 오늬를 살짝 잡는 것이 아니라 손 전체(엄지,검지,중지)를 이용해서 비틀 듯이 오늬를 잡는다. 화살이 가장 강한 힘을 받을 수 있으려면 시위의 가운데에 화살을 매겨야 한다. 그러나, 시위의 가운데에 화살을 매길 경우, 양궁처럼 줌통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놓으면 문제가 없으나, 보통의 전통 활이라면 화살이 왼손으로 쥐고 있는 줌통 한가운데에 부딪히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화살은 시위의 가운데가 아니라 약간 위쪽으로 치우친 곳에 매긴다. 활을 사격할 때 몸과 발은 이른바 '비정비팔(非丁非八)' 자세로 사격한다. 이 비정비팔 자세는 몸을 약간 비스듬하게 서는 방식이다. 원래 말 위에서 사격할때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약간 비스듬하게 몸을 틀어야 하는데, 그 자세를 땅위로 옮겨놓으면 '비정비팔'자세가 된다. 왼발은 앞을 향하는데 표적의 약간 오른쪽을 향하게 된다. 왼쪽발은 표적을 정면으로 보게 되므로 丁자 모양이 되나, 정확하게 90도 각도가 아니고 오른쪽으로 약간 틀게 되므로 非丁이라고 한 것이다. 오른발은 왼발의 중앙에서 약간 대각선 방향으로 뒤쪽으로 놓아 두 발이 八모양으로 놓이게 한다. 그러나 역시 정확하게 八모양이 아니므로 非八이라고 한다. 시위를 최대한 당긴 상태를 만작(萬作)이라 하는데, 만작을 할때 화살이 얼굴 광대뼈 근처에 이를만큼 약간 위로 향한다. 시위를 당길 때는 오른손(깍지손)이 오른쪽 귀를 약간 스칠 정도로 당기며, 이때 동시에 숨을 들이 쉬어야 한다. 만작 상태에서는 눈은 표적을 보지만 화살 자체는 표적의 위를 향하게 된다. 실제 사격은 발시(發矢)라고 하는데, 발시할때는 약간 뒤로 몸이 밀렸다가 앞으로 향하면서 사격한다. 발시 때에는 오른손 (깍지손)의 손목으로 힘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중구미)에 힘을 걸어 팔꿈치를 약간 바깥쪽으로 조이는 상태에서, 서서히 오른손의 힘을 빼서 짧은 순간 가겹게 시위를 놓는다. 이때 화살이 밑으로 아주 조금 내려오면서 발사가 된다. 이렇게 발사 직전 약간 움직이면서 쏘는 것은 마상 사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상 사격에서는 말이 움직일 수 밖에 없으므로 말의 움직임에 따라 리듬에 맞춰 사격해야하는데, 땅위에서 사격할 때도 그 방식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만작 상태에서 조준이 끝나면 바로 쏘는 경우도 있고, 3초 정도 멈춘 후 쏘는 경우도 있는데 전투시에는 바로 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설명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며, 실제로는 훨씬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현재의 국궁 궁술에서는 조선시대 각궁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궁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요즈음의 국궁 궁술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법과는 약간식 차이가 있다. 필자도 연무정에서 개량 국궁을 한번 쏘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문헌에 소개된 전통 활 사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 편전 편전(片箭:애기살)은 화살의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통아를 이용하여 사격하는 특수한 사격방식을 의미한다. 통아는 절반으로 쪼개진 가는 대나무통인데, 이 통아 위에 작은 화살을 넣고 활로 쏘는 것이 편전이다. 중국에서는 일명 고려전(高麗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통아를 거쳐 화살이 발사되기에, 최초 발사당시 화살의 탄도가 안정이 되므로, 사정 거리가 크게 늘어나고 관통력도 좋아진다. 편전의 사거리는 일반 각궁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활과 통아를 동시에 쥐고 편전을 사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그 정확한 사격방법은 전승이 끊겨 전해오지 않는다. 현재 국궁인들이 편전사격법을 복원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그 복원 방식이 5~6가지로 나눠질 정도로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통아의 한쪽은 가늘고, 반대쪽은 굵으며 가는 쪽에는 줄이 붙어 있다. 기록상 확실히 전해 오는 것은 통아의 가는쪽에 매달린 줄을 왼손에 매단다는 것 뿐이다. 왼손은 활의 줌통을 쥐게 되어 있으므로, 왼손에 통아의 줄을 매달 경우 통아는 활의 줌통 옆에 바짝 붙게 된다. 현재 불확실한 것은 오른손으로 시위, 편전의 오늬, 통아를 어떻게 동시에 잡느냐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떻게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 조선시대 화살 종류 가는 화살촉을 가진 유엽전(柳葉箭)이 조선시대의 표준적인 화살촉이다. 일반적인 길이는 80~85cm 정도이다. 유엽전 중에서 조금 길게 만든 것이 장전이고, 작게 만든 것이 편전과 동개살이다. 아래 사진 속의 장전(長箭)은 유엽전과 비슷한 화살촉을 가지고 있으나, 삼각형 화살촉을 사용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편전(애기살)은 편전사격에 사용한다. 편전의 길이는 36~50cm 정도로 유엽전 길이의 절반 정도이다. 사진 속의 편전은 화살촉이 길게 만들어져 있는데 모든 편전이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니다. 동개살(대우전)은 동개활(고궁)에서 사용한다. 동개활은 작은 기병용 활이다. 이 때문에도 동개살도 유엽전보다는 다소 작다. 말 위에서 사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화살깃이 크다. 이 때문에 대우전(大羽)이라고 부른다. 철전(鐵箭)은 육량전, 아량전, 장전을 모두 포함한 조선시대 전투용 화살을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이나, 유엽전이 아닌 보통의 철제 삼각형 화살촉을 가진 화살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시(火矢)는 말그대로 불화살이다. 박두는 목전(木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촉이 나무로된 연습용 화살이다. 무촉전이란 것도 있는데 이 화살도 촉이 천뭉치로 되어있는 연습용 화살이다. 세전(細箭)은 전투시에 연략용으로 편지를 부착시켜 발사하는 화살이다. 신전(信箭)은 실전에서 사용하는 화살이 아니라 국왕의 명령 전달용으로 사용하는 의장물이다. 예전(禮箭)은 궁궐 내에서 의식용 활쏘기를 할 때 예궁에서 사용하는 화살이다. 주살, 동시, 노시는 모두 사냥에 쓰는 수렵용 화살이다. 특히, 주살은 화살을 찾기 쉽도록 화살에 끈이 매어져 있다.
◆ 창과 칼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무기 중에 창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막연하게나마 창이 일반 병사들의 주력 무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세종실록 오례서례와 국조오례서례의 군례(軍禮)에는 모, 극, 창(矛, 戟, 槍) 등 3가지 창이 등장한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보면 모(矛)는 구겸(낫 모양의 창)에 가깝고, 극(戟)은 삼지창 혹은 당파에 가깝다. 허술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유일한 조선시대 창 그림이다. 국조오례서례에서는 아래 창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이 곧 자루길이 10자(약 3m)의 '삭'이라고 설명해 놓았는데, '삭'은 기병용 장창을 의미한다. 경국대전을 보면 말 위에서 사용하는 기창(騎槍)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길이는 15자(약 4.5m)였다고 한다.
이 그림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창을 추정하는 것은 역부족이고, 어쩔 수 없이 조선 후기의 창 실물 유물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아래 세자루의 창은 육군박물관에 보관 중인 창인데, 창 자루가 완전히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실물 유물이다. (운현궁, 전쟁기념관 등에 보관 중인 창은 모두 복제품이다) 미국에 조선 말기에 사용하던 당파창 1자루가 남아있으나, 이것은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만들어진 당파창이다. 기창(旗槍)은 각종 깃발을 매는 창인데, 깃발을 매단다고 해서 반드시 의장용은 아니며, 실전에서 사용한다. 자루길이가 130cm으로, 창치고는 아주 짧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후기의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기창은 일명 단창(短槍)으로 부르며,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로보아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런 기창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 귤강광(橘康廣)이 "조선의 창자루가 심히 짧구나" 라고 비웃은 사건은 유명하다. 흔히,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당시 조선군의 무기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일본 창이 특별하게 긴 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귤강광(橘康廣)의 발언은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자루길이가 6m에 달하는 전국시대의 나게야리(長柄槍)에 익숙한 귤강광의 눈에는, 130cm 정도의 길이를 가진 조선 단창이 비정상적으로 짧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아래 제일 위쪽의 기창은 창 자루에 실이 감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창자루 중에는 합목(合木)으로 만든 창자루도 있다고하는데, 혹시 이 방식이 일본의 창자루 제조방식과 같은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일본편 참조) 제일 아래쪽은 창이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당파창이다.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나 사극에서는 조선군 일반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을 주로 당파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당파가 많이 쓰인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당파가 많이 쓰였을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당파를 많이 썼다는 명시적인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군들은 거대한 낫처럼 생긴 특수한 창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장병겸(長柄鎌)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나이까마(雉鎌)와 거의 유사한 무기이다. 위 갈고리 처럼 생긴 기구는 사조구(四爪鉤)인데, 적의 배에 던져 배를 끌어 당기거나 물에 빠진 적을 건져 올릴 때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칼은 주력무기로써의 역할을 한적이 없다. 조선 전기의 칼에는 환도, 별운검, 운검, 인검, 보검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실전용 칼은 오로지 환도(環刀) 뿐이다. 조선 전기의 환도는 후기의 환도에 비해서 비교적 짧았던 것 같다. 아래 칼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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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궁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허깨비
첫댓글 임진왜란때 조선군의 주요 무기들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자료입니다. 전쟁사쪽에 관심 조선에서의 임진왜란에 관심있으신분들께 참고가 되시길..
제가 입대전에 봤던 사이트에서의 글들이군요... 헌데 당시 조선 중기엔 무기로서 활 중 각궁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 또 당시 단병접전보다도 원거리전이 능했던 만큼 우리나라 주력 무기였던 활 중 그 대다수 병사들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었던 활과 화살, 그리고 그 운용방식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등등이 궁금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온 자료가 없더군요;; 안타깝..;
그런 기록자료는 보기 어렵죠. 저도 세부무기사용 기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만.. 중앙군이었던 조선후기 5군영에서의 추측자료만 볼수 있더군요.. 타인분이 정리하신.. 그외 지방군등이나 조선전기의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자료이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