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천하는 다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엇다.
거란은 6대 황제 성종(재위:983년-1032년) 야율융서 사후 7대 황제 흥종(재위:1032년-1057년) 야율종진과 8대 황제 도종(1057년-1101년) 야율홍기가 잇달아 즉위한다.
그러나 거란은 예전의 강대한 국력을 흥종 때까지 어느 정도 유지했으나 도종 때부터 내부 권력투쟁으로 인한 내부분열과 해,실위,습,돌궐,토욕혼,토번 등 주변 번국들의 잇다른 반란 등으로 내흥을 껵으며 차츰 멸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사란 것은 기울어가는 세력이 있으면 이에 반하여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세력이 있는 법이다.
거란족의 요(거란)이 기울어가자 새롭게 떠오른 세력은 여진족이다.
여진족은 빈해부,압록부,철려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총 81개 부족으로 나뉘어져 잇었고 이를 크게 다시 나누면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뉘어 거란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엇다.
숙여진은 거란의 지배를 따르는 편이었지만 생여진은 거란에 저항하는 따라서 거란의 입장으로서는 항상 두통거리같은 존재였다.
생여진에서 마침내 영웅이 나타나니 바로 아골타이다.
아골타는 여진 추장 영가와 오아속의 뒤를 이어 새롭게 생여진 추장이 된 인물로, "고려사"와 금나라의 역사를 적은 "금사"에 의하면 아골타는 고려인 김함보의 후손이라 적고 잇으니, 어찌 보면 발해 유민들과도 같은 동족이라 할수 있는 것이다.
아골타는 서기 1115년 금(金)나라를 건국하게 되며 거란의 요와 당당히 맞선다.
아골타는 영가,오아속의 뒤를 이어 여진족을 지도하며 빠른 시일내 81개의 여진 제부족을 통합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엿던 것이다.
이 시기 대진국 유민들도 거란의 요에 맞서 일어났으니 바로 고욕의 대발해국과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영창의 대원국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거란은 마지막 황제이자 9대 황제 천조제(재위:1100년-1125년) 야율연희의 시대였다.
기록에 따르면 천조제 야율연희는 음탕하고 사나워 군주의 자질이 없었다고 햇는데 이는 좀 더 살펴볼 문제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1115년 거란의 상경 임황부 관할 지역인 요주에서 대진국 유민 고욕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침내 일어난다.
이 때는 아골타의 금나라가 막 세워지기 전으로 어쩌면 고욕으로는 불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욕은 1115년 요주에서 나라를 세우니 바로 대발해국이다.
혹은 고욕국이라 한다.
거란은 1115년 3월 소사불류에 군사를 주어 고욕을 공격하게 하나 오히려 고욕은 소사불류의 거란군을 격파하고 군세를 크게 확장시켯다.
1115년 4월 소사불류는 또다시 고욕을 공격하나 또다시 패한다.
소도소알 역시 두 차례 고욕을 공격하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패한채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1115년 6월 고욕은 잇따른 승리로 사기가 높아 있었다.
마침내 장락현,안민현,임하현 심주 3개현을 장악하고 거란의 황도 상경임황부를 공격하려는 게획을 세웠으나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사로잡혀 고욕은 마침내 처형된다.
이로써 고욕국은 4개월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 다른 견해가 잇어 소개한다.
고욕국과 대발해국은 다른 나라라는 견해이다.
즉 고욕국과 고영창의 대원국,대발해국 3개국이 금나라와 공존하고 잇다는 설도 있다.
향후 이부분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고욕국은 멸망하고 말앗고, 이 시기를 전후해 금나라가 건국된다.
그러나 대진국 유민들의 혼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줄기찬 투쟁을 계속 이어간다.
1115년 거란 요양성의 발해무용마군 장수로 잇던 고영창은 동경 유수 소보선을 제거한다.
이에 당황한 호부사 대공정이 부유수 고청명과 같이 요양성의 대진국 유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고영창은 복수를 다짐한다.
마침내 고영창은 대공정과 고청명의 군대를 격파하고 요양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니 바로 국호를 대원국,연호를 응순이라 하며 대진국 유민의 기상을 보인다.
거란은 소을설,고광순 등을 보내 투항을 종용하나 오히려 이들을 추방해버리고,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거란에서는 재상 장림을 심주로 보내 대원국을 공격하게 한다.
거란과 대원국은 10여일간 30여차례나 전투를 치르며 양군의 피해 또한 늘어간다.
그러나 거란군이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대원국과 거란은 태자하 전투를 치루는 등, 혼전에 혼전을 거듭게 되는 것이다.
고영창은 금나라의 아골타에 사신 달불야를 보내 제휴할 것을 제안하나, 금나라는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금나라 역시 대원국과 전쟁을 선포한다.
고영창은 금나라의 사신을 아무 말 없이 돌려보낸 뒤, 금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정면대결의 길을 선택한다.
금나라는 1115년 여름 거란과의 전쟁에서 거란의 6만 군사를 이통하의 조산성에서 몰살시킨뒤, 심주성을 지키던 거란군 대장 장림의 군사마저 격파한다.
장림은 금나라군의 대공세에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 수백명만을 거느리고 겨우 요주로 탈출한다.
이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자모,적고내 등의 15개 여진부대를 거느리고 알로,아흑마,점몰갈,올구 등 금나라의 여러 기라성같은 쟁쟁한 맹장들을 거느리고 거란에 대한 총공세에 들어가며 거란의 정복을 눈 앞에 두게 된다.
이에 당황한 대원국의 고영창은 달불야를 파견해 금을 칭찬하고, 금과 대원국의 우호증대를 다지는 한편,대진국 유민의 송환을 요청한다.
금에서는 약사노와 알로를 동경성으로 보내 공격을 명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아흑마,점몰갈,올구 등 여러 기라성 같은 장수들과 일단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이 때 눈에 뛰는 인물로는 발해 유민의 후손 양박과 왕정,장호 형제 등이 아골타의 측근으로 활동으로 활동하고 있엇다는 점이다.
즉 금나라에서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마찬가지로 발해 유민들을 중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금 태조 아골타가 금 나라를 건국하면서 한 말에도 잘 드러난다.
"여진과 발해는 본디 한 집안이다. 여진족들이여, 발해인들을 차별하지 마라."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고영창은 부장 탁자를 보내어 금나라를 충성을 맹세하나 고영창의 또다른 부장 고정이 금나라에 투항한뒤, 고영창이 위계를 썻다며 고영창이 금에 투항한 것은 거짓이라 말한다.
고영창은 금나라 사신(어떤 기록에는 호사보라 함.)을 죽인 뒤 활리활수에서 대원국과 금나라는 대규모 전투를 치르고 금나라는 여기에서 대원국을 격파한뒤 대원국의 황도 요양성을 공격한다.
대원국군은 수산에서 금나라와 혈전을 벌이나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요양성에 돌아온다.
그러나 요양성을 지키던 장군 장현소가 금나라에 투항을 하는 바람에 고영창은 장송도로 도주한다.
그러나 이것이 고영창의 마지막이었다.
대원국의 부장 은승노와 선가 두 사람은 고영창의 처자를 압송하여 금에 투항해고, 또다른 부장 달불야와 노극충은 대원국 황제 고영창과 탁자를 금에 붙잡아 보내니, 금은 고영창과 탁자 등을 처형에 처한다.
그리고 은승노와 선가,달불야,노극충,장현소,고정 등 투항한 대원국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린다.
이 때가 1115년 9월의 일이다.
이로써 대원국은 건국 5개월만에 내부분열과 금의 급침으로 멸망하고 말앗다.
어쩌면 고욕과 고영창 두 사람은 시운을 잘못 타고난 영웅이라 할수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불운한 영웅들로 볼수 있을 것이다.
당시 거란족의 요 제국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골타가 건설한 금 제국의 급성장이 있었으니 시운이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로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겨루게 된 이 대결은 이제 금나라와 요나라만이 남게 되었고 두 나라는 물러설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금나라와 요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이자 적통임을 자처했고, 또 동이족의 지파인 국가들이다.
금나라와 요나라, 이 두 국가의 대결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여진족들에는 엤부터 이런 속담이 전해진다.
"여진인 1만이 차면 대적하지 말라..."
이 속담을 거란인들은 어느 정도 믿고 있엇는지, 잘 알수 없지만 거란족은 발해 후국들과 더불어 여진족을 어느 정도 견제한 점에서 나온 속담이라 생각된다.
대진국 부흥운동은 이로서 막을 내렷지만 대진국 유민들의 혼과 그 정신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대진국이여.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고, 알수 없는 것이다.
대원국의 멸망으로 완전히 막을 내릴줄 알았던 발해 부흥운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새롭게 이어진다.
첫댓글 은거야인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읽기 편하게 띄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