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1954
발산(發散)
나는 항상 같은 과정을 밟아 왔고 또 일정한 시간을 내 나름대로 보내 왔다. 다시 말해서 그림으로 지내 왔다고 할 수 있다. 모두들 나를 보고 변동 있는 생활, 고집 있는 생활, 또는 괴이하고 이단적인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내 자신의 생활에서 오는 제삼자의 말인 모양이다.
들 1954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자기 생활 중에서도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극을 꾀하고 또한 변화를 가지려 한다. 언제나 정돈 상태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며 자기 나름의 아이디어를 갖게 마련이다. 즉 계속적인 정지 상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활의 변화를 모색하는 한 방편으로 산보를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운동을 즐기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주로 발산의 형태로 바꾸어진다. 제작이라는 행위에 있어 그렇고 생활 자체에 있어서도 그렇다. 발산에는 양식도 없고 규칙도 없어 그때그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잠잠할 때가 있는가 하면 격동으로 치달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언제나 자기를 곧 찾고 만다.
연동 풍경 1955
수복 직후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계엄하라 통금으로 발이 묶여 무료하던 중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떠들다 도가 넘치도록 마셨다. 취한 김에 창가에 오똑 올라 앉아 보니 캄캄한 중에도 바깥쪽이 환한 것이 꼭 침대 같이만 보여 그냥 눕고 말았다. 취중에도 다리가 스르르 내려가는 것 같더니 쾅하고 둔하게 부딪는 감이 들어 놀라 잠이 깨었다. 이층 창가에 앉았다가 뒤로 떨어진 것이다. 친구들이 당황해서 의사를 불러 왔으나 멀쩡한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어 하며 자살할 우려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르는 걸 들으며 혼자 웃은 일이 있다.
후일 공초 오 선생님이 듣고 “무의식 상태에서 떨어지면 다치지를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러한 무의식의 행위를 이 외부에서 받아들일 때 괴이하게 보이는 모양이며 이질적으로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자신은 평범하게 그림생활을 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1969. 5. 24. 동아일보>
자전거가 있는 풍경
모기장 1956
죄가 있다면
다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 보니 별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기 마련이다. 언제인가 내가 서울대 미대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니 한 10여 년 전 이야긴가 보다. 졸업생 가운데 특히 나를 따르던 G군이 충남 모 중고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지 몇 달 안 돼서 꼭 좀 다녀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대견한 모습도 볼 겸 여행가는 길에 들렀었다. 객지에서 모교 선생을 맞는 기쁨이 마냥 즐겁기 만한 것 같았다. 온 김에 강습도 받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어 교장에게 소개를 한다, 법석이다.
풍경 1956
교장이 손수 교내를 두루 안내하여 다니는데 돌연 어떤 수위인 듯싶은 늙수그레한 할아버지 한 분이 급히 쫓아오며 “여보슈 그 슬리퍼 벗어 놓으슈” 하는 것이 아닌가. 돌아다보니 헌 슬리퍼를 들고 나더러 내가 신고 있는 새 슬리퍼를 벗으라는 것이다. 곧 그의 요구대로 새 슬리퍼를 벗어 주고 헌 슬리퍼를 바꾸어 신으며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있노라니 교장은 내가 보기에도 딱하도록 당황해서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내 졸업생은 졸업생대로 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 대학 은사님이유” 하고 민망해한다. 그 말을 들은 수위 할아버지 “아이고 내가 실수를 했군요. 난 새로 온 소사인 줄 알았네” 하며 허겁지겁 줄행랑을 놓는 것이었다. 거기에 있던 교장이나 나나 졸업생이나 한동안 몸 둘 곳을 몰랐다.
가로수 1957
오직 죄가 있다면 나의 지나치게 소탈한 옷차림에 있었으니 오히려 그 노인에게 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본래 옷에 대한 관심이 없다 보니 양복점에 가서 옷 맞추는 일이 극히 드물다. 몸을 가로 재고 가봉을 하고 하는 번잡한 과정이 생략되고, 언제 어디서도 마음에 드는 옷을 손쉽게 사서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을 즐겨 입는다. 몸에 착 붙게 하기 위해 몇 고비의 귀찮은 과정을 겪어 쪽 빼고 나면 그 옷이 구겨질까 더러워질까 온 신경이 옷에 매달리는 괴로움을 느껴야 하니, 내 취미대로 마음 편한 옷을 사 입을 수밖에. 나를 따르는 젊은 친구들은 입을 모아 멋장이라고 하건만 일반 사람들은 이상하게만 보는 모양이니 딱하기만 하다. <1969. 4. 24. 동아일보>
나무와 새 1957
새벽의 세계
나의 지나간 40여 년은 오직 그림과 술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면 몇 달이고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게 내 습성이다.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새와 나무 1961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12년 전부터 아예 서울을 버리고 이곳 한강이 문턱으로 흐르는 덕소(德沼)에 화실을 잡았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덕소의 비를, 덕소의 달을, 덕소의 바람을,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 준다. 그만큼 나는 덕소를 사랑한다. 새벽 2시건 3시건 눈만 뜨면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어떤 때는 샛별이 보일 때까지도 혼자서 쏘다닌다. 그건 서성이는 것도 아니며 더욱 무얼 찾는 것도 아니다. 새벽을 사랑하고 새벽을 느끼고 새벽이 곧 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새벽 산책으로부터 돌아와 화폭과 마주하면 거기 도 하나의 세계가 형성된다. 나는 그것을 추구하여 이룩해 가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이렇게 새벽으로부터 출발한다.
해아 달 1962
내 일은 언제나 내가 해야 한다. 가족이라도 누가 옆에서 거들어주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을 혼자서 자취를 한다. 아내는 그런 나를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나들이를 한다. 밥을 손수 지어 먹으며 부엌 벽이건 어디건 공간만 있으면 그림을 그리는 재미, 말하자면 그만큼이 나의 생활의 재미다. 그러나 나는 또한 누구보다도 나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그림을 통해서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과 다를 뿐.
나무 아래 아이 1964
철저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철저하게 사물을 보는 눈, 철저한 작업, 철저한 자유……. 나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유달리 새벽이 나의 생활세계이고, 술이 휴식이고, 내 몸을 위해 좋다고 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업건만 나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뜻대로 산다는 것은 그대로 하늘의 뜻이기도 하단 말인가. 나는 직관을 믿는다. 무엇이든 더불어 오래 사고하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가족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맨발인 그대로 혜화동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곳 덕소에 화실을 잡은 것도 직관에 의해서였다. 남이 어지 생각하든 그런 건 상관없다.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기에 나를 철저히 소모시키는 작업에만 흥미가 있을 뿐이다.
앞뜰 1969
이곳 덕소에 자리 잡은 지 12년이 됐어도 나는 아직 집 앞을 흐르는 한강물에 발 한 번 담가본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 이발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것이나, 한 벌 이상의 양복이나 넥타이를 준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 신앙과 같은 천성의 소치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 <1974. 9. 샘터>
흰 집 1969
마을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나의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두 사람
옛말이지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모던한 말이 있다. 꼭 들어맞는다. 그림과 술로 고생하는 나나 그런 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내 처나 모두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그래도 좋은데 어떻거나.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 한다.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다 써버려야지. 술? 난 거의 덕소의 화실에 있다. 시내로 나오면 어지러워서 술을 안 먹을 수 없다. 술 먹는 것도 황송(?)한데 밥을 어떻게 먹으며, 안주는 미안해서 더욱 안 먹는다. 교만하게 반주 따위도 안 한다. 술의 청탁도 가리면 뭘하나? 요새 술이 나빠졌지만 어떻게 하나. 참아야지. 남들은 일하고 여가를 등산이나 낚시로 보내지만 나는 술로 보낸다.
가족 1973
그저 그림 그리는 죄밖에 없다. 그림처럼 정확한 내가 없다. 난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림처럼 정확한 놈이 없다. 내년 봄에 전시회를 약속했더니 그림을 통 못 그리겠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면 짐스러워지고 그게 꼭 그림에 나타난단 말이야. <1973. 12. 8. 조선일보>
부엌 1973
酒道 40년
술 이야기? 쑥스럽다. 술은 그저 마시는 것이지 평하는 것이 아니다. 술 마시면서 술 얘기하는 것은 더욱 질색이다. 왜 마시는가 하며 술과 자신을 얼버무려 가면서 말하는 것도 주정꾼에게는 더없이 쑥스러울 게다. 그러니 지난 술의 행각을 더듬어 보는 것만도 충분히 어색한 것이다. 폭음(暴飮)! 폭주(暴酒)! 벌써 40년의 주납(酒納)을 쌓고 있다. 담담한 세월이었다. 남들이 시끄럽다고 어지럽다고 해도 그저 나에게는 조용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남에게의 시끄러움과 나에게로의 조용함의 궤도가 40년의 술의 행각에 평행선을 그렸다고나 할까? 주도(酒道) 그것은 아마도 삶의 길만큼이나 나에게는 어려웠던 것이다.
마루 1974
(…) 부시시 눈을 붙이고 난 새벽이면 광복동 뒤쪽의 용두산을 향하곤 했다. 으레껏 한 되의 소주를 친구처럼 동반시키곤 했다. 취가 온몸을 돌기 시작하면 나대로의 방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고 그래서 판자집 골목은 발자국으로 때 묻기 마련이었다. 판자집들이 즐비하고 자동차 자전거가 오가고 무엇인가 팔려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그리고 그 속에 내가 미친 듯이 다니고……. 친구들이 섞이고 술과 함께 말이다. 심심해서 아니고, 전쟁을 핑계 삼아 마시고,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그것이 제일 단조로워 좋았다. 안주는 오히려 술맛을 덜어버린다. 소금이나 있으면 충분하다. 들락날락 잠시라도 방에 머물기는 차츰 생리에 맞지 않아졌고, 그래서 들락날락이 시작되면 그것은 술의 들락날락을 뜻하게 되고 집식구들의 표정이 들락날락하면 곧 그것은 침묵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 들락날락의 버릇은 지금까지 간직해 온 또 하나의 사재(私財)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덕분에 어떤 딸내미는 “아버지가 지금 들락야 날락야?” “아버지 들락야” 하는 표현을 내가 폭주하는 동안 즐기게 되었다.
어미소 1973
(…) 또다시 나를 폭주가로 만드는 좋은 기회를 맞았다. 서울 환도에 이어진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통금까지 마시고 떠들어대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고, 통금이 지난 주위를 시끄럽게 하는 모든 일들에 무조건 부딪쳐 보는 것이 나의 새로운 주벽이었다. (…) 이러한 환경은 집사람으로 하여금 조그만 책사(冊舍)를 꾸며 장사의 길을 택하게 하였고 그것은 나에게 술 행각의 호기회를 미안스럽게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술 행각의 도움을 준 집사람의 힘은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열 보름씩 밥알 한 톨 없이 부어대는 폭주의 발전조차 있게 되었다. 대학에서의 월급봉투는 집사람의 조그마한 선물 값을 치르면 하루를 더 지탱하기 어렵게 된다. 어쩔 수 없었던 외상술 어디서나 잘 주고 또한 잘 갚았다. 빚을 갚고 얻어 마시는 한 잔의 술은 즐겁기만 하였다. 돌아설 때의 기분은 그지없이 흐뭇하였다. 이러한 흐뭇함은 그림의 아이디어와 함께 영원한 동반자로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다.
길 1975
무엇이든지 끝을 보고서야 시원해지는 것이 나의 벽이다. 미적지근한 술은 흥미 없다. 막걸리가 좋고 소주 고량주는 더욱 좋다. 가족들도 괴롭고 술집 주인도 괴롭고 나 역시 고되다. 이 괴로움과 고역은 최후의 남은 기력마저 불태우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스스로를 놓이게 할 때, 더 이상은 들어갈 수도 없고 지탱할 수도 없을 대 KO가 되면서 완전 휴식의 며칠을 가지게 된다.
초당 1975
대학에서 떠난 1960년대의 10년간 무참히도 마시면서 주기적인 듯이 술의 행각은 계속되었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맨발의 고무신을 끌면서 번화가를 유유히 걷기도 하였다. 딸들이나 나나 부끄러움 없이 날아다녔던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던 일이다. <일>’, 10년간 너무나 적었던 그림의 양이지만, 아끼는 사람들에게 넘겨져 있는 것은 오히려 흐뭇하기 만한 조각들이다. 덕소(德沼)의 공부방은 고요하기도 하다. 부지런히 캔버스를 마쳐야지. 끝나는 대로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뛰어가야지, 그리고는 꼭 한 잔의 술을 집사람한테 받아야지. 정말로 주정(酒酊)에서 주도(酒道)를 알게 되는 일은 삶의 길만큼이나 어려운가 보다. <1973. 8 여성동아>
가족 1976
길에서 1977
원두막과 정자 1977
장욱진은 1918년 충남 연기 시골마을에서 나서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으며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습니다. 중앙박물관 직원(45-47), 서울대 미대 교수(54-60)로 생애를 통해 두 번 직장생활을 한 것을 제하고는 그림 그리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덕소 시대(63-75), 수안보 시대(80-85)를 거쳐 만년에는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에 고택을 수리해 거처하다 1990년 타계하였습니다.
풍경 1977
글 ‘마을’에서 장욱진은 “그저 그림 그리는 죄밖에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 말은 그림 밖의 것, 그러니까 생활은 모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생활을 모르는 죄 때문에 그는 때때로 자의식의 분열을 일으킵니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에서 몇몇 천재들에게서 보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장욱진과 동년배 이중섭은 그림을 그린다는 지나친 죄책감 때문에 자기 분열을 일으켰고, 박수근 또한 늘 이런 자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생활에 패배한 이들의 그림에 대한 몰입은, 다른 면으로 해석한다면 자기 예술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시대적인 미감각(美感覺)을 등진, 이채로운 존재로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동산 1978
장욱진의 일관된 테마는 일상적인 자연입니다. 50년대 초 <나루터> <自像> <가족도> <모기장> 같은 농촌 배경 작품에서부터 50년대 후반 <자동차가 있는 풍경> <자전거 있는 풍경>의 도시 배경 작품, 그리고 60년대 <마을>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재는 자연주의적 특성을 짙게 지니고 있습니다.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만 보아도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한 것들입니다. 까치, 초가, 강아지, 아이들, 나무, 달, 새, 물고기, 소, 닭, 기러기 등 그가 언제나 만나는 일상의 자연이 전부를 이룹니다. 그러나 장욱진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특성은 자연을 소박하게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사실적(寫實的)인 자연주의라기보다는 우화성(寓話性)이 담긴 풍류적인 자연주의라 하겠습니다.
마을 1978
마을 노인 1978
장욱진의 화면 속엔 해와 달로 표상되는 시간이 들어와 있고, 하늘가로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로 표상되는 계절이 들어와 있으며, 마을의 집과 정자와 나무로서 표상되는 공간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표출해 내는 정서는 가히 풍류적인 자연 경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수하(樹下)에 누워 나뭇가지에 걸린 낮달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있는 한국적 풍류를 읽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1978
70년대 들어와서 장욱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부피가 없는 형태, 단순히 선으로 암시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선과 색은 더욱 절제되고, 공간은 더욱 종적(縱的) 깊이를 더해 줍니다. 시인이 언어를 절제하듯 선이나 색을 절제하고 있습니다.
소와 나무 1978
풍경 1978
나무 밑 1983
풍경 1986
까치와 아낙네 1987
풍경 1988
마치 고구려 금동불이나 백제 불상을 연상시키는 <진진묘>는 풍경 배경이 없는 드문 작품으로 장욱진 화백이 불경 공부를 하던 부인 이순경 여사(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장녀)를 그린 것이라 합니다. 장욱진 화백은 소년 시절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주석하시던 만공(滿空) 선사 아래서 정양하였으며, 1977년 경남 양산 통도사의 경봉(鏡峰) 선사로부터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받고 선불교를 현창하는 목판화를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진묘(眞眞妙)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