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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한 잡상
원한의 거리 추천 1 조회 683 15.02.26 20:16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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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2.26 22:46

    첫댓글 경기의 옛 마한 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왜 중국측에서는 동일한 집단으로 파악했는지도 고민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5.02.26 22:57

    사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한강 이북 쪽이 상당기간 마한과는 큰 관련이 없는 문화적 공백기였던 것으로 보이고, 실상 마한 일대의 청동기 문화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주로 형성된 것을 보면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특히 한강 중하류 일대에서 한동안 토광묘문화가 나타나다가 2~3세기를 즈음해서 백제 건국세력의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계통의 기단식적석총이 등장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일이지요.

  • 15.02.26 23:03

    한강 중하류 유역의 중도유형문화를 동예로 비정하면서 그 기원을 두만강 하류 지역의 옥저 문화권과 연결짓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분명 마한의 일부는 한이 아니라 예족 집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텐데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예, 맥, 한을 나누었는지도 궁금하네요. (그렇게치자면 마한, 진한, 변한을 나누는 기준도 알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 15.02.27 09:01

    안녕하세요. 윗글의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봅니다.
    첫째, 사료에서 ① ③과 ②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같은 사건으로 보고 사료를 해석하고 있군요.

  • 15.02.27 09:27

    ②는 경초 연간(237~239)에 일어난 사건으로, 위나라가 공손연을 정벌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공손연은 낙랑군 대방군 현토군 요동군 등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입니다. 처음 237년경 관구검이 요수를 건너 공손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공손연 세력의 허리를 짜르기 위하여 수군을 보내어 하북성 영정하 이남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중달이 서기 238년 육군을 거느리고 요수(현 하북성 조백신하)를 건너 공손연을 토벌하고 결국 낙랑군 대방군 현토군 요동군 등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 15.02.27 09:15

    ① ③은 공손연 토벌시 고구려도 위나라와 같이 출전하였는데, 위나라가 공손연의 땅을 모두 차지해 버립니다. 이에 고구려가 242년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치하였고, 246년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②번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대방태수 궁준은 ②번 사건에서 전사하였습니다. ③의 기록의 삭방태수 왕준이 대방태수 궁준의 오기라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지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5.02.27 12:24

    결국은 낙랑군이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점에 전제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계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만 낙랑군에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이야기하시니 굉장히 의도적인 회피라는 느낌이 들 수 밖에는 없군요. 또한 말씀하신 글은 이미 다른 모 까페의 논쟁으로 보건데 그리 신빙성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수고스럽게 답글남겨주신점은 감사합니다.

  • 작성자 15.02.27 13:22

    낙랑목간은 낙랑군의 모든 현의 인구가 기록된 상당히 중요한 문서인데, 그것이 교류에 의해 옮겨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봉니나 와당 등을 제외하더라도, 전실묘 등에서는 낙랑군현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전이 발견된 바 있고, 낙랑군 부조현의 이름이 새겨진 부조예군은인 등도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낙랑군과 관련된 유물은 거의 모두가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를 옮겨졌다고 말씀하고 싶으시다면, 우선 중국 쪽에서 낙랑군에 관련된 유물이 얼마나 많이 출토되었는가를 고려해야 하실 줄로 압니다.

  • 작성자 15.02.27 16:17

    1. 그러면 한반도 서북부 일대를 제외한 곳에서 낙랑군 유적이 발견된 예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곳 외에는 유물이 나온 예가 없고, 삼국지 동이전 등의 기록에서도 낙랑군이 동해안을 끼고 있던 옥저와 동예 일대에 영향을 끼친 사례가 명백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2. 그것은 기록 자체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즉, 낙랑군 수성현의 이름과 장성이 세워진 수성현은 이름만 같은 서로 다른 지역이었는데, 후대의 착오로 낙랑군 수성현에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오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고학적 근고로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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