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이 차이가 퍽 나는 사회 선배들을 만났다. 조언을 듣고자 만남을 청했는데, 웬걸 그들이 내 이야기를 몹시 경청했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덜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보다 일을 직접 실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내게 어떤 선택 권한이 있을 때 나만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주 따져 본다.
행간을 읽는 사람이 있다. 단어보다 쉼표를 눈여겨 읽는 사람이 있다. 말보다 표정을 먼저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 말하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 그들을 만날 때 나는 마음이 쾌청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말하는 걸 듣는 건 수비만 하는 것”이라며 “고통은 침묵으로 표현될 때가 많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가 갈수록 정신과, 심리상담소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말을 안 들어 주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친구들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는 세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은 과연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언젠가 화법 전문가에게 대화의 기술을 딱 하나만 알려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잘 말하려고 하기 전에 그냥 들으세요. 그게 첫째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이야기로 들렸다.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 중-
첫댓글 말은 하는 것 보다 들어주는 게 훨씬 힘들다고 해요. 그만큼 듣는 걸 못 하니 그러겠지요. 요즘들어서는 더 안 되는 일중 하나인 듯 해요. 노력해야겠어요...
듣질 못하는 제 못된 습관입니다
고치겠습니다.
들어주는 耳順이 왜그리
어려운지 제 수행이 부족합니다
다시 깨우침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