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가?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자리는 한자로 위(位)라 한다. 이 한자를 파자하면 상당히 흥미롭다. 사람과 서 있다는 글자가 합해졌으니, 먼저 사람 옆에 서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그 사람은 돈과 권력 있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 사람 옆에 설 때 비로소 얻는 지위가 있기 마련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의 한 유형으로 전문가주의를 꼽았다. “생계를 위한 어떤 일을 하는 지식인의 활동”을 뜻하는데 “후원세력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를 향한,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낳는 여러 자격들과 특혜, 그런 권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고용되는 것을 향한 불가피한 움직임”이라 했으니, 딱 맞춤한 사례다.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선 자리에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자리에 서 있을 제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를 벗하려 하고 세상에 쓰려고 한다. 유가에서 말한 지식인의 참모습이다. 결코 쉬운 삶이 아니다. 공자가 서른에 이립했으면서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답다 한 이유다. 제갈공명을 떠올리면 되겠다.
김승섭은 특정 사회집단의 건강상태를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다. 그런데 그가 연구대상으로 하는 집단은 그야말로 특정되어 있다. 전작인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잘 알 수 있듯 소방공무원, 쌍용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성소수자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들어가는 집단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상처를 입었지만, 사회가 그들의 삶과 건강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들이 얼마나, 어떻게, 왜 아픈지 조사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이른바 트라우마를 겪는 이가 주변에 있다면 보듬고 안아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을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바로 이 현실에 맞서 그들이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번 책은 우리 몸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이 어떻게 발생했고, 그것이 과연 올바른가를 문제 삼는다. 사무실 적정온도는 21도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기준이 1960년대에 몸무게 70㎏인 40세의 성인남성을 표준신체로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미국 식약청은 불면증 치료제인 졸피뎀의 처방용량을 반으로 줄이라고 권고했다. 기존의 10㎎을 먹으면 15% 정도의 여성에게는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의 약이 혈액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3% 정도였다. 여성을 배제한 의학연구의 한 상징이다.
유전인가, 환경인가로 논쟁할 적에 참고할 만한 자료도 나온다. 사회배경이 다양한 영·유아 77명의 대뇌 회백질 면적을 조사했다. 이 기관은 정보처리와 의사결정을 담당하는지라 학습능력을 짐작하기에 적절하다. 조사결과 태어났을 때는 면적에 차이가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큰 차이를 보였다. 당연히 소득수준이 높은 부모를 둔 영·유아의 것이 컸다. 역시 학습능력과 관련해 중요한 기관인 해마도 사회환경에 따라 크기가 달라졌다. 경제적인 궁핍과 일상적인 폭력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증가시켜 해마의 세포를 변형한다. 게으르고 불성실해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가난해서 못한다는 말이다.
얼핏 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 조사결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여성과 부유한 여성 가운데 누가 더 유방암에 많이 걸릴까?라고 묻는다면, 가난한 여성이라 답하기 쉽다. 하지만 조사결과는 다르다. 부유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데, 미국, 캐나다, 영국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다르게 질문해보자. 어느 쪽이 유방암 때문에 사망하는 비율이 높을까?라고. 교육수준이 낮은 저소득층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궁금할 터. 유방암 1기의 사망 가능성이 1%라면, 4기는 78%다. 그만큼 조기진단이 중요한데, 소득 상위 20%인 여성 100명이 검진받을 때, 하위 20% 여성은 79명만이 검진을 받았다. 부유한 여성이 출산시기가 늦거나 호르몬 보충제 때문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을 수도 있지만, 조기 검진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 발병률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된 면도 있다. 하지만 가난한 여성은 조기 검진 기회를 놓쳐 결국 더 많이 사망했다.
그는 왜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발병원인에서 사회환경의 비중이 높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짐작하듯 유전적 영향이나 개인의 생활습관도 발병의 한 요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지배적일 때, 암 발생 위험을 증가시키는 사회적 원인은 방치되기 때문”이란다. 가만히 책을 살펴보니, 그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게 되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지 않고 ~하는 것은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듯싶다.
그의 책을 덮으며 위의 뜻을 다시 새겼다. 본디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자리에 서 있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겼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그가 일깨워주었다.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자리에 있는, 지식인이 찾아가야 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차별받고 상처받고 소외된 무리의 곁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목청껏 외치지 못한 서러움과 아픔을 대신 말해주어야 한다. 아마 그 자리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또 다른 지식인, 즉 아마추어주의와 맥을 같이할 성싶다. “이익이나 이기심, 편협한 전문화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하는 행위”로 “실천적으로 토론을 제기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논쟁을 유발”하는 지식인이라 했으니 말이다.
그는 이번 책을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며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의 다짐을 응원하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되살펴본다.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를 읽었다. 서사를 진행 할 때 구성할 때 시도한 독특한 문학적 장치에 빠져들었다. 사계절의 병풍, 법사의 행동 , 사과, 달빛 등이 너무나 강렬한 문학적 장치다. 한 번 더 조용하게 읽고 싶다. 스토리야 뻔한 것 같지만 소설을 이렇게 시적으로 쓴다고 해보자 쉽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평가 신형철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읽으면 정신이 타고, 마류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고 표현할 정도였으니까.
이 작가는 1945년에 출생하여 1966년 <여름의 흐름>으로 <문학계>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작품으로 야쿠다가상을 거머쥐었다. 대표작품으로 <물의 가족>, <어두운 여울의 빛남>, <붉은 눈>, <화산의 노래> 등이 있다.
< 달에 울다>는 중편적 분량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병풍에 그려진 사계의 그림을 비유하여 각 장에 어울리는 말머리를 토대로, 인생의 봄(십대), 여름(이십대) 가을(삼십대), 겨울(사십대)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지만 전부다 사랑했던 여자 '야에코'를 축(軸)으로 하는 것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도시와 꽤 떨어져 있는 곳이고 사과밭이 있는 마을이다. 사과밭은 병풍을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물의 상상 속에도 있다. 이 이야기는 주인물의 예리한 상상력을 통해 전개되는 형식이다.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열 살 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소설이 시작된다. 어느 날 마을사람들은 면장네 집의 토광을 털려고 했던 야에코의 아버지를 추적한다. 그때 내 아버지는 비린내나는 생선 껍질 옷을 입고 광적으로 앞장섰다. 야에코의 아버지는 그 날 살해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쉬쉬했다. 나는 야에코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다.
여기에서 줄곧 언급되고 있는 법사의 존재는 누구일까? 이는 아마 '화자의 삶을 지켜보는 조상의 혼령과 같은 존재'이거나 '나의 잠재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는 화자인 '나'만이 볼 수 있는, 타인과 관여한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죽은 할아버지를 닮았다. 체취까지도 똑같다.' 그리고 법사가 타는 비파는 '나의 사랑을 형상화'시킨 상징물로 처리된 듯하다. 일컬어 야에코의 운명 같은 것. 「야에코는 베틀 짜는 방 한 쪽 구석에서 울고 있다. 그 등은 고양이처럼 둥글고, 묶은 긴 머리카락의 떨림은 아주 아름답고,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는 법사의 비파소리와 흡사하다....가끔 병풍 속에서 들려오는 야에코의 가냘픈 목소리는, 비파소리와 잘 어울린다. 그것은 법사의 갈라진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내 목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장인 스무살의 '나'와 '야에코'의 사랑은 금기를 어기고 만들어 가는,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사과밭이고, 사과는 이 소설의 주제를 이미지로서 구축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둘은 금단의 열매를 탐하다가 실낙원에서 떨어져 나온 아담과 이브처럼 '허락될 수 없는 사랑'에 탐닉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아버지는 언젠가 틀림없이 못된 짓을 할 여자, 한 남자로 만족 못할 여자이기에 파국을 불러올 것이라 걱정하고 있다.
셋째 장에 그려진 것은 서른살 나이에 가을 바람처럼 달아나 버린 사랑 이야기를 좇고 있다. 야에코는 고향을 떠나 남자들을 전전하고 있다가 그녀 아이를 돌봐 주던 어머니가 죽자 마을로 돌아와 장례식을 치룬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돌려보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애써 그녀의 냄새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탈진한다. 야에코가 떠나자 법사는 '안녕'이라고 중얼거린다. 나의 분신이기도 한 법사는, '칼을 휘두를 때 나는 신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이는 초원을 헤쳐나가면서 한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안녕을 되풀이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야에코하고의 3년간...나한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 변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고백에서 '나'의 극에 달한 상심과 절망을 읽을 수가 있다.
마지막 장은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위의 호수, 흐느낌과도 같은 얼음의 삐그덕거림은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동결시키는 이미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나는 여전히 마을 주민이며 비정상적인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은 황폐해졌고 광기 넘치던 마을은 환멸스럽게 쇠락해 있다. 그래도 나는 봄을 기다린다. 게다가 봄이 되면 예전의 흰둥이를 닮은 흰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생각한다. 눈이 오는 어느날, 장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나는 설피 없이 야에코네 쪽으로 난 발자국을 본다. 거기서 눈 위에 쓰러져 있는 마지막 야에코를 본다. 그녀는 아이도 없이 돌아와 얼어죽은 것이다. 나는 생선 껍데기옷을 그녀에게 입혀준다. 이때 일식이 일어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랑하는 이를 이승에서 떠나보낸 자의 완벽한 절망이 이 소설의 휘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여러 이미지가 충만해 있다. 달, 사과, 병풍, 생선 껍데기 옷, 비파, 거지 법사, 등과 같이 여러 중첩된 단어들이 환상과 어우러져 서사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선 병풍은 '클라인씨의 병'인냥 마련되어 있어서 과거 속으로 생생하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환상을 현실로 재연해도 크게 무리 없게 해준다. 네 폭 짜리 병풍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크게 회상해보는 이 소설은 '허무한 사랑'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사랑은 무엇인가? 작가는 상징과 환상, 이미지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까닭에, 이 소설에서 명쾌하게 그 답을 내리지 못한다. 우리가 인생이 무엇이다...라고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깊은 허무와 고독과 절망이 숨겨져 있다. 환멸스러운 세상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마루야마 겐지의 이 주인공은 달리 저항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현실을 수용할 뿐이다. 그의 수용은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자포자기이면서도 가슴 속 환상을 비수처럼 벼리면서한 켠 독한 의지를 품고 있다. '내 사랑은 이것으로 충분하다...'이게 진정한 자포자기의 모습이던가? 아니다. 그는 절망스럽긴 해도 무엇이 더 나은 길인지를 잘 안다. 작가는 한 인간(야에꼬)의 욕망이 파멸로 이끌고 가는 것과 분수를 알고 인생을 수용하는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대응시키지 않았던가?
내 기억으로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달에 울다>가 처음이다. 그는 간결하고 응축된 문체 속에 시각적인 이미지 구축에 능숙한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서사적 현실은 환상과 어우러져 묘한 이미지를 만든다. 굳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필요조차 없다.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그것은 현재시제가 되어 독자를 현실세계로 인도하며, 의식세계의 시각적인 전개가 온갖 이미저리가 넘치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봐야 검증될 터이지만 아마도 이것이 마르야마 겐지의 장점일 것이다.